돌,비석이야기 (82) 썸네일형 리스트형 김제 진봉초 최한열 동상 김제 진봉초 최한열 동상 김주황 73년 전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6.25 전쟁에서 군인 전사자가 연합군 포함하여 약26만 여명이 전사하였으며 민간인은 100만여명 추정이며, 북한군 중공군과 민간인 포함하여 최소 250만여명 사망이 추정된다고 한다. 인간의 목숨이 350여만명 이상이 희생되는 이러한 전쟁은 또다시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된 분들을 위한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서 이 땅에 자유와 번영을 꽃피우는데 헌신하신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며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호국용사 이분들의 위대한 용기와 헌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 당당한 선진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진봉.. 익산시 성당면 남궁찬 대제학의 묘 익산시 성당면 남궁찬 대제학의 묘 완주 박기순 불망비 완주 박기순 불망비 완주군 용진읍 간중리 2-1 완주군 용진면 봉서사(鳳棲寺) 인근에 위치한 박기순(朴基順, 1857~1935년) 불망비로 바위에 각인한 형태이다. 전면에는 ‘부경 박공기순 개선 불망비(副卿 朴公基順 改繕 不忘碑)’, 후면에는 ‘박기순(朴基順)’이 새겨져 있다. 박기순은 1906년 7월 시종원(侍從院) 부경(副卿)에 임명되었다. 전면에 새겨진 정보에 따르면 이 불망비는 다이쇼 5년(1916년) 7월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박기순은 전주와 익산 일대에 광범위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각종 개발 과정에서 박기순과 그의 아들 박영철은 적극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일제 강점기 전북지역 개발이 조선인 자본가 박기순의 토지 자본 축적과 밀접하게 연관돼 이루어졌다. 이를 기반으.. 완주 대아댐 사이토 총독 전서 '만불일 작불갈’(滿不溢 酌不竭)' 완주 대아댐 사이토 총독 전서 '만불일 작불갈’(滿不溢 酌不竭)' 완주군 고산면 소향리 205-3 완주 대아리저수지 사이토 총독 글씨는 1922년 대아댐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가 쓴 글씨이다. ‘만불일 작불갈’(滿不溢 酌不竭)‘이라는 여섯 글자가 전서체로 각각 1m에 달하는 크기로 새겨 져있다. 이 뜻은 ‘가득차도 넘치지 않으며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다’로 구댐에 붙어 있던 것을 신댐이 완공될 때 떼어내 현재 위치로 옮겨 붙인 것이다. 현재 위치로 옮기기 위해 글씨를 떼어내면서 실수로 ’갈‘ 자가 떨어져 깨어졌는데 다시 이어져 붙이면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 전북지사고원훈, 완주 경천저수지 석판 '옥포금성' 완주 경천저수지 석판 '옥포금성' 완주군 경천면 경천리 642-5 완주군 화산면 성북리에 있는 농업 관개용 저수지이다. 원래 완주군 운제리 옥포(玉包)에 해당하던 이 지역은 1933년 수리사업 개발에 따라 저수지가 되어 ‘경천저수지’로 불리게 되었다. 1934년 전라북도지사 고원훈(高元勳)이 저수지 수원 석판에 ‘옥포금성(玉浦金城)’을 새겨 이후 이 지역의 이름이 ‘옥포(玉浦)’가 되었다. 고원훈은 1932년 9월부터 1936년 5월까지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소화9년 6월(1934년) 새김 충청남도 대둔산 석천암 석각 오늘 충청남도 논산의 대둔산, 기암절벽 아래 자리해있는 석천암을 방문했습니다. 이곳에서 기거 중인 천산 스님을 만났습니다. 홀로 있는 이곳이 지상낙원이라 일하는 재미보다 산속에서 사는 즐거움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산사람이라 부른답니다. 샘물 옆 바위에는 ‘침석(枕石)’과 ‘수천(漱泉)’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돌을 베개 삼고 샘물로 양치질한다’는 뜻입니다. 은둔자의 생활철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돌 속에서 나오는 샘물 말고는 뭐가 있겠는가. 그러니 돌을 베개 삼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있는 사람의 심정은 무엇이겠는가. 완벽한 무소유가 아니겠는가. 가진 것은 돌베개뿐입니다. 순천 송광사 침계루도 생각이 납니다. 치마 바위의 모습도 너무 좋았습니다. ㅡㅡㅡㅡ 대둔산 석천암에 샘(石泉)이 있는 암.. 무성서원 현가루 정읍 칠보 무성서원은 유학의 비조인 고운 최치원선생을 주벽으로 모신 곳으로, 조선 성종 15년(1483)에 창건돼 숙종22년(1696)에 지금의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사액은 강당 중간에 걸려 있는데 서체는 해서로 쓰여 있으며 필획이 정갈하게 되어 있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전북에서 유일하게 정통성과 당위성을 인정받아 훼철되지 않았고, 좋은 풍속과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근래에는 무성서원의 가치를 인정받아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영주의 소수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지난해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상태이다. 무성서원에는 여러 개의 편액과 주련이 있다. 우선, 제향공간의 기능을.. 지리산 복석동 1500년전 한 나라의 절박한 마음이 후세에 문화로 넘어온 지리산 복성동 이야기 어제 지리산 아막성의 전쟁 흔적을 찾아갔다 서기 602년에 백제와 신라의 국운을 건 전투현장이라고 배웠던 역사지의 선입감은 늘 그렇듯 허망이고 은퇴한 시골 노인의 골방처럼 앞에 다가올 뿐이다 백제군의 아막성 공격은 군사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난관에 봉착해야만 했으리라 적은 군사로 아막성을 지켜내던 신라군의 지원군과 지형지물에 익숙한 전투력 거기에 군량미의 현지 공급처 존재는 백제군의 사기에 커다란 무기였을 것이니 백제군은 절박한 그 상황에 처한 병사들의 사기를 키워내야 하는 계책을 찾아야 했으리라 그 계책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삼국시대의 여러 전쟁터에서 보이는 것중 하나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내고 그 흔.. 이전 1 2 3 4 5 6 7 ··· 11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