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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전주 청수정(淸水町)과 오일주조장 송주상

정인수 화백의 땅샘

                                       사진: 일제감시등록대상카드(송주상)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성명 송주상, 주소 전라북도 전주주 전주 완산정 176’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소화 4년(1929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라는 명성까지 얻은 전주에는 비빔밥, 콩나물국밥과 함께 막걸리의 명성도 자자하다. 전주막걸리가 맛있는 이유는 물이 좋기 때문이다.

한옥마을이 있는 교동은 예부터 청수정(淸水町)이라 불릴 만큼 좋은 물맛을 자랑했다. 게다가 전주는 김제와 만경 등 비옥한 전북의 쌀 생산지를 옆에 두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청수정이라 불리던 전주 한옥마을에 맑은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청수정에 살던 사람들은 맑은 샘물로 빨래도 하고 머리도 감고 길어다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전통공예품전시관 자리에 있었던 오일주조장은 청수정의 맑은 샘물로 술을 빚었다. 샘물이 좋아서일까? 술맛도 아주 좋았다.

우리네 아버지가 환갑을 맞거나 이웃집 장손이 결혼을 하거나 옆집 어르신이 갑자기 돌아가시거나 할 때 사람들은 오일주조장에 갔다. 사람이 살면서 치르는 애경사에 술은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주조장은 늘 마을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옥마을에서 오목대 북서쪽에 있던 오일주조장과 함께 인근의 향천주조장에서도 술을 빚었다.

자연적으로 솟아오르는 물줄기가 두 군데나 되는 쌍샘은 좋은 술을 만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오일주조장도 향천주조장도 마을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야말로 한옥마을 주민들의 ‘생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는 한국화가 남강 우상기화백의 설명이다. 이 부근이 화백의 집이었단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1970년에는 전주의 막걸리 양조장은 전부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의 전주공예품전시관 자리에는 오일주조장, 쌍샘이 있는 향교길엔 향천주조장 그리고 한옥마을에서 남천 교를 건너면 재래 누룩 공장이 있었다.

한옥마을에서 남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천변을 따라 걷다보면 ‘흥시성회’라고 쓰인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허름하지만 과거에 막걸리양조장으로 사용되었고, 비교적 막걸리공장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청수정이란 옛 지명과 우물이 있었을 만큼 물이 맑기로 유명했던 한옥마을에 있었던 대표적인 오일주조장, 향천주조장 등 동네 양조장이 있었다.

전주사람 송주상(宋柱祥)은 1920년대 청년 사회운동가의 삶에서 1930년대에 ㈜전주주조와 전북곡자주식회사의 대표로 삶이 전환된다.

송주상은 한때 ‘청수정’이라고 불린 한옥마을 안에 있었던 유서깊은 오일주조장 대표 송정섭의 아버지이다

그는 1927년 5월 10일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신간회 전주지회의 참여자이며, 옥고를 치르고 나와 ㈜전주주조의 대표자이자 ㈜전북곡자의 중역으로 활동하는 특이한 삶의 이력을 남기게 된다.

자료는 '성명 송주상, 주소 전라북도 전주주 전주 완산정 176’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소화 4년(1929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주 시내에 5개 양조장 밖에 없었던 1930년대부터 전주지역에 막걸리(탁주)와 약주를 공급했던 오일주조장(오목대 밑 교동 소재)은 그러나 1970년대 전주주조공사로 통합되면서 다른 주조장과 함께 역사에 묻히게 됐다.

군사정권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오일주조장을 포함한 전주 관내 18개 양조장들이 ‘전주주조공사’로 통합되는 운명을 맞게되 어 전통약주제조비법이 역사속에 묻혀야 하는 쓰라림을 겪었다.

풍남동은 일제 강점기 시대 인근 중앙동과 더불어  행정 및 상업의 중심지였다. 당시에는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통·정·정목'에 따라 '풍남정',  '청수정',  '화원정' 등으로 불리었다.  간재 전우선생이 태어난 다가동은 '청석골'이었다.

그러던 중 1945년 해방이 되고 이듬해인 1946년 일본식 동 명칭을 변경, 1957년 전주시 조례 제108호를 시행하며 풍남동 행정구역이 도로망에 따라 재편성 됐다. 그리고 1973년에는 대통령령에 의해 풍남동은 경원동, 전동, 풍남동을 합쳐 행정동이 됐으며 1996년 경원동, 전동, 풍남동을 묶어 풍남동의 행정동에 이르렀다.

교동은 독자적 행정동으로 유지됐다. 이후 2005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풍남동과 교동이 합쳐지며 풍남동으로 개편돼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 임부득(오른쪽)이 1970년대 남편 김철주와 함께한 모습.



“우리들의 피가 끓고 힘이 넘쳐흐른다. 노예적 교육제도는 철폐하고 결사, 연구의 자유를 얻어 조선민족 본위의 교육제도를 실현해야 한다. 일본제국에 끝까지 항쟁하자.”

1929년 7월 전주 청수정(현 완산구 교동).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전주여고보) 4학년 임부득(1911∼1987)은 집에서 이 같은 내용이 실린 선전물 ‘뉴쓰’를 만들어 등사했다. 인파가 몰리는 전주극장 앞에서 뿌리기 위해서였다. ‘뉴쓰’는 ‘3·1운동의 유래와 금후의 태도’ 토론문을 실어 당시로부터 10년 전 벌어졌던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하지만 배포 전 계획이 발각돼 임부득과 전주여고보생들은 일제 경찰에 검거됐다.

최근들어 여성 독립운동가 임부득이 학계에 의해 조명되고 있다.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임부득을 필두로 전주여고보 여학생 19명이 결성한 비밀결사 ‘적광회’는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며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고자 했다.

‘뉴쓰’는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민족에게 박해를 가하고 있다. 실로 조선 농민을 위해 싸울 용감한 투사는 투옥되거나 혹은 학살되었다. …경찰 당국과 협력하여 불온사상 단속의 명목으로 백주에 학생의 검속, 고문, 투옥을 감행한다”(1930년 3월 5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고 고발했다.

이들의 활동은 당시 동아일보에 “같은 학교 3, 4학년생을 중심으로 사상 선전을 하는 동시에 모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뉴쓰’라는 선전문 창간호를 전주 청수정 임부득 여사의 집에서 등사해 준비했다”(1929년 8월 3일자 ‘여학생 중심의 비사, 격문 선포 중 발각’)고 보도되기도했다.

임부득은 이 사건으로 붙잡힌 학생 중 유일하게 치안유지법, 출판법 등 위반으로 기소돼 1년간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31년 만기 출소했지만 1934년 전북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붙잡혀 또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전주형무소 행장(교도소 기록)에 따르면 임부득은 교도소 측과의 면담에서 “우리 여성이 경제적으로 해방된다면 정치적 해방도 얻을 수 있다”면서 “여성은 빨리 인형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장 교수는 “18세 소녀가 식민지의 모순을 깨닫고 스스로 공부하며 조직을 만들어 주변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과정이 관련 사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당대 여성이 지역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사례는 흔치 않다”고 했다. 지난해 신진연구자 지원 사업을 통해 임부득 연구를 지원한 독립기념관의 한시준 관장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부득의 오빠 임휘영(1908∼1972)과 남편 김철주(1908∼1977)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임휘영은 1926년 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동맹휴학에 참여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 임휘영과 함께 동맹휴학에 참여한 뒤 자퇴한 김철주는 3년 뒤 임부득과 혼인했고, 부인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 살았다. 김철주는 1945년 작성된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의 전주경찰서 요시찰 대상에도 포함돼 있다.

임부득 부부는 광복 후 조용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손자 김모 씨는 2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조부모님께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주변에도 알리지 않고 사셨다”고 말했다.

 임부득의 비밀결사 사건을 ‘여학생 중심의 비사, 격문 선포 중 발각’이란 제목의 기사로 보도한 1929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250여년 된 전주 학인당의 땅샘

한옥마을 남쪽에 자리한 학인당(전북 민속문화재 제8호)은 유일한 한옥 문화재로, 2개의 우물이 지금도 남아있다.

종가로 전해 내려오는 유구한 역사와 넓은 마당, 연못이 있는 정원, 독특한 땅샘은 학인당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다. 하나는 땅샘으로 250여 년이 넘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우물은 1908년 건립 당시엔 만들어졌다고 안주인 서화순여사가 말했다.

땅샘은 정원의 돌계단 16칸을 내려가게 만들었으며, 한여름에도 일정한 온도가 유지돼 열무김치이며, 수박 등을 보관하는 냉장고다. 계단의 길이는 420cm며, 입구에 대리석이 깔아져 있다. 작은 연못에서 금붕어가 이곳을 다녀간 김구 주석처럼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학인당 안채가 앉혀지기 전에 원래 그 자리에 초가집이 있었다고 한다.

땅샘은 바로 그 초가집 앞에 있던 우물이었다. 그 우물을 메우려고 했으나 집안의 우물을 메우면 자손이 끊긴다고 하여 샘을 살려 놓았다. 이곳은 청수정(옛 지명)이 있었을 만큼 물이 맑은데다가 마당의 땅샘을 살리기 위해 정원을 만들었다. 용혈이 있는 명당으로 용소가 바로 땅샘이며, 용의 꼬리와 용의 머리가 집안 곳곳마다 자리하고 있다.

우물 속에 파아란 바람이 분다. 학인당 정원 한가운데 근사한 박우물 하나. 샘을 둘러싸고 높직이 쌓아올린 아름드리 돌에는 푸릇한 이끼가 곱게 덮였다. 황금빛 도는 갈색 돌계단을 밟아 내려가면 홀연 계곡에 들어선 듯한 서늘함과 아늑함 속에 옹달샘이 들앉아 있다. 땅 밑으로 내려가 있다고 해서 땅샘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의 모습이 보인다.

향내 나는, 결따라 세월의 때가 곱게 눅은 책상머리에 앉아 돌이켜보면 참으로 잊어야 할 일들이 많다. 모두 잊어버린다면, 아니 잊을 수만 있다면 참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당신이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 한가지만은 결코 잊지 않는 건망증이라면 참으로 ‘행복한 병’이다.

성신여중고 앞에서 한때 유명세를 탔던 문화연필을 생각하며 떠올린 단상이다.

전주 사람들은 풍남문 옆에선 겨울철이면 떨어진 솔잎을 순수레에 놓고 팔기도 했었고. 남부시장에서 희금자죽 심부름도 했었고, 매곡교 옆 남부시장 건너편 송약방(대표 송창진)에 심부름을 다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교동에 있던 ‘문화연필’ 공장에 큰불이 났었는데, 그 자리에 그 공장이 여전히 있는지를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주의 문화연필은 오랜 세월동안 교동의 풍경으로 자리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제재소에서 나오는 톱밥을 땔깜으로 주민들에게 내 놓았고, 상품화되지 않은 불량품을 동네 어린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훈훈한 가슴을 가진 공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전주문화원이 펴낸 ''전주사람 송영상의 전라도 풍물기'는 문화연필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몽당연필이 절약의 대명사로 불리운 때가 있었다. 초등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들의 필기구도 연필이었다. 볼펜은 부잣집 학생들이나 애지중지한 고급 필기구였고 펜 사용도 흔치 않았다. 붓곽에 펜을 꽂아 쓰는 펜글씨는 여학생에게 보내는 소위 러브레터에 사용됐다’

문화연필 공장은 이석동씨가 1949년 5월 31일 완산구 교동 성심여중고 정문 앞 골목 근처에 세웠다.

예전엔 성심여중고 정문이 지금 현재 있는 그 베테랑 분식점이 아니고 그 뒤에 전동성당하고 그 사이에 자리한 골목으로 당시엔 청수정(냇물을 끼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길에서 교동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고 한다. 문화연필이 당초 있던 자리, 그 앞에서 쭉 들어가면 원불교 교당이 자리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수업시간에 선생님 등뒤로 넘어다니던 쪽지를 핸드폰 문자가 대신하고 키보드에 맨손가락으로 마음 속 사연을 ‘때리는’ 시대가 아닌가요 한때 문화연필 CM송을 레토드판으로 만들어 거의 전국의 초등학교에 보급해 행진곡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 당시에 어린이들의 놀이였던 고무줄놀이 때 이 노래를 불렀으며, 55대 후반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 옛 추억에 잠길 사람들이 많으리라.

문화연필 CM송

외국산만 좋다 말자 마음마저 빼앗길라
날로달로 좋아지는 우리 국산 문화연필
너도 나도 애용하자 깎기 좋고 쓰기 좋은
문화연필 한 자루가 나라 일꾼 길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