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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행복산책

알고있습니까. 잊혀져가는 2.8독립선언일

 내일(8일)은 2.8독립선언 제87주년 기념일.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의 뇌리 속에 잊혀져가고 있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 행사가 동경과 서울에서 나란히 열려 눈길을 끈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재일 유학생들이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독립선언을 선포하여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 선포 제87주년 기념식이 8일 오전 11시 재일본 한국 YMCA 한국문화관에서 재일본 한국YMCA(이사장 이종선) 주관으로 개최된다.
 기념식은 정부대표로 참석하는 김정복 국가보훈처 차장을 포함, 김국주 광복회장, 라종일 주일대사, 김재숙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중앙본부단장 등 주요 인사와 광복회원, 교민 등 2백50여명이 참석한다.
 김정복 국가보훈처 차장은 동경의 ‘2,8독립선언 선포 제87주년 기념식’에 앞서 지난 6일 오후 6시에 동경 미야꼬 호텔에서 2,8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역할을 했던 최팔용선생의 손자 최정식씨와 김상덕선생의 아들 김정육, 김도연선생의 손자 김민회씨 등을 초청, 만찬을 갖고 후손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특히, 이날 만찬행사에는 최팔용, 김지섭 선생 등 항일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등 대한독립에 기여한 공로로 2004년 10월 12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 받은 변호사 후세 다쓰지선생의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일본평론사 사장)씨도 초청됐다.
 2.8독립선언은 한국학생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항일 학생독립운동의 최고봉으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영향을 받아 재일 한인유학생들이 ‘조선독립 청년단’을 발족, 고창군 성내면 출신의 백관수선생을 포함, 최팔용, 송계백 등 10여 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고, 재일 한인유학생 4백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국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 대통령 T.W.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계기가 되었고, 직접적으론 1918년 12월 15일자 에서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와, 12월 18일자에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포함한 약소 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된다고 하는 보도에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에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 김도연(金度演), 백관수(白寬洙) 등을 선출했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송계백(宋繼白)을 국내로, 이광수(李光洙)를 샹하이로 파견했다. 이어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 정부, 일본국회 등 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사회자의 소개로 등단한 조선청년독립단장 백관수는 차분한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 순간 일본경찰의 저지와 이를 가로막는 학생들과의 격투가 벌어졌고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래도 백관수의 낭독은 계속됐고, 이어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 사회자 윤창석의 기도로 끝이 났다. 그러나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실행위원을 포함,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됐다. 하지만 2.8독립선언은 국내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1920년대 청년, 학생의 항일투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국내, 외에 수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편 서울에서도 7일 오전 11시 서울YMCA대강당에서 정하철 서울지방보훈청장을 포함, 광복회원, YMCA회원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YMCA(회장 강태철)와 한국독립유공자협회(회장 전리호) 주관으로 열렸다. 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