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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석이야기

지리산 복석동

1500년전 한 나라의 절박한 마음이 후세에 문화로 넘어온 지리산 복성동 이야기

어제 지리산 아막성의 전쟁 흔적을 찾아갔다
서기 602년에 백제와 신라의 국운을 건 전투현장이라고 배웠던 역사지의 선입감은 늘 그렇듯 허망이고 은퇴한 시골 노인의 골방처럼 앞에 다가올 뿐이다

백제군의 아막성 공격은 군사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난관에 봉착해야만 했으리라 적은 군사로 아막성을 지켜내던 신라군의 지원군과 지형지물에 익숙한 전투력 거기에 군량미의 현지 공급처 존재는 백제군의 사기에 커다란 무기였을 것이니 백제군은 절박한 그 상황에 처한 병사들의 사기를 키워내야 하는 계책을 찾아야 했으리라

그 계책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삼국시대의 여러 전쟁터에서 보이는 것중 하나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내고 그 흔적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것은 전쟁에 나설때 승전과 패전의 길흉 그리고 공격시점과 후퇴같은 군사적 전략을 동물뼈를 가지고 점을 쳐서 활용했다는 것이다

중략

아막성 주변에 전해오는 점골의 지명은 두 곳이다
큰 곳 하나가 복성동이다
그곳은 백제군이 아막성을 공격하기 위한 진군로이다 그곳에 두고개 ㅡ 새멕이고개 ㅡ 장삼이 고개가 이어져 있다

백제군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두고개 ㅡ 조금 내려가면 백제군의 행렬이 새 목아지처럼 길게 보인다는 새목이 고개 ㅡ 그 고개 아래에 중들이 입은 장삼옷처럼 온산이 병사들의 깃발로 펄럭인다는 장삼이 고개 ㅡ 그 세고개의 끝에서 아막성 공격을 위한 때를 알아보기 위해 점을 정성으로 쳤다는 복성동이 있다

말바위의 복성동 각자는 아마도 그때 사람들의 마음을 새겼을 것이다
말바위의 말은 바위의 모양을 말함이 아니라 그 시대의 우두머리 즉 머리를 말함이라고 하니 그 바위에서 최고 우두머리 즉 총사령관이 동물뼈로 전쟁 점 고사를 했던 곳이 아닐까 싶다
복성동을 새겨놓은 말 바위에 고사상의 다리와 연봉우리 촛대가 보이니 말이다

이 마을 유래에도 그 이야기의 씨앗이 보인다 마을 이름을 땅골·당골·당동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복성동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의 개울 상류에는 새목이재·복성이재(일명 두
고개)와 장삼이 등이 있는데, 당시는 통칭하여 복성동이라 했다. 오늘날까지 새복이재와 복성이재에는 토성 터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옛날에는 점을 쳐서 전쟁을 했는데, 이곳에서 점을 쳤다고 하여 복성동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도 장삼이 입구 말바위에는 큰 글씨로 복성동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말이다

나라를 구하려는 충성의 마음은 백성의 뼈와 피에 들어 상속 되어야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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