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용엽
향토사학자 이용엽 위원의 도움으로 웅치전투와 관련한 구전자
료 11곳을 확인하고 이를 도식화함에 따라 구체적 문화재 구역을 설정하는 등 제1차 문화재청 보류의견을 보완해 ‘사적'으로 지정됐다.
웅치전투에서 1,000여명이 순절하여 ‘천인의총’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동안 사적 지정에 대한 논란만 있었다.
오늘에야 비로로 사적으로 지정이 되었으니 그동안 뭉치 고개에 잠들어 있는 정담 장군 이하 군졸들과 진안의 김수, 김정 휘하 의병들의 영혼들도 이제야 떳떳한 순절자로 국가에서 인정한 바. 이제라도 서둘러 ‘사적비’를 세워 죽은 영혼들을 위로해 주고 ‘천인의총’과 기타 사적을 재조명하여 보존해야 한다.
웅치전투에 참여, 생존한 김제 군민 조사립, 조성립 등이 정담 장군의 시체를 거두에 군내의 빈집에 가장(假葬)을 하고 무리 지어 모여서 영전에 곡을 했으며 각각 쌀과 베를 내어서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올린 정성이 골육친(骨肉親)을 슬퍼하는 것보다 더 슬퍼했다 하니 머리가 숙여진다”면서 “이제 진안에서는 국가사적에 걸맞은 계획을 세워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는 이응노도 연구했다.
이응노 화백과는 그가 전주에서 10여년 이상 긴 세월을 거주하는 동안 개척사(현 중앙동 4가24번지)를 경영하면서 효산 문하에서 사군자를 배웠고 특히 대나무를 익혔다고 들었다. 일각에서는 고암의 ‘죽사(竹史)’라는 호가 해강에게서 받았다고 하는데 전주 지역에서는 효산에게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암과 같은 시대를 살던 지역의 어르신들은 고암과 박인경 여사의 혼인도 전주지역에서 중매를 서서 성사됐다고 하시는데 사실 파악은 안된다. 확실한 것은 고암이 20~30대를 전주지역에서 보내면서 효산을 비롯한 묵로 이용우 화백 등 당시 전주지역의 지식인들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전북도립미술관에서 효산 이광열전을 열면서 그에게 대나무 그림을 배웠던 고암에 대해서도 작게나마 재조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암과 동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전주에서의 기록이 많지가 않아 행적을 밝혀내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향후 세계적 화가로 발돋움한 고암이 효산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또 전주에서 10여년 가까이 거주한 만큼 그의 연구에 있어 전주시절의 행적이 보다 소상히 밝혀졌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홍성, 대전, 전주 등의 교류·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진안 화동학교는 1908년 주천면 주양리에 설립된 근대 교육 기관이다고 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여러 인사들이 진안 지역으로 모였다. 김우식(金宇植)·김영철(金永哲)·박문혁(朴文赫)·육상필(陸相弼) 등은 양봉래(梁鳳萊)의 사랑방에서 이 지역의 유학자인 김태현·이병항(李秉恒) 등과 만나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신학문을 배우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하고 민족교육을 목표로 하는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혼란한 정국에 가짜 의병들이 출몰, 마을에 들어와 약탈과 행패를 부리자 1909년 무렵, 김우식 등이 모두 떠나고 학교 재정도 고갈되어 결국 문을 닫게 됐다.
김우식은 금산군수 재임시절(1906~1907)엔 금산보통학교(현 금산중앙초등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을 했다. 하지만 그후 고창군수로 채 6개월이 안돼 한일합협이 되자 스스로 물러나 진안 용담에 돌아왔다.
1910년 고창군수에서 물러나 용담에서 자비로 ‘목민심서정문’을 펴냈다. 그는 이곳에서 ‘헌정연구회의사’, ‘학생필독’, ‘유자필지’ 등을 펴내 개화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국민수지’는 국운이 어려운 시대에 국민을 계도하는 책이었지만 훗날 금서로 지정,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
그는 진안군 정천면 출생으로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및 각종 공모전 20여 회 입,특선, 한국서도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장, 운영위원장, 전북서도대전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전북도립미술관 운영위원, 전라금석문연구회 고문, 전북역사문화학회 부회장, 미술협회 초대 진안지부장, 한국서도협회 이사, 부회장 및 전북지회장을 역임했다.
진안역사박물관 운영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전주문화원 동국진체연구소장, 진안향토문화예술연구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2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에서 '은둔 문화의 꽃' 와룡암으로 대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재1회 전주 관련 기록물 수집 공모전 대상,
진안군민의 장(문화장),
한국서도협회 초대작가상, 진안예술인상 등을 받았다.
'우리 인삼의 발자취'를 펴냈다.
농산물검사소에서 인삼 검사업무를 맡았던 공무원이 정년퇴임후에 펴냈다.
34년간 농산물검사소에서 근무하다 1998년 6월말 국립농산물검사소 임실출장소장으로 퇴직했다.
1996년 인삼산업법 개정으로 인삼 업무가 농림부로 이관돼 갑자기 인삼 검사를 맡게되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인삼의 역사와 재배방법, 인삼에 얽힌 비화, 인삼검사법 등 인삼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수록돼 있다.
그는 “우리 인삼은 세계적으로 효능이 뛰어난데도 이에 대한 홍보가 미흡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전북미술대전 30년사’ , '전북미술약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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