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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사람들

진학종초서전

 

 

녹음이 짙은 초록으로 그 빛을 더해가는 6월. 싱그러운 초록과 시원한 물빛의 계곡이 만들어 내는 조화는 세상, 그 어떤 빛깔보다 아름답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르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원시의 생명력을 느끼며 흠뻑 빠져들게 될 터.  대자연을 찾아 잘 가꿔진 꽃과 나무들이 뽐내는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조각배를 타고 낚시를 하다가 한 잔 술에 세상 모든 시름을 날려보내는 여유는 금상첨화이자 저마다 꿈꾸는 모두의 희망 사항. 초여름의 무더위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전시회가 기획돼 눈길을 끈다.<편집자 주>

 

 ‘손님도 저 물과 달을 아는가. 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모두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나 마침내 줄고 늚이 없으니, 변하는 이치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 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 사물과 내가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   천지의 사물은 제각각 주인이 있어 나의 소유가 아니면 한 터럭이라도 갖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에 걸린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만듦에도 불구,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갈무리로 나와 그대가 진정으로 함께 누릴 바 로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동파(蘇東破)의 천의무봉(天衣無縫) 명문장 ‘적벽부(赤壁賦)’ 고창출신의 취운(翠雲) 진학종(陳學鐘, 83, 서울시 노원구 중계4동)선생의 초서작품전이 6월 30일부터 7월 13일까지 전북예술회관 1층 1-2실서 소동파의 ‘적벽부’ 등 병품 20점을 포함, 족자 20점, 서각  20점 등 모두 60여 점이 전시된 가운데 베풀어진다.
 ‘서예의 끝’이라고 하는 초서로 일가를 이룬 취운선생의 서예 인생 60년을 결산하며 유려한 작품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로, 전주고별전의 성격을 갖고 열리는 서예 마당인 셈.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나는 일필휘지가 보통 30분 안팎으로 결정되며 작품으로 태어나지만, 2시간 여를 느긋하게 구경해야 비로소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초서의 최고봉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제갈공명의 ‘출사표’ 등 ‘고문진보’에 실린 명문을 발췌해 쓴 초서 병풍, 족자, 서각은 바로 이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옥동자인 셈. 특히 초서는 예서의 자획을 생략해 흘림체로 쓴 서체로, 한문 공부를 통해 문장을 외우지 못하면 실현 불가능한 분야인 만큼 83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취운선생은 60년 동안 소멸해가는 초서문화를 재현시키기 위해 ‘형설(螢雪)의 각고’로 그 결실을 보게 만든 것. 때문에 어려운 악필(握筆) 솜씨로 천의무봉한 초서의 진수를 구현하여 사계에 명성이 자자, ‘ 동양 3국 최후의 초서’란 명성의 실체를 낱낱이 풀어헤쳐 보인다. 한평생 황산곡(黃山谷), 왕총(王寵) 등 초서 대가들의 글씨를 익혀 독자적인 ‘취운체’를 개발, 초서의 최고봉으로 우뚝 솟아 있기 때문.
 “초서는 선과 여백이 어우러진, 글씨이자 예술입니다. 2백년 전에 절멸되다시피한 초서를 재현하는데 몰두,개발한 취운체는 말뚝을 땅에 힘껏 박을 때 쥐는 방식인 악필로, 특유의 리듬감이 살아 있는 글씨입니다. 해서가 앉아 있는 글씨라면, 초서는 달음질 치는 글씨지요. 초서의 묘미는 몰아지경에서 단숨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데 있습니다.”
 한 글자만으로도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詩)와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취운선생은 “초서를 쓰기 위해선 붓을 한 번 먹에 적시면 한 번에 써내려 가야 하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머리 속에 훤히 암기돼 있어야 하는 것은 필수”라며 “수만 번 연습한 결과, 2백10자나 되는 굴언의 ‘어부사’를 단 25분 만에 써내려갈 수 있다.”고. 초서의 길에는 도공이 흙으로 다양한 명품을 빚어내고, 주물사가 철그릇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겪는 변화가 극치가 있다는 설명. 하지만 요즘엔 초서를 쓰는 사람이 줄어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단다.
 “초서는 도연명과 소동파 같은 학자들이 쓴 원문 속에 그 원형을 둔 족보 있는 글씨인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쓰는 사람이 줄어 안타깝다.”며 수준 높은 한학의 본 고장 전주에서 다시 초서전을 갖는 만큼 개관적이고도 냉정한 평가를 듣고 싶다고.
 SK그룹 손길승회장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굴원의 ‘어부사’와 제갈공명의 ‘출사표’는 귀빈이 방문하면 언제나 빼놓지 않고 자랑하는 취운선생의 글씨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보물과 같은 존재.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 김윤환, 이회창, 정몽준, 하순봉, 조순, 박희태, 한광옥, 이수성, 김기춘, 신현확, 오명, 김수한, 황낙주, 이어령, 진념, 고은, 강현욱 전라북도지사 등 내놓라하는 인물들이 취운선생의 주요 병풍 소장처이기도.
 어려서부터 익힌 한학 실력과 예술적 안목을 바탕으로 초서에 몰입해 온 취운선생은 한학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가운데 요즘도 꼭두새벽에 일어나 마음을 가다듬고 일필휘지의 공력을 들이고 있다.
 10곡 병풍도 1시간이면 모두 쓸 수 있다는 취운선생의 글씨는 고속운필로 흥취 있고 리듬감을 살려 아름다운 선율처럼 유려한 느낌 바로 그대로. 부안 직소폭포에서 내리치는 듯한 폭포 소리를 들으며 살얼음같이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이치이거니와 눈과 귀 또한 이제 막 보고, 듣기 시작한 듯한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할 때란. 탁 트인 전북예술회관 1층 전시실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이 여름의 무더위는 대수가 아니다. 요산요수(樂山樂水), 물아일체(物我一體), 선인불이(仙人不二)의 세상으로 사방팔면 벽면마다 유혹할 날이 이제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진학종은
 
 1924년 고창군 무장면에서 출생한 취운 진학종선생은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친동생으로 병풍과 전각 액자 등 1백 여 점을 모아 대형작품집 ‘취운 초서병풍첩’을 발간하는 등 60여 년 동안 고집스럽게 초서에 몰두해왔다. 수십 차례에 걸쳐 국내 개인전을 가진 것을 포함, 중국 상하이 한중합동전, 일본신문협회초대전, 홍콩초청작가전 등 해외작품전(개인전 등)에 참가하기도 했다. 범태평양미술대전초대작가상과 싱가포르 공익부 공로상을 수상하기도한 취운선생은 제3회 세계서예전북 비엔날레(2001년)에 초대된 바 있으며, 서울미술제, 대한민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 현재 국전 초대작가, 예술의전당 초대작가, 세계서법예술연합 고문, 대한민국초서심추회 회장을 맡고 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