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나를 닮지 않은 자화상ㅡ화가 장호의 마지막 드로잉'

'나를 닮지 않은 자화상ㅡ화가 장호의 마지막 드로잉'


“희망이 내 안에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그린다. 오늘도 그릴 것이다.”
 
2014년 타계한 화가 장호(1962~2014)의 그림 에세이 '나를 닮지 않은 자화상: 화가 장호의 마지막 드로잉(펴낸 곳 창비)이 2020년 출간됐다. 2013년 5월 구강암 판정을 받고 이듬해 6월 세상을 떠나기까지 화가가 일 년여간 투병하며 그리고 쓴 드로잉 116점과 일기 16편을 모아 시간순으로 엮었다.

한 사람이 죽음을 예감하고 수용해 가는 과정, 생의 마지막에 발견한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담겼다. 수술로 얼굴의 일부를 잃어버린 자화상,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 간호하다 잠든 아내의 뒷모습을 그리며 슬픔과 고통을 드러낸 그림도 있으나 그보다 많은 그림이 사랑하는 마음, 잊지 말아야 할 순간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려졌다. 

책에 실린 대부분의 그림이 병상에서 그려졌기에 다색 볼펜과 붓펜 등 단출한 재료로 표현되었지만 화가의 공력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펜을 쥐고 사투하며 마지막까지 그리는 이로 남아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 화가의 간절함, 죽음을 앞두고도 생의 기쁨과 소중함을 찾고자 한 인간의 노력이 선명한 진동으로 독자의 가슴을 두드린다.

제1부 '어서 달개비꽃을 그리고 싶어'에는 화가가 병을 알게 된 직후 도망치듯 지리산으로 떠났다가 투병을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을 담았다. 암 치료의 공포와 진료비 걱정으로 가득하던 화가의 마음이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꼿꼿하고, 제멋대로 자라지만 생명력을 잃지 않는 들풀을 그리며 점차 변해 간다. 마침내 그 마음은 다음 계절에 개화하는 “달개비꽃을 그리고 싶”다는 의지, “건강해져 다시 오면 될 일”이라는 희망으로 바뀐다(34~35면). 

제2부 '나를 닮지 않은 자화상'에는 투병이 시작된 이후의 병실 풍경과 자화상을 모았다. 수술로 얼굴의 일부를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나를 닮지 않은 자화상”으로 명명(108면)하면서도 거듭하여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고 그리기를 통해 투병에의 의지를 다잡는다. 

제3부 '우린 별'에는 화가가 죽음을 예감하고 임종 직전까지 그린 그림들을 모았다. 화가에게는 또 다른 심장과도 같았을 손을 그리며 절망을 이기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보낸 하루하루가 담겼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린 그림은 간혹 거칠고 흔들리고 선이 끊기기도 하지만 화가 김환영이 짚었듯 그 “숨길 같은 선”에서 펜을 쥐고 사투하며 마지막까지 그림 그리는 이로 남아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 화가의 간절함이 전해진다.

서울민족미술인협회 소속으로 노동미술위원회에서 현실참여미술 활동을 했던 화가 장호는 2005년부터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마다 자료 수집, 연구, 현장 답사를 통해 등장인물의 희로애락까지 공유하고자 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한국적 정서를 탁월하게 표현하며 우리 아동 문학의 주인공들을 그렸다. 

여성의 삶에 새롭게 눈뜨고 ‘아기’에서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명혜'(김소연 장편동화)의 명혜,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 한가운데를 통과하는'큰애기 복순이'(김하늘 장편동화)의 복순이, 가난과 부끄러움을 딛고 어른이 되어 가는 '내 푸른 자전거'(황선미 장편동화)의 찬우 등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하게 성장하는 인물들은 그의 그림으로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기억된다.

 또한 그림책 '달은 어디에 떠 있나?'로 2009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기에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리게 되었지만 언젠가부터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 들어간 ‘욕심’을 보게 되었고, “욕심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조차 나누어 보기가 힘들었”던 때에 큰 병을 얻었다. 화가는 아이러니하게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욕심 없이 그리는 그림의 즐거움을 깨닫는다.

'꽃들을 보면서 스케치하며 느낀 점은
욕심이 들어가면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심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조차 나누어 보기가 힘들었는데
여기 와서 그리면서는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 너무 좋은 일이다.(2013년 5월 22일' 일기 중에서)'

“죽더라도 자유롭고 싶”어서(22면) 그린 화가의 그림은 자연스럽다. 병상에서 그려져 다색 볼펜과 붓펜 등 단출한 재료만으로 표현되었지만 욕심을 버리고 아무런 부담도 없이 눈앞에 있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담은 '나를 닮지 않은 자화상: 화가 장호의 마지막 드로잉'의 그림이 감동을 주는 까닭이다.

임종을 두 달 앞둔 2014년 4월 28일, 화가는 자신의 드로잉 노트에 “나의 기쁜 날”이라고 썼다(143면).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나를 닮지 않은 자화상: 화가 장호의 마지막 드로잉' 속 많은 그림은 사랑하는 마음, 잊지 말아야 할 순간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려졌다. 

눈 뜨고 몸 가누기도 힘들었던 투병 기간에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는 슬픔과 고통도 묻어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그림이 “예쁜” “사랑하는”으로 형용하고 싶은 대상들, “기분이 참 좋”고, “보고 싶”어서 그린 대상들을 표현하며 행복의 정서를 전한다. 그런 화가의 시선은 애벌레, 마른 들풀, 고개 숙인 환우, 후미진 곳에 놓인 우산과 그릇, 아이들, 낡은 양말 등을 향한다. 

어쩌면 세간에 보잘것없다 여겨지기 쉬운 것들에 화가는“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142면). 천국으로 가는 길에 필요한 짐을 꾸리듯이, 영원히 보고 싶은 세상의 면면을 그려 나간 화가의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곁에 있는 숱한 생명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건네게 한다.

 ㅡㅡㅡㅡㅡㅡㅡ
어린이 그림책 작가 ‘장호’ 별세

어린이 그림책 작가로 이름을 알린 장호 화백이 전주 산성마을에서 작업을 하던 중 발병한 지병으로 투병하다 2014년 6월 23일 서울 신촌 연세세브란스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52세.
고인은 김제 출신으로, 군산제일고, 홍익대를 졸업했다.
1990년대 군사독재에 맞서 현실참여 활동에 주력했고, 미술학원에서 후배양성에도 힘썼다.

서울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노동미술위원회에 소속돼 노동미술전, 조국의 산하전, 민중미술 15년전 등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전주 산성마을로 내려와서는 전북민미협회원으로 활동했다.
 2005년부터 동화책 원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난 2009년 ‘달은 어디에 떠 있나?’로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됐으며, ‘강아지’로 2010년 한국아동도서전 일러스트레이터 부문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한겨레신문 연재소설 ‘소금’(박범신 작)의 삽화를 맡아 은은한 톤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9년부터 전주시 산성마을에서 동화 원화와 햇살회, 전북민미협 회원으로 활동중 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연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0호, 발인은 25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