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이매창, 전주에 누구를 만나러 몇번 왔나
◆매창, '허균의 형' 허성 전라도관찰사 부임 잔치 참여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은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딸로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이라고 불렸고, 기생이 된 뒤에는 계랑으로 불렸다.
본명은 향금(香今), 자호는 매창(梅窓), 자는 천향(天香)이다. 조선조의 3대 여류시인을 꼽는다면 허난설헌(1563-1589), 황진이, 이매창을 든다.
서경덕(1489-1546),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컬어 ‘송도삼절’이라 하는 데 견주어, 신석정 시인은 촌은 유희경(1545-1636), 이매창, 직소폭포를 ‘부안삼절’이라 칭한 바 있다.
이매창은 현실 비애의 감성적 시인이었다. 그녀는 기생의 딸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으나, 결코 기생의 삶을 살지 않았다. 매창이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한 문사로는 유희경, 허균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 매창의 수백 편 작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으나, 후에 아전들이 외우던 50여 편의 시를 개암사에서 간행하였으니, 다행이다.
매창의 나이 어느덧 스물아홉 살이 됐다. 1601년 7월 23일 시대의 이단아 허균(許筠, 1569∼1618)이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어 전라도에 내려왔다.
허균은 부안에 은거하고 있던 학자 고홍달(高弘達)의 소개로 매창을 만났다.
허균이 보기에 매창은 박색이었지만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시인들이었기에 곧 의기투합하여 밤이 새도록 시를 주고 받았다. 이후 허균과 매창은 오랜 세월 인생과 시문을 논하는 돈독한 글벗이 되었다.
9월 7일에는 허균의 장형(長兄) 허성(許筬)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전주의 전라감영으로 내려왔다.
허성의 관찰사 부임 축하연이 전라감영에서 열렸다. 허균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매창도 축하연에 참석하여 노래와 거문고 연주를 선보였다.
남매북황, 북황남매(북쪽에는 황진이, 남쪽에는 매창)로 일컬어지던 매창이었기에 전라도 최고 권력자의 부임 축하연에는 단연 참석 일순위였던 것이다.
1601년 6월에 허균이 호남 지방의 전운 판관(轉運 判官:삼창의 양곡을 서울로 운반하는 직책)으로 임명됐다. 허균 일행이 보령과 남포를 지나 전라도 만경에 이르렀고, 부안에 도착한 것은 7월 23일이었다.
이때 부안의 기생인 계생(이매창)을 만났다. 그때의 상황이 '성소부부고'의 ‘조관기행(漕官紀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23일(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위의 글을 보면 허균이 만난 이매창은 얼굴보다 문학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여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허균과 이매창의 인연이 시작됐다.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청아한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세상을 떠나네
부용꽃 휘장에 등불은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에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妙句堪擒錦 淸歌解駐雲(묘구감금금 청가해주운)
偸桃來下界 竊藥去人群(투도래하계 절약거인군)
燈暗芙蓉帳 香殘翡翠裙(등암부용장 향잔비취군)
明年小桃發 誰過薜濤墳(명년소도발 수과벽도분)
1610년 허균은 부안의 기생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창 계생을 애도하며 쓴 시이다.
1602년 1월 허성의 후임으로 한준겸(韓浚謙)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했다. 허균은 12세나 연상인 한준겸과도 친하게 지냈다. 3월에는 윤선(尹銑)이 부안현감으로 내려왔다. 한준겸은 전라도 각지를 순시하다가 부안에 들렀다. 부안현감 윤선이 한준겸을 위해 베푼 연회에 매창도 참석했다.
한준겸은 허균으로부터 조선 최고의 시기(詩妓) 매창에 대해 이미 들은 바 있었다. 한준겸은 매창의 절창과 거문고 연주에 매료됐다.
◆사랑에 빠진 매창과 시인 유희경
1591년 따뜻한 봄날, 유희경은 부안에서 처음 매창의 얼굴을 보게 된다. 당시 유희경의 나이는 47세이고, 매창은 19세였다. 유희경은 소문으로만 듣던 매창도 만나볼 겸 봄날을 맞아 부안으로 여행을 갔다. 당시 매창은 시를 잘 짓고 거문고도 잘 타는 기생으로 서울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여항시인으로 유명했던 유희경의 명성도 높아 시를 좋아하고 본인도 시를 섰던 매창 역시 유희경을 알고 있었다. 매창은 유희경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중에서 어느 분이십니까"하고 물었다. 유희경과 더불어 백대붕도 시를 잘 지어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희경은 자신이 촌은 유희경이라고 소개하고 매창에게 "만나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술잔을 들며 시와 거문고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서로 첫 눈에 반한 두 사람은 이날 거문고와 시로 화답하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정을 나누었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꿈같은 나날을 보내게 되나 길게 가지는 못한다. 이듬해 봄 임진왜란이 일어나 유희경이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한양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별을 하는 날 매창은 이별하기 싫어서 다음 시 '자한(自恨)'을 짓는다. 그 중 일부다.
'동풍 불며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버들잎과 매화가 다투어 피었구나/ 이 좋은 봄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술잔 앞에 놓고 임과 헤어지는 일이네// 마음속에 품은 정을 말하지 못하니/ 그저 꿈인 듯하고 바보가 된 듯하네/ 거문고로 강남곡을 타 보지만/ 이 심사를 묻는 사람이 없네'.
7년간의 전란이 끝나고 유희경은 당당한 양반가로 임서, 김상헌, 신흠, 이원익, 김수광 같은 당대의 유명인사와 시문을 나누며 가정도 꾸려 잘 지낸다는 소문이 들렸다.
매창은 그리움에 사무친 상사병을 시로 달래며 임이 찾아 주기만을 고대했다.
두 사람이 헤어진 지 16년이 흘렀다. 1607년에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당상관이 된 유희경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잠깐 내려왔던 모양이다.
노인이 된 유희경은 매창을 만나 열흘간 지내며 회포를 푼다.
이때 유희경은 매창에게 이런 시를 지어준다. 매창을 사랑하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는 '중봉계랑(重逢癸娘)'이란 시다.
'옛날부터 임 찾는 것은 때가 있다 했는데/ 그대 시인께선 무슨 일로 이리도 늦으셨던가/ 내 온 것은 임 찾으려는 뜻만이 아니/ 시를 논하자는 열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이요'. 유희경은 이 시 끝에 "내가 전주에 갔을 때 매창이 나에게 '열흘만 묵으면서 시를 논했으면 좋겠다'고 했기에 이렇게 쓴 것"
이란 설명을 달아놓았다.
유희경은 62세의 회갑을 넘긴 나이요, 매창은 34세의 한물간 퇴기로 노년을 맞아 못다 한 사랑을 짧은 10일간에 몽땅 쏟아 붓고 만다. 어쩌면 그것이 이들에게는 마지막 나누는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창은 38세로 어느 봄날 하얀 배꽃이 지듯 임을 향한 일편단심을 안은 채 쓸쓸하게도 한 많은 세상을 떠나니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란 시 한 수가 부안의 봉두뫼 매창공원에 허균이 지은 추도시비 앞에는 흰눈 만이 딩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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