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보천교 '팔정헌(八正軒)'

보천교 '팔정헌(八正軒)'

보천교普天敎 시감時鑑>*(八正軒額解)

八方之人粉拏利欲寔禽獸之臟腑也總領於斯遂以道德正之者也

팔정헌은 八方의 사람이 利欲을 분라하니 이 금수의 장부라 총영이 이에 나아가서 道德으로 바로 하리라.
 ㅡㅡ
⁕ 십일전(十一殿)

⋅철학

보천교의 새로운 성전인 십일전은 1925년 첫 삽을 뜬 후 4년 만에 완공되었다. 십일전은 땅과 무극無極을 상징한 십十과 하늘과 태극을 상징한 일一을 적용하여 붙인 이름이다. 교주가 60방주 중에서 중앙격인 토주土主였기 때문에 궁전을 의당 토전土殿이라 하는데, 경찰의 의심을 피해 십일전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즉 十십 자와 一일 자를 합치면 토土 자가 되고, 토전은 곧 이 땅의 주인이 정사政事를 펴 나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역학적으로 보면 십十은 역학에서 보는 음陰의 최종수最終數이고, 일一은 양陽의 시초始初가 되는 수數이므로 십일十一이라는 수는 음양의 시작과 끝을 뜻한다. 십일전十一殿에는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조화사상에 뿌리를 둔 태극수 ‘1’과 무극수 ‘10’을 합한 11의 조화로서 세상을 구원한다는 조화사상이 들어있다.

‣십일전-궁전의 정전 양식으로 차월곡이 죽은 후 일제가 태고사라는 절에 헐값으로 팔았다. 태고사는 종로에 절을 세웠는데. 이 절이 조계사이다.

현재 존재하는 대한민국 최대의 단층 목조 건물인 조계사(서울 종로구 견지동) 대웅전.
조계사 대웅전은 1920년경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서 성행했던 보천교(지도자 차월곡· 일명 차천자)의 주 성전이었던 '십일전(十일전)'이었으며, 불교계측이 이를 사들여 현재의 위치인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이축해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그렇다면 현재 조계사 대웅전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어느정도의 규모였을까.
1920년 당시 차월곡은 보천교의 주 성전인 십일전(十一殿)을 짓는데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사기간만도 5년이 소요됐으며 공사비용은 당시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50만원이 투자됐다.
십일전(十一殿) 건립에는 경북궁 중건 당시의 도편수가 참여했고 목공 7천명,기와공 200명,석공 250명,니장 200명,잡부 6만 5천500명이 투입된 방대한 공사였다.
정면 7칸(30m)에 측면 4칸(17m)의 전각 형태인 십일전(十一殿)은 사방으로 난 계단과 높은 기단 등은 궁궐에 가까운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당시 십일전(十一殿)의 규모에 대해 차봉남(77세.보천교 지도자 차월곡의 3남)씨는 "아버님이 당시 십일전을 짓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아마도 지금 조계사 대웅전은 이축하면서 당시 규모에 비해 축소됐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씨는 또 "당시 입암 대흥리 일대는 군데군데 10여호의 농가가 전부였지만 보천교에 관심을 두고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다"며 "전국에서 유명한 인부들이 십일전을 짓는데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힘겨운 노력의 결실로 지어진 십일전(十一殿)은 1936년 차월곡이 사망한 후 건립당시 50만원의 수십분의 일에 불과한 1만2천원에 불교계에 팔리는 운명을 겪게 됐다.
안후상박사(정읍시사 편찬위원)는 "당시 보천교는 몰락한 조선왕조를 대신해 새로운 왕조 개창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십일전의 건축도 궁궐양식을 도입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로인해 일제로부터 폭압을 당한 것으로 본다"며 "보천교 성전으로 쓰였던 '십일전'의 규모만 봐도 당시 정읍 입암지역에서 번창했던 보천교의 규모를 짐작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교적 요소가 강한 민족·민중종교로 분류된 보천교의 성전이었던 '십일전(十一殿)'.
따라서 문양이나 조각들이 불교양식과는 거리가 있는 선도적인 색채가 담겨 있다.
조계사 대웅전이 과연 보천교의 성전인 '십일전(十一殿)'으로 원래 위치에 돌아올 것인지, 아니면 논란이 일고 있는 해체 보수작업을 통해 한국 불교의 상징으로 자리할 것인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십일전의 구성

십일전은 일반적인 건물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놓여 있다. 남쪽의 입암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등을 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현세가 선천(先天)과 달리 운수(運數)가 뒤집혀 방향도 정반대가 되었다는 뜻을 갖고 있다.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들어선 성전은 들어갈 때부터 나오기까지 1시간 이상이 걸렸다고 하며, 조선 내 목조 건물로는 웅장함과 정교함이 최고였다고 전해진다.

십일전 외에 정화당井華堂⋅팔정헌八正軒⋅삼진헌三進軒⋅태화헌泰和軒⋅수정사修整司⋅기제실旣濟室⋅근성사槿省舍⋅동락재同樂齊⋅공수실供需室 등 총 45동의 건축물이 들어섰다. 

본소 바깥에는 보화문普化門⋅대흥문⋅영생문⋅대화문⋅평성문, 안에는 삼광문⋅승평문⋅함평문⋅중화문 등이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립 건축물’로 불린 십일전과 부속건물 공사에는 비용만 150만 원이 들었다.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91쪽. 대들보는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의 재목을 군산항을 통해 끌어다 사용하였으며, 또한 중국 천자궁天子宮을 본떠 황기와를 사용하여 호화로웠다. 황색은 흙의 정색正色으로 천자의 제위를 상징한다.

⁕십일전과 경복궁

십일전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보다 2배 넓고 웅장하고 호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