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가장 인기 높은 감사는 전라감사와 평양감사였다고 한다. 전라감사를 하면 재물을 많이 모을 수 있고, 평양감사를 하면 빼어난 명기들과 함께 풍류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북도는 이 같은 농경사회의 풍부한 생산물을 생산해낸 까닭에 가혹한 수탈과 정치적 소외에 의한 현실 도피 심리, 풍류와 멋을 즐기는 기질, 그리고 세습무와 광대집단의 형성과 같은 이유가 결합하면서 판소리를 포함, 농악, 산조, 시나위, 풍류음악, 민요, 무악 등과 같은 빼어난 전통예술의 보고가 됐다. 동쪽으로는 눈을 들면 험준한 지리산을 포함, 덕유산, 모악산, 내장산, 대둔산, 마이산, 선운산, 강천산, 장안산 등을 끼고 있으며, 노령산맥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만경강과 동진강, 진안고원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섬진강, 소백산맥의 남서부 줄기에 자리잡은 장수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금강 등 천혜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완산8경의 하나인 위봉폭포, 변산8경의 하나인 직소폭포, 그리고 남원의 뱀사골과 구룡폭포 등은 무공해 청정지역으로 상큼한 향기와 혀끝을 사로잡는 감칠맛 나는 ‘맛향(鄕)’으로 여전히 자리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이것만 가지고는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다. 전북이 국악 부문에서 전국 상위권에 랭크, 전통의 고장임이 다시금 확인됐다. 서울에서 이루어진 공연이 38.3%이며, 전북의 공연이 19.7%를 차지, 이 두 지역의 공연이 전체의 5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원장 현기영)이 발간한 《문예연감 2005》 자료에서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2004년 국내에서 이뤄진 국악공연은 모두 2718회로 조사, 이 가운데 서울에서 이루어진 공연이 38.3%, 전북의 공연이 19.7%를 점유, 전체의 58%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수치는 2003년(2535건)보다 183회가 더 증가한 데이터로 전주전통문화센터의 ‘한벽극장’ 상설공연 등과 전북지역의 축제(또는 문화제, 예술제 등)들이 최근에 두드러지게 증가하면서 축제의 일환으로 국악공연이 많이 열리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또 전라북도립국악원과 남원국립민속국악원이 활발한 공연활동을 보이고 있는 데다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을 중심으로 연중 다양한 국악공연들이 꾸준히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경우, 일반인들과 애호가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앞서 지적한 공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다시 영화 <서편제>가 몇 해 전 엄청난 인기를 끌었음을 상기할 필요를 느낀다. 계면조의 처연한 소리와 남도의 풍경, 소리꾼의 인생유전이 어우러져 한국적 ‘한(恨)’의 정서를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이 때부터 일반인에게는 국악하면 영화 <서편제>를 떠올릴 정도였다. <서편제>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아비가 선창하면 딸이 뒤를 따르는데 음이 맞지 않다고 호통을 치는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주변에서는 흔하게 제공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이 ‘독공(獨功)’을 통해 익힌 소리를 따라 하면서 선율과 성음, 시김새, 부침새 등 오묘한 소리의 세계를 자신은 물론 일반인들이 체험 가능케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문화상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가 2003년 11월 유네스코의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 약칭 세계무형유산)으로 선정된 데다가 전주세계소리축제 등 각종 푸진 무대 위에 자연의 숨소리와 함께 하며 서로 하나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더한다.
사실, 판소리에 입문한 어린 소리꾼에서부터 소리에 무게를 더한 예술의 경지에 이른 명창까지 판소리 가창자의 폭은 다양하고 깊다 못해 그윽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판소리를 배우려면 폭포수 밑에서 피를 토하며 연습을 해야 한다든가, ‘산공부’에 들어가 한 번 소리를 끝낼 때마다 작은 돌을 쌓아 그것이 산을 이룬 뒤에야 ‘득음(得音)’했다는 사뭇 흥미로운 얘기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바야흐로 7, 8월은 소리꾼들의 계절이다. 7월부터 8월까지 ‘산공부’를 통해 맑은 공기와 자연과 호흡하며 그동안 못다 한 소리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계획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각 산과 골짜기에서 잇따라 이뤄지는 ‘산공부’는 이제, 새로운 풍속도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연례행사처럼 소중한 땀의 결실을 이뤄내는 필수 코스가 되고 있다. 이에 따라 소리꾼들에게는 1년 농사를 좌우할 정도로 가장 값진 시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국악인들이 ‘산공부’를 위해 무조건 지리산 자락으로 파고들거나, 또는 완주의 위봉폭포, 남원의 구룡폭포 등 유명 폭포를 찾던 예전의 양상과는 달리해서 이뤄진다는 게 가장 달라진 양상이다.
조선조 비가비 명창 권삼득이 구룡폭포의 물소리를 벗삼아 목에서 피가 넘어오도록 소리 공부에 초지일관했다는 얘기가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만의 수련원과 전수관 등으로 장소를 달리한 채 이뤄지고 있는 것. 그럼에도 대자연의 아늑함은 여전히 건재한 채 소리꾼들을 부르고 세사만사에서 벗어나라고 유혹의 손길을 길게 뻗친다. ‘오직 강가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빛깔을 이루어 취하여도 금하는 사람 없고, 써도 다함이 없다’는 소동파의 <적벽부>를 떠올리며, 실제로 <적벽부> 한 대목을 목청껏 소리 내어 부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올해도 도내에 제일 먼저 산공부의 장을 마련한 국악인은 오정숙 명창(68.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으로 알려졌다.
지난 7월 5일부터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동초각’에서 2~3개월의 일정으로 염천의 더위를 사르는 쩌렁쩌렁한 소리를 계곡에 울려 퍼뜨리고 있다. 한국판소리사에서 여자로서는 최초로 판소리 5바탕을 완창해 화제를 모았던 작은 거인 오정숙은 현대판소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리꾼이다. 이른 바, 동초 김연수제의 판소리를 오늘날까지 확장시키며 국제무대에서도 한국의 혼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소리를 가장 극적으로 소화해 펼쳐보이고 있는 명창이다. 특히 중앙무대의 화려한 명성과 조명을 뒤로 한 채 대둔산자락에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의 둥지를 튼 그녀는 스승인 동초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판소리의 산실 ‘동초각’에서 오늘도 북채와 자신과의 싸움에서 득음의 길을 찾아 나서고 있다.
“사실 완주로 낙향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가 다른 장르처럼 거의 서울 집중이기 때문에 그러하겠지만, 저는 저의 음악적 탯줄인 전라도 땅에서 저의 소리 세계를 잇는 것이 숭고한 사명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주저 없이 완주로 향하는 발길은 가볍기만 했습니다.” 조소녀 명창은 7월 20일부터 20일 동안 고창군 아산면 대기마을의 조소녀판소리연구원에서, 이일주 명창은 7월 27일부터 20일 동안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지향동 난석판소리전수관에서 각각 산공부를 실시하였다. 이명창의 경우, 위봉폭포를 곁에 두고서 매년 산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권삼득 명창이 높이 60여m의 기나긴 물줄기가 2단으로 나누어 있는 위봉폭포에서 소리 공부에 정진, 내로라는 소리꾼이 됐다는 지난 일을 잊지 못해서다. 위봉산성의 동문 쪽에 위치, 폭포 주변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가까운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을 기념하는 웅치전적지(전라북도기념물 제25호)와 종남산 기슭에 송광사가 있고, 하류에는 동상저수지, 대아저수지, 화심온천, 화심두부집이 있어 볼거리, 먹걸리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산공부의 명소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전인삼 명창은 7월말부터 장수군 번암면 성암마을 성암리 봉화산 자락에 위치한 자신의 수련원에서 대학원생들과 함께 산공부를 시작한다. 성암마을은 깊은 산중도 아닌데 인접 마을과 완전히 동떨어져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다. 해발 500m의 오염되지 않은 마을 자체가 최고의 상품. 농림부 지정 녹색농촌체험마을, 문광부지정 역사마을 만들기로 선정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섯 농가(20개의 방)가 참여하는 팜스테이 마을로 백용성 생가 등의 볼거리와 마을정자 체험, 밤하늘의 별자리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현실이니 더욱 더 친근감이 가는 장소다. 민소완.김영자.최승희 명창 등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꿈꾸며 이번 여름에 소리 공부를 할 것으로 보인다. 행정 당국과 관광 회사들이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된 판소리와 ‘산공부’를 일반인들의 휴가 일정과 맞추게 하는 등 문화관광상품으로 개발하려는 의지가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 대목이다.
완주군의 권삼득 묘역과 동초각, 그리고 위봉폭포를 잇는 산공부 프로그램을 포함, 부안의 이중선의 묘와 직소폭포의 어울림, 고창의 동리국악당과 고창판소리박물관, 신재효 고택, 진채선 생가터, 김소희 생가 등과 방장산 계곡과의 만남, 순창의 김세종 생가와 회문산의 조우, 남원의 국립민속국악원과 춘향문화예술회관, 송홍록&박초월 생가, 남원좌도농악전수관을 연결, 구룡폭포, 지리산에서 이어지는 여름 한철의 ‘산공부 투어’를 개발한다면 좋겠다. 옛집이 갖고 있는 역사적 유래를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현실 가능하고, 일반인들이 판소리와 손쉽게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가칭)산공부 페스티벌’을 전주세계소리축제 기간에 앞서 동시다발적으로, 또는 일정에 따라 펼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폭포수 밑에서 누가누가 목소리가 더 큰가를 경연하며, 폭포수 밑에서 더 오래 버티기 시합 등 결국, 의미 있는 여름휴가가 가능하며 자연보호 활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숙 명창은 “기암절벽과 울창한 수풀이 잘 어우러진 ‘동초각’은 살면 살수록 소리 공부를 하는 데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소리의 정진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여름의 산공부는 정서적으로도 효과가 아주 크다”고 말했다. 꼭 산공부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소리꾼들의 정진하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침이면 물안개에 젖어 숲길을 거닐고, 한밤엔 모깃불 피우고 별빛에 젖어 볼 수 있는 등 전통과 현대,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만남은 각종 다양한 문화 체험으로 이끌 터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물이 흘러 차가운 계곡으로 이어짐은 물론 서늘한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산길을 애써 찾아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심장을 멎게 할 듯한 시원한 약수 한 모금을 마시고 산에 오르는 길. 내려오기가 무섭게 토속음식으로 시장기를 채운 후 마을의 황톳길에서 확 날려버린 각종 스트레스. 오감(五感)을 즐겁게 하는 자연과의 대화 창구, 산공부를 현실화했으면 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지금, 소리 한 대목을 배울 수 있는 여름이 깊은 잠으로 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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