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십경(古縣十景)
유학자 후암(後菴) 김창석(金昌碩 878~1946)의 '후암문집(後菴文集)'에 '고현십경(古縣十景)'이 나온다.
'고현(古縣)'은 정읍 태인 고현내(현 칠보)를 말한다.
태산(泰山)에 읍을 설치해 세 왕조가 그대로 따라 했는데
전해 오는 지난 일은 백에 하나뿐이네
연혁이 금일의 형세가 되기에 이르렀으니
교류한 바를 금수의 자취에서 차마 보네
-위는 '대주고허(大舟古墟)'로 '대주의 옛 흔적이다'. 대주는 들판 이름으로 태산군이 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태산(泰山) 북쪽에서 약간 동쪽에 있다.
골짝 안개와 마을 연기가 이어진 땅
아득히 먼 옛날 순 임금과 이윤이 농사지은 곳이네
경지 깊어 드러나지 않는 다소의 밭에는
서늘하지 않은 곳에 채소 심는 것이 보이네.
-위는 '소룡유장(小龍幽莊)'으로, '소룡의 그윽한 별장이다'. 소룡은 들판 이름으로, 태산 서쪽에 있다.
새벽빛이 푸른 산 높은 곳으로부터 와
나는 깊은 창을 비추며 푸른 머리를 이때 시작하니
한마음으로 경건함을 견지해 가득 찬 옥 받들 듯하네
-위는 '묵방승욱(墨房升旭)'으로, '묵방산에 떠오르는 해'이다. 묵방은 산 이름으로, 태인 산내면과 임실의 경계에 자리한다. 태인으로 들어가는 첫 산이다.
햇빛이 서서히 산마루에 오르니
촌음을 아끼라 함은 우임금의 가르침이네
제나라 경공은 어찌하여 이를 걱정하지 않고
한갓 지리하게 탄식만 하다가 후세에 비웃음을 받았는고
-위는 '시산반조(詩山返照)'으로, '시산에서 빛추는 경치이다'. 시산은 태산(泰山)이다.
처음에는 생기기는 쉽지 않으나 생겨나면 커지기 쉬워져
더욱 더 남은 힘으로 멀리까지 서로 나뉘네
바라고 또 바라면 비가 내리라는 것을 누구나 아니
농가에서 결정할 일 있으면 반드시 천문을 점쳐보네
-위는 '진령징운(辰嶺徵雲)'으로, '진령의 징조 구름이다'. 진령은 태산 남쪽에 있다.
가뭄에 한줄기 비 쏟어지면 서로 기뻐하는 것을 보는데
더구나 서쪽 논밭에 심을 때가 닥쳤음에랴
이제부터 매양 세찬 비 내려주기를 고대하며
언덕 위에서 도롱이와 삿갓 쓰고 바람 앞에서 춤을 추네
-위는 '자현초우(牸峴初雨)'로, '자현에 내린 첫 비이다'. 자현은 태산 서쪽에 있다.
번득이는 빛줄기는 칼 같은 위엄을 떨치지만
농가에 때맞춰 비 내려 활짝 웃게도 하네
노여움 속에서 온화함이 발산하는 것도 이와 같을지니
이찌하여 '갈(葛)나라로부터의 정벌'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위는 '노탄치전(蘆灘峙電)'으로, '노탄 고개의 번개이다'. 노탄은 태산 북쪽 동촌면(東村面)에 있다.
'갈(葛)나라로부터의 정벌'은 악을 제거하여 본보기를 보여줌을 의미한다.
'맹자'의 '양혜왕하'에 '상(商)나라 탕왕이 처음 정벌한 것이, 갈(葛)나라로부터 시작했고, 천하가 그를 믿었다.(‘湯一征, 自葛始, 天下信之)'
아득히 먼 하늘에 둥근 달이 떴는데
시대를 상심하며 긴 밤 크게 탄식하네
그림자 속 옛 강산에 그런대로 위로되니
우임금이 '회양(懷襄)'을 정한 일 어찌하여 오랫동안 없는가.
-위는 '죽림산월(竹林山月)'로, '죽림의 산속에 뜬달이다'. 죽림은 골짜기 이름인데, 태산 서쪽에 있다.
'회양(懷襄)'은 산을 에워싸고 언덕을 집어삼킨다는 '회산양릉(懷山襄陵)'의 준말로, 재앙이 매우 큼을 뜻한다. '서경'의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넘실거리는 홍수가 널리 해를 끼쳐 거세게 산을 에워싸고 언덕을 넘는다.(湯湯洪水方割, 蕩蕩懷山襄陵)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서 몇 리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으나
사는 곳의 즐거움이야 비할 데 없네
부끄럽도다 저 근본을 잊은 인간들
나쁜 부류에 몸을 섞다 보니 창자마저도 더럽구나
-위는 '명천화구(鳴川花口)'로 '명천은 태산 동쪽에서 약간 북쪽에 있다'. 화구는 물고기 이름이다. 그러나 어떤 고기를 말한지 정확하지가 않다.
성 남쪽에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를 씻어내니
단오에 딴 차에 연한 향기 맺혀 있네
나무꾼은 *육씨(陸家)' 집안의 보배임을 몰라보고
여느 숲과 다름이 없다고 여기네
-위는 '성황작설(城隍雀舌)'로 '성황산의 작설차이다'.
성황은 산의 이름이고 태산 서에서 약간 북쪽에 있다. 작설은 차 이름이다.
한자로 참새 '작(雀)' 자에 혀 '설(舌)' 자이다. 참새의 혀만큼 새 순이 올라와 있을 때 따서 만든 차라는 뜻이다.
정읍에는 예부터 자생차가 여러 산야에 산재돼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정읍의 대표적 특산품으로 우리 선조들에게 인기있는 전통기호식품 및 약용으로 활용됐다. 1,000여 년 동안 일본, 인도 등의 차나무 품종과 섞이지 않은 순수 야생의 차나무 혈통이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읍지역은 연평균 기온13.3℃, 강수량 1472mm등 차 재배 기상환경적 기준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차 생산지 중 아열대 북방 한계선인 일교차가 큰 지역에 속하며 자연 친환형 농법으로 재배하고 있다.
차 가공에 있어서도 증기에 찌지 않는 전통수제 덖음법으로 만들어 맛과 향을 그대로 간직한 우리 입맛에 알맞은 차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정읍지역에는 내장산 벽련암(1,000평), 고부면·흑암동 두승산(1만평), 소성 춘수·중광리(3,000평), 영원 운학리 운학산(3,000평), 입암면 입암산(1,000평), 시기동 죽림산(7000평), 북면 남산사(1,000평), 장명동 성황산(500평) 등 야생자생지 10여곳에 30여ha가 자생되고 있다.
정읍 자생차의 역사적 자료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엔 작설차의 산지 및 전국의 36개 군·현지역의 토산품 중에서 차에 관한 기록이 있다. 전라도 28개 군·현 (정읍현, 고부군, 고창현, 흥덕현, 옥구현)에서 차가 생산됐다는 기록이 있다.
고부군의 작설차는 약용으로 정읍현의 차는 지방특산품으로 기록이 돼 있다. '신동국여지승람' 33권에 의하면 고부군에서 토산품으로 차가 생산됐으며, 제34권에는 태인현 토산품으로 차가 기록돼 있다.
고사촬요(攷事撮要)(1613년), 여재촬요(1893, 오횡묵)에 의하면 고부에서 차가 생산됐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 전남도청 산림기사들이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지역에 자생차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국내에서 무등다원(1912년), 다음해인 1913년 일본인 오가와(小川)가 천원다원(川原茶園)을 9단보, 8,930㎡를 조성, 1923년부터 가와바라차(川原茶)를 생산, 전량 오사카에 수출했다.
해방 무렵에는 약 11.9ha가 재배됐었고 일본인 오가와(小川)가 자신의 차밭의 규모나 융성을 홍보하기 위해 정읍군 차밭을 소개하는 사진엽서를 제작했다. 1918년~1932년까지 발행한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다.
*육씨(陸家)'는 육우(陸羽, 733~804년)는 중국 당나라의 문인으로, 차를 만들고 마시는 것에 관한 지식을 정리한 '다경(茶經)'을 저술한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육우를 '은둔의 선비', '차신(茶神)'이라 숭상, 훗날 다성(茶聖)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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