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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홍성모 화백의 붓 끝에 흐르는 국토의 숨결, 부안에서 무주까지 홍성모 화백의 붓 끝에 흐르는 국토의 숨결, 부안에서 무주까지화가의 손은 정직한 지도다. 하얗게 센 머리를 뒤로 묶은 홍성모 화백의 거친 손등에는 그가 평생 걸어온 우리 산하의 흙먼지와 묵향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는 단순히 풍경을 보고 그리는 이가 아니다. 현장의 공기를 마시고, 새소리를 들으며, 대지의 뼈대를 온몸으로 감각한 뒤에야 비로소 붓을 드는 실경(實景)의 수행자다.그의 필생의 여정은 고향 부안에서 닻을 올렸다. 화백은 위도에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붉게 물든 적벽강과 사자바위를 바라보며, 이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화폭에 붙잡아 두겠노라 다짐했다. 계화도에서 줄포만까지 99km의 해안선을 배로 돌고 발품을 팔며 완성한 대작들 속에는 갯벌의 짠내와 내소사의 아늑한 설경이 살아 숨쉰다. 그것은..
전북에서 지은 한시와 산문 속 음식 전북에서 지은 한시와 산문 속 음식1. 친구에게 게를 보내며 장난으로 시 짓다(寄蟹友人, 戱詩)양경우가을 포구의 *곽삭옹(郭索翁)이줄줄이 산 채로 포박되어성난 눈은 칼처럼 섰고긴 다리는 창같이 비꼈네.풀과 진흙에 머물렀다가도마 위에 잘게 잘려잠깐 솥에 끓여 내어*손 적시며 탐하는 객 비웃으리.메마른 창자 한번 배부르니*풍환의 칼 노래를 그치리.*뾰족하고 둥근 배꼽 스물을옛 친구에게 나눠 보내 먹이였네.게는 본래 호남의 생산물보면 돌아가고픈 흥이 나니남녘의 좋은 풍미를아는 이에게만 말하리라.秋浦郭索翁 縷縷似生縛怒目豎如刀 長脚橫似槊留迹草泥中 碎躰砧俎側沸鼎具俄頃 染指笑饕客枯腸得一飽 免咈馮生鋏尖圓二十膓 分寄故人喫此物本湖南 見之舡興發南中好風味 可與知者說• *곽삭옹(郭索翁): 게를 의인화하여 부르는 말.• *손 적..
박도순(사진가, 수필가)
<124> 박도순 사진가의 '주름에 가둔 가을, 바람의 초상' 박도순 사진가의 '주름에 가둔 가을, 바람의 초상'보건진료소의 현관문은 새벽부터 소리 없이 흔들리곤 했다. 감기가 깊어져 골골대는 몸을 이끌고 찾아온 이도 있었지만, 대개는 밤새 가슴에 차오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문을 두드리는 이웃들이었다. 낮에는 그들의 시린 무릎을 만져주는 간호사로, 밤에는 먹먹한 외로움을 채워주는 딸이자 며느리로—박도순 사진가는 그렇게 무주 산골의 낮과 밤을 35년 넘도록 지켜왔다.그녀가 청진기 대신 카메라를 들어 올린 것은, 어쩌면 이 쓸쓸한 농촌의 풍경이 눈부시게 빠른 세상의 뒤편으로 영영 지워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예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그는 보건진료소장이기 보다 고향 어른들의 딸이요 며느리이자 이야기 벗이기를 자청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친구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기..
<123> 송만규 화백의 '물결 위에 번지는 묵언의 가르침' 송만규 화백의 '물결 위에 번지는 묵언의 가르침'살아가다 마음 둘 곳 없이 헛헛해질 때면, 나는 송만규 화백의 화폭 앞에 멈추어 선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물 소리와 짙은 물안개 냄새가 번져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수십 년간 섬진강과 만경강가에 머물며 강물을 먹물 삼아 붓을 적셔온 그의 손끝에서는, 단순한 풍경을 넘어 자연이 인간에게 건네는 나지막한 위로가 피어난다.그는 '섬진강 화가'로 널리 알려진 한국화가로, 30년 넘게 섬진강의 사계절을 화폭에 담아왔다.그에게 섬진강은 그 자체로 산수화다. 유유자적한 강물, 산 정상에서 내려보면 펼쳐지는 운해(雲海), 강과 산에서 끝없이 솟아오르는 기운은 가히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고. 격동으로 굽이쳐온 삶에서..
<122> 이일청 화백의 '내면의 파랑, 우주의 봄을 바르다' 이일청 화백의 '내면의 파랑, 우주의 봄을 바르다'회문산 자락에 어둠이 내리면, 세상의 소음은 이내 고요와 적막 속으로 침잠한다. 작업실 창 너머로 쏟아지는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 수많은 파란색의 기억들이 웅성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한다.자연에서 마주하는 파랑은 언제나 차갑기보단 고요하다. 그러나 내가 캔버스 위에 풀어놓고자 하는 파랑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밤하늘의 색이 아니다. 그것은 생의 후반기를 지나며 비로소 마주하게 된 거울이자,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자기성찰의 상징이다.회문산의 겨울을 매서운 바람으로 맞이하며 혼자만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의 시간을 보냈다. 골짜기 따라 산을 오르며 유난히도 많은 바위 돌들을 봤다. 눈이 오면 더욱 맑게 흐르는 물따라 ..
<123> 벽암 김정남 서예가의 '획(劃)에 담긴 우주, 발칙한 먹향을 따라서' 벽암 김정남 서예가의 '획(劃)에 담긴 우주, 발칙한 먹향을 따라서'살아가다 보면 문득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추고, 오롯이 나만의 숨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인사동 어느 전시장 벽면에서 벽암(碧岩) 김정남 서예가의 글씨를 마주했을 때가 바로 그러했다. 벽암은 고전의 법도를 지키면서도 현대 서예의 파격적인 시도를 멈추지 않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예술 정신을 지니고 있다.따라서 그의 호인 벽암은 "푸른 바위처럼 언제나 맑고 올곧은 정신을 지키면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단단한 예술적 기개와 철학적 깊이를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여기의 벽(碧)자는 벽성(碧城) 즉, 김제를 의미한다.흔히 서예라 하면 박제된 고전이나 지루한 옛것을 떠올리기 ..
<122> 송천 염영선 작가의 '나무에 새긴 마음, 칼끝에 머문 숨결' 송천 염영선 작가의 '나무에 새긴 마음, 칼끝에 머문 숨결'"안중근 의사(1879~1910)가 1910년 2~3월 뤼순감옥에서 순국 직전 남긴 친필 유묵은 200여 점으로 추정, 유묵 가운데 현재 60여 점이 확인됐다. 보물 31점은 단일 인물로는 최다 보물 지정 기록이다. 이들 유묵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과 동양평화론을 담고 있다. 이에 서각으로 담으면서 안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담았다"고창군 상하면 구시포안길 자신의 '안중근의사 유묵 서각 갤러리'에서 만난 송천(松川) 염영선 작가는 "일본에서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그의 유묵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서각으로 새겨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