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소나무의 역사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는 이렇게 적고 있
다.
'변산에는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다. 변산의 바깥은 소금 굽고 고기 잡는데 알맞고 산중에는 기름진 밭이 많아 농사를 짓기에 알맞다. 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을 하며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사지 않아도 될만큼 넉넉하다'
변산은 소나무가 많은 산인데 바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무성한 소나무에 가려져 거칠게 보이지 않으며 변산의 소나무가 예로부터 질이 좋기로 소문나서 궁궐을 지을 때 이곳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사용했다.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도모할 때 이곳의 소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다. 조선시대 행궁이 부안에 있었다.
역사 속에 드러난 변산 소나무 이야기를 담아본다.
△삭녕최씨 부인, "솔씨 세 말 주세요"
삭녕(朔寧)최씨 부인은 남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최항의 6대손인 최상중(1551~1604)이다. 왜란 당시 권율장군 막하에서 군량미 책임자인 운량장(運量將)을 지냈던 최상중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이들 6남매는 모두 문재가 뛰어났다.
조선 시대 미증유의 환란이었던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7년 전쟁 왜란이 지난 뒤다. 전쟁 중에 남원성이 함락되고 온 시가지가 불타버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터였지만, 최상중의 집에도 다시 봄이 찾아왔다.
어느 날이다. 최상중은 딸 셋을 불러 글을 짓게 했다. 그중 둘째딸의 글이 제일 맘에 들었다.
"그래, 상으로 무얼 받고 싶으냐?"
"아버님이 아끼시는 벼루를 갖고 싶습니다"
둘째 딸은 중국에서 수입한 최상품의 벼루를 갖겠다고 했다. 두 번째로 큰 딸에게 물었다.
"너는 무얼 갖고 싶으냐?"
"저는 엽전 1말을 받고 싶습니다."
큰딸은 돈을 달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막내딸에게 물었다.
"너는 무얼 받으려느냐?"
"저는 변산 솔씨 서말을 받고 싶습니다"
막내딸은 서슴없이 변산 솔씨 서말을 달라고 했다.
당시 변산의 소나무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황장목이었다. 황장목은 전선을 만들거나 궁궐을 짓는 귀한 소나무였다.
이날 상으로 벼루를 받은 둘째 딸은 대사헌을 지낸 노진(1518~1578)의 손자며느리로 이후 가문이 더욱 번성했다. 이때 상으로 받은 벼루는 가보가 되어 노진을 모신 남원의 창주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엽전 1말을 원한 큰 딸은 임실군 삼계면의 경주 김씨 집안 며느리로, 이 큰 딸의 후손들 중에는 큰 부자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변산 솔씨 서말을 원했던 셋째 딸은 익산의 진천 송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부군은 단성 현감을 지낸 송흥시(1586~1649)이다.
이 송흥시의 아버지는 표주박 늙은이라는 호를 가진 표옹(瓢翁) 송영구(1556~1620)이다.
△변산해수욕장은 하얀 모래와 푸른 소나무 숲 덕분에 '백사청송 해수욕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모래가 곱다.
△이규보와 구진조선소
이규보(李奎報 1168~1231)는 최충헌과 최우의 무신 정치 시대에 문신으로 평장사를 지냈으며 변산에는 벌목사(伐木使)로 부임하여 근무하면서 인연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이 시절에 부령 현령 이군 및 다른 손님 6, 7인과 원효방과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을 다녀왔다. 그 후 위위시판사가 되었으나 1230년 팔관회 정란(政亂)에 휘말려 다시 부안 위도 상왕등도에 유배되는 사연으로 변산과 다시 인연을 맺는다.
이규보는 변산을 '나라의 재목(材木)창고'라 했다. 1199년 전주에 내려 와 벼슬을 했던 그는 벌목사(伐木使)로 3-4차례 변산반도를 찾았다.
그때 본 변산은 "층층 산봉우리와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줄기로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감탄했다. 그의 말대로 이곳 나무는 고려때 궁궐을 짓는 재목으로 사용되었다. 몽고의 일본 침략 때는 배 300척을 건조할 정도로 울창했다. 변산에 구진조선소가 있었다.
△부안현감 권신을 변산 소나무 벌채한 죄목으로 체포
1691년 8월 24일 부안현 격포진을 첨사진으로 승격하고 변산금송절목(邊山禁松節目)을 마련, 내려보냈다. 부안-격포-검모포진에 경계를 배정하고 금송(禁松)하도록 조치했다. 격포, 검모포진에서 관장하던 소나무는 △격포진, 대·중·소 소나무 4,628그루, △검모포진, 대·중·소의 소나무 3,230그루이다.
1725년 6월 22일(비변사등록) 부안현감 권신(權賮)을 변산 소나무를 함부로 벌채한 죄목으로 체포해갔다.
부안현감 권신이 객사 보수를 위해 순영(巡營) 승인을 받아 격포진, 검모포진이 관장하는 지역에서 362그루를 베었다. 객사 보수를 위해 많은 나무를 베어냈으며, 객사 보수용 외 남은 목재는 판매하고 대금을 횡령했음을 적간에서 밝혀진 것이다.
또, 1722년 권신은 격포진에서 관장하는 전죽전(箭竹田) 대밭을 가꾸겠다고 순영(巡營) 승인을 받은 후 소나무와 대나무를 염소(鹽所)에 팔아 대금을 횡령한 것도 적발됐다. (국역비변사등록)
△허균이 조운선을 만드는 일로 부안현감 임정 만니
허균은 1601년 조운판관(漕運判官, 조운선의 정비, 세곡의 운반과 납부 등을 관장하는 종5품 관직)이 되어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 부안에서 처음 매창을 만난다. 고을 수령은 조운판관이 오니 기생을 수청들게 했다. 이때 수청든 기생이 매창이다.
9월 1일(기축) 변산에서 조선(漕船) 6척을 제조하여 보고서를 올렸다. 남쪽으로 돌아가 형수님을 기다렸다.
9월 24일(임자) 부안에 가서 선장(船匠.배 만드는 장인) 67명을 점검하고 일에 종사하게 하였다. 본읍에 격문을 보내 예목군(曳木軍.나무를 운반하는 인부) 300명을 징발하니 이 고을 현감 임정(林頲)이 와서 이에 따르는 여러가지 폐를 이야기하며 매우 어려워하였으나 그의 말에 따를 수 없었다.
허균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작업을 해 10월 22일에 배를 다 만들었다. 임정은 두어 달 뒤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허균은 서류출신인 심우영, 박응서 등과 교유했다는 이유로 1608년 8월에 다시 공주목사직에서 파직 당하는데, 당시 부안 현령으로 있던 심광세는 낙심하고 있던 그에게 부안의 주을래리(줄포) 부근에 전답을 마련해 주었고, 허균은 부안의 보안 우반동 정사암에 와 쉬었다. 허균은 그때를 산문집「성소부부고」卷6 文部三 記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에 남겼다.
'부안현(扶安현) 해안에 변산(邊山)이 있고, 변산 남쪽에 계곡이 있는데 우반(愚반)이라 한다. 그 고을 출신 부사(府思) 김공청(金公淸)이 그 빼어난 곳을 택하여 암자를 짓고 정사(靜思)라 이름 지어 노년에 즐겨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나는 일찍이 사명을 받들어 호남을 왕래하였는데, 그 경치에 대해 소문은 많이 들었으되 미처 보진 못했었다.
나는 본시 영예나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매양 상자평(尙子平)의 뜻을 지녔으나 그 소원은 아직 이루지 못했었다. 금년에 공주에서 파직 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서 장차 소위 우반이라는 곳에 집을 짓고 살 결심을 하였다. 김공의 아들 진사(進士) 등(登)이란 이가 '우리 선군(先君)의 폐려(弊廬)가 있으나 저는 지킬 수가 없으니 공이 수리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고달부(高達夫) 및 두 李씨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보았다.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서니 시내가 있어 그 물 소리가 옥 부딪는 듯하여 졸졸 수풀 속으로 흘러나왔다.
시내를 따라 몇리 안 가서 산이 열리고 육지가 트였는데, 좌우 가파른 봉우리는 마치 봉황과 새가 나는 듯 높이를 헤아리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듯 서있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이 셋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 돌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허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대해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가 그 가운데 있으니,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란 데에 이르니 암자는 방이 겨우 네 칸이며 바위 언덕에다 지어 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우리가 높이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절벽에 쏟아져 흰 무지개처럼 성대했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산발(散髮)하고 옷을 풀어 해친 채 못 가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활짝 피고 단풍은 반쯤 붉었는데 석양이 산봉우리에 비치고 하늘 그림자는 물에 거꾸로 비친다. 굽어보고 쳐다보며 시를 읊조리니 금새 티끌 세상을 벗어난 느낌이어서 마치 안기생(安期生)과 선문자(선門子)와 함께 삼도(三島)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고을 원인 심덕현(沈德顯)이 암자가 피폐하되 보호하는 이가 없음을 보고 승려 세 사람을 모집하여 쌀과 소금 약간 섬을 더해주고 목재를 베어 수리하게 한 뒤 관역(官役)을 바꾸어 거기에 머물러 지킬 것을 책임지웠다. 암자는 이로 말미암아 복구됐다'
그 후로 허균은 1610년 10월에는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지만 곧 취소되고, 11월 전시 대독관이 되었으나 조카들을 급제시켰다는 혐의로 그해 12월에 전라도 함열로 유배된다. 이때(1611년 4월 23일)에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11월에 귀양이 풀리자 부안으로 다시 내려왔다. 이 시기에 우반동 정사암에 칩거하며 홍길동전을 집필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함열현 객사 대청(客舍大廳) 중건에 변산 소나무 사용
'함열(咸悅)의 고을됨이 외떨어져 호남의 바닷가에 있다. 땅은 사방이 모두 20리가 채 못되고, 백성은 가난하여 저축이 없으며, 또한 큰 산이 없어 편남(楩枏)과 예장(豫章) 같은 좋은 재목이 없다. 그러므로 관사가 낮고 비좁으며 민가는 대개 띠로써 지었다. 또한 정유년(1597, 선조30) 난리를 겪으면서, 왜적이 몹시 잔인하여 노비는 죽거나 도망친 자가 반이 넘고, 논밭은 황폐한 채 버려진 것이 십중 칠팔이다. 이 고을에 부임한 자들은 모두 무사 안일하여 스스로 제 몸 구완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어서, 관사와 창고가 모두 중건된 바 없었다. 이것이 비록 수고스럽고 귀찮은 일이지만, 그러나 수령된 자로서 그 죄를 또한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근년에 홍후 우(洪侯遇)가 겨우 관사의 동쪽 곁채를 짓고 사신을 맞아 머물게 하였으나,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목패(木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궐례(闕禮)를 행하는 곳을 짓기에는 미처 겨를을 얻지 못했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한후(韓侯)가 현감(縣監)으로 와서, 조심히 법을 받들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검약으로써 몸가짐을 하고 은혜로써 백성을 기르니, 백성들이 이미 화락하여 도망하고 이사갔던 자들이 모두 모였으며, 물이 괴고 잡초가 무성했던 토지가 모두 개간되었으니, 가위 다스려졌다 할 만하다. 씀씀이를 절약하여 부유해지매, 관력(官力)이 갖추어져 황폐해서 버려진 땅을 들어다 관사를 창건하여 옛 모습을 복구하고 대청(大廳)을 만들고 싶어했다. 마침내 예를 행하는 곳이 법으로 보아 응당 먼저 지어져야 하므로, 공문을 수령들에게 보내어 배로 변산(邊山)에서 나무를 베어 오게 했으며 봉상(捧上)의 나머지를 털어 일꾼들을 먹이니, 몇 개월 안 되어 목수들이 끝났음을 아뢰었는데, 훤하니 옛 모습보다 나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관에서 큰 역사(役事)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온 경내의 노소(老少) 군민 남녀들이 모두 그 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우리 원님 인자하고 재주있네. 어디에서 이런 분을 얻겠는가?”
나는 죄로써 이곳에 유배를 왔는데, 후(侯)의 보호를 받아 그의 정사(政事)를 익히 알므로, 그 고을의 노인들에게,
“대체로 요즘 수령이 되는 자 중에서 가장 낫다는 자도 겉치레만 일삼으며 고분고분 어리석은 백성에게 아첨이나 하며, 감사나 병사의 격문을 극력 막는 데 힘쓰면서 관의 사무가 제멋대로 타락되고 지체됨을 돌보지 않으며, 경솔히 이전의 법규를 바꾸어 좋은 평판을 취하기가 일쑤이며, 조금만 견디지 못하게 되면 문득 버리고 떠나니 그들은 다스렸다는 이름은 얻겠지만 고을은 이로 말미암아 버려지는 것이오. 그 다음은 수완을 닦는 데 힘써 제 능력을 자랑하고, 방탕하고 사치하기를 급히 하여 폐단이 불어남을 돌보지 않으며 다만 남의 이목만을 즐겁게 할 뿐이고, 피로하고 쇠약한 이로 하여금 역역(力役)으로 곤욕을 치르게 하여 근심하고 탄식하게 만들지요. 최하자(最下者)는 그 직분을 수행하지도 않고 그 백성을 위로하지도 않으면서 한갓 백성의 살갗과 골수를 벗겨먹을 뿐이니, 이는 노약자로 하여금 날로 흩어지게 하고 제 주머니는 날로 풍부해지며, 이익이 제 몸을 살찌게 하는 것을 일삼는 자에게 돌아가게 하니, 대개는 다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 원님은 그대 백성들을 인애(仁愛)하고 그대 고을의 황폐한 것을 일으켜서 그대들로 하여금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을에서 배를 두드리게 하며 순식간에 크고 넓은 집을 으리으리하게 지었으되, 그대들은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자며 나무 하나 끌어오지 않고 ‘야호, 야호.’ 소리도 듣지 못하였으며, 또 능히 그대의 청백한 가풍을 지킬 수 있었으며, 세금 외에 달리 거두어가는 일이 없어 그대들의 일정한 재산을 넉넉하게 하였으니 원님의 치적이 저 삼자와 비할 때 어떠하며, 그 덕이 금석에 새겨둘 만하니, 여러분 노인들은 그 어찌 잊을 수 있겠소?”
하였다. 그랬더니 여러 노인들이,
“그렇습니다. 대부(大夫)께서 그 사실을 글에 실어 후세까지 썩지 않도록 해주시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청이 몹시 간곡하므로 내가 비록 죄를 얻은 폐인이나 역시 고금의 어진 사대부의 올바른 행실을 자못 이야기할 줄 알며, 나의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서 아첨할 줄은 모르는데 감히 원님의 정사를 매몰시켜 노인들의 뜻을 저버리겠는가? 드디어 책임을 피하지 않고 즐겨 대신하여 말하는 것이다.
원님의 이름은 회일(會一)이며, 상당(上黨 청주의 옛 이름으로 한명회의 봉지(封地)임)의 거족(巨族)이다. 부친 상서공(尙書公)은 당시에 크게 유명하였으며, 후(侯)는 삼가 정훈(庭訓)을 받들어 바야흐로 젊은 나이에 관리의 업무를 알고 익숙함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군자는 더욱 어렵게 여겼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제7권 / 문부(文部) 4 ○기(記)'엔 '함열현(咸悅縣) 객사 대청(客舍大廳) 중건기(重建記)'가 전해온다.
공문을 수령들에게 보내어 배로 변산(邊山)에서 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니 소나무다.
△경기도에 변산 소나무를 심어라
-숙종실록7권, 숙종 4년 10월 23일 경인 2번째기사 1678년 청 강희(康熙) 17년
;병조 판서 김석주 등이 강화도를 살피고 돌아와 지도와 서계를 올리다
대신(大臣)과 비국의 제신을 인견(引見)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석주(金錫胄)와 부사직(副司直) 이원정(李元禎)이 강도(江都)를 순심(巡審)하고 돌아와서 곧 지도(地圖)와 서계(書啓)를 봉진(奉進)하였는데, 소정(所定)한 축돈처(築墩處) 49소(所)를 작성한 서계에 대략 말하기를,
"《고려사(高麗史)》를 취하여 상고하니, 고종(高宗) 24년(1236)에 강도(江都)의 외성(外城)을 쌓았다고 하여서 이제 부중(府中)의 부로(父老)에게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지금 당장에도 연해(沿海)의 동·북·서 3면(面)을 보면 성토(城土)가 널리 퍼져 있는데, 마니산(摩尼山)·길상산(吉祥山) 뒤에 돌을 첩첩이 쌓아서 성첩(城堞)의 둘레를 만든 것도 또한 그 유제(遺制)이다.’ 하였습니다. 순심(巡審)할 때에 보았더니, 과연 부민(府民)이 또 모두 말하기를, ‘돈대(墩臺)를 설치한 뒤에 모름지기 다시 수선하여 완전히 흙으로 쌓고 그 뒤에 성가퀴를 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곳에 행차할 무렵 훈련 대장(訓鍊大將) 유혁연(柳赫然)이 신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포구(浦口)의 진흙을 쌓아 성자(城子)를 만들어 보라.’고 하였으므로, 신이 그 말에 의하여 한 군교(軍校)로 하여금 역부(役夫)를 동독(董督)하여 거느리고 먼저 포변(浦邊)의 두서너 자리 만한 땅에 나아가 흙을 파서 성참(城塹)의 형상을 만들게 하였더니, 조수(潮水)가 이르렀어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만약 이 법에 의하여 여조(麗朝)에서 예전에 쌓았던 곳을 다시 수선한다면 편할 것입니다. 서울에 있을 때에 이미 귀에 익도록 문수산(文殊山)은 강도(江都)에 대봉(對峰)이 되고 규산(窺山)이 된다고 들었기에, 김포(金浦)의 길 위에 있으면서 이 산을 바라보았더니 서북(西北)의 여러 산 가운데에서 우뚝이 일어났고, 통진(痛津)에 다다라서는 산이 현(縣)의 서북(西北)쪽 5, 6리(里) 남짓한 곳에 있었으며, 봉정(峰頂)에서 10여 보(步)를 못미쳐서 북쪽으로 굴러 한 산마루의 약간 편평한 데를 얻어 강도(江都)를 굽어보니, 정히 의자(椅子)에 앉아서 바둑판을 보는 것과 같았으니, 이는 대(對)함이 아니고 곧바로 압도(壓倒)함이었으며, 엿봄이 아니고 곧바로 방자하게 임(臨)함이었습니다. 이제 만약 담으로 삼을 수 없어서 한 구역 안을 바치어 적인(敵人)이 웅거하는 곳이 된다면, 강도(江都)의 사람은 모두가 장차 식사(食事)를 당하여도 삼켜 내리지 못할 것이니, 전날에 문수산(文殊山)에 축성(築城)하기를 의논한 자도 또한 터무니없는 계책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역(大役)이 또 시작됨으로서 한데 아울러 거사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니, 아직은 먼저 승도(僧徒) 중 사리를 자세히 아는 자를 모집(募集)하여, 절 하나를 산 안의 천맥(泉脈)이 있는 곳에 설치하여 요후(瞭候)를 숙련하게 하고, 기계(器械)를 간수(看守)토록 하여, 다시 1, 2년을 기다렸다가 약간 재력(財力)이 저축되면, 반드시 축성할 계책을 하여야 마땅합니다. 장봉도(長峰島)와 자연도(紫燕島)는 해문(海門)을 분치(分峙)하여 남쪽으로 조운(漕運)하는 입구가 되고 매음(煤音)은 교동(喬桐)과 몇 리 정도 떨어져 있으므로 강도(江都) 사람과 물을 격(隔)하여 서로 말할 수 있으며, 그 섬은 또 매우 넓어 소금을 만드는 호구와 고기잡는 사람이 모여 살고 있으니, 비록 목장(牧場)이 있더라도 일진(一鎭)을 설치하기에 족하고, 장봉도는 토지가 심히 비옥(肥沃)하고 사람이 모두 들어가기를 원하며, 또 포곡(浦曲)이 있어 수십 척의 선함(船艦)을 정박시킬 만한 데이니, 또한 1보(堡)를 설치할 만합니다. 동검도(東儉島)에 조수(潮水)가 물러가면 강도와 육지를 연(連)하였고, 또 매우 중요한 요해지이니, 우선 한 별장(別將)을 두지 않을 수 없으며, 월곶진(月串鎭)은 곧 연미정(燕尾亭)이니, 중묘조(中廟朝)의 명장(名將) 황형(黃衡)의 유기(遺基)입니다. 조정에서 이미 이 진(鎭)을 설치한 뒤에 장차 대가(代加)하려고 하였는데, 황형의 후손(後孫)인 고(故) 대사성(大司成) 황감(黃㦿)가 힘껏 사양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황감의 아들 황익(黃益)이 가난하고 피폐하여 떨치지 못한다고 하니, 이제 만약 그 경작하지 않는 언전(堰田)을 헤아려 준다면 거저 빼앗았다는 기롱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돈소(墩所)로 정한 2, 3처(處)에는 혹은 인가(人家)도 있고 혹은 민전(民田)이 있는데, 신이 앞서 연미(燕尾)의 대가(代加)를 주라고 청한 것도 또한 이 무리들의 마음을 위안(慰安)하려고 함이니, 바라건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의(稟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예전에 정장(亭障)에다 임목(林木)을 많이 심었던 것은 대개 나무 뿌리가 크고 견고하여 지면 저절로 채책(砦柵)을 이루고, 나뭇가지가 서로 엉클어지면 치돌(馳突)하는 것을 방비하기에 족하며, 또 나의 몸을 엄폐하고 적(敵)을 사격하기에 편한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려(師旅)가 둔숙(屯宿)하는 지역은 더욱 나무를 찍고 풀을 베는 것으로 중함을 삼으니, 나무를 심는 정책에 힘쓰지 않을 수 없는데, 근부(斤斧)가 찾게 되면 오래 기르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마니산(摩尼山) 외에는 거개가 모두 민둥민둥하니,
완도(莞島)와 변산(邊山)의 소나무를 취하여다 그 산 둔덕의 경작 못하는 땅을 가려서 두루 갈아서 심으면, 수십년(數十年)을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울창하게 숲을 이루는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차례로 행하게 하였다. 태조(太祖)가 탄강(誕降)하신 터가 영흥(永興) 땅에 있어, 오래도록 민전(民田)이 되었던 것을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북백(北佰)161) 이 되었을 때에 관둔전(官屯田)으로 서로 바꾸어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 그 뒤에 다시 간호(看護)하지 않아 그대로 폐기(廢棄)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행 대사간(行大司諫) 심재(沈梓)가 다시 봉식(封植)을 더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심재(沈梓)가 또 논하기를,
"사옹 직장(司饔直長) 이공간(李公幹)은 공회(公會)의 뭇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함부로 패리(悖理)한 말을 하였으니, 청컨대 파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공간은 허목(許穆)의 아들 허함과 동료(同僚)가 되는데, 마침 원중(院中)의 회음(會飮) 때에, 이공간(李公幹)이 하리(下吏)를 최촉하여 미수(味數)를 올리게 하였다. 【찬선(饌膳)을 추가하여 올리게 함을 일컫는다.】 미수는 허함이 아비의 별호(別號) 미수(眉叟)의 음(音)과 서로 비슷한 까닭으로 허함(許𦑘)이 일부러 말로 침노하였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기뻐하지 않고서 파(罷)하였는데, 헛된 말을 얽어 만들어 진신(搢紳)에 전파한 것으로써 심재의 이 탄핵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듣는 자가 허함(許𦑘)의 어리석고 미련함을 비웃지 않음이 없었다.【태백산사고본】 6책 7권 37장 B면
△강흔의 '하설루기'와 ‘격포행궁기’
표암 강세황의 둘째 아들 강흔(1739~1775)의 '삼당재유고(三當齋遺稿) 전함)'엔 1769년 가을 부안현감으로 부임했다고 나온다. 부안읍지를 만들기도한 강흔은 이 해 12월 '후선루(候仙樓)'를 새로 세우고 낙성식을 열었다. 관아의 후선루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왔다. 그래서 이름을 '하설루(賀雪樓)'로 바꾸었음이 '하설루기(賀雪樓記)'를 통해 드러난다.
이 당시 부안 관아엔 이 누정 외에 부풍관(扶風館), 역락헌(亦樂軒), 단소헌(但嘯軒), 망월루(望月樓), 제민헌(濟民軒) 등의 건물이 있었다.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강흔의 '서설을 반기는 누각' 하설루기(賀雪樓記)엔 한양에서 벗들과 어울려 멋지게 논 것(遊雪), 영남 가는 조령의 눈길에서 멋지게 여행한 것(行雪), 대궐에 눈이 내릴 때 멋지게 시를 지은 것(詠雪), 수리산에 내린 눈을 멋지게 감상한(賞雪)까지 하나하나 정취있는 사연으로 넘쳐난다. 하설루에서 눈 구경이 인생에서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눈을 감상하는 기문 가운데에서도 빼어난 작품이다. 그래서 부안의 눈맞이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으며, 눈이 올 무렵에 갖는 설숭어축제가 예사롭지 않다.
△강흔의 '서설을 반기는 누각' 하설루기(賀雪樓記)
부안 관아의 후선루(仙樓)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찾아왔다. 누각이 높아서 멀리 조망하기에 넉넉한지라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씨가 춥지 않은 해라 얼음이 얼 낌새가 없어 몹시 울적해졌다. 십이월이 되자 연일 눈이 크게 내렸다. 한두 손님과 함께 후선루에 올라 놀기로 했다. 잔치 자리를 넓게 깔아 술잔과 그릇을 차려 놓으니 비취 소매의 기녀는 추위에 떨고 붉은 화로에서는 불기운이 이글거렸다.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
사방을 둘러보니 무성(武城)과 영주(濠洲), 김계(김제) 여러 군의 산은 백옥 같은 봉우리와 고개가 한가지 빛이고, 성곽 서북쪽의 숲과 골짜기도 온통 흰빛이었다. 관아 건물의 높은 대와 대를 둘러싼 다락에는 떨어지는 꽃잎과 휘날리는 솜버들 사이로 구슬 같은 용마루와 옥 같은 기와가 불쑥 나타났다가 어느새 사라졌다. 상쾌한 기운이 폐부로 스며들 때 술잔을 들어 손님들께 권하며 말했다.
“지금 이 눈은 납일(臘日) 전에 내린 세 번의 서설인데 한 길 높이로 쌓였으니 음산한 요기가 스르르 사라지고 아직 남은 메뚜기 알이 땅속으로 숨어들 겁니다. 내년에는 참으로 풍년이 오리라는 것을 점쳐서 알 수 있습니다. 도적은 틀림없이 일어나지 않을 테고, 송사도 틀림없이 늘어나지 않을 테지요. 그러면 나는 이 누각에 올라 즐겁게 지낼 겁니다. 옛날 소동파(蘇東坡, 소식)가 비가 내릴 때 '희우정(喜雨亭)'을 완성한 것처럼 나는 눈이 내릴 때 이 누각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니 이 누각의 이름을 눈을 축하한다는 뜻의 '하루(賀樓)' 로 바꾸렵니다"
술잔이 여러 번 오가고 나자 서글피 예전 일이 떠올랐다. 임오년(1762년) 한양에서 나그네로 지낼 때였다. 귀족과 호걸 집안의 한두 친구가 대설이 내리자 편지를 보내 나를 불렀다. 저물녘에 대문을 나서 나귀에 걸터앉았다. 골목을 지나 큰길을 뚫고 대지의 눈길을 헤쳐 나갔다. 백옥 빛천지에서 친구와 상봉해 어깨를 부딪고 손을 부여잡으며 추위를 몰아낼 난방 도구를 벌여 놓았다. 그 뒤에 운을 나눠 시를 짓되 소동파가 옛날 취성당(聚星堂)에서 한 것처럼 했더니 기분이 몹시도 호쾌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논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해 남쪽 지방에 벼슬살이하러 떠나 *조령에 이르렀을 때 대설을 만났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은 곳이라 늙은 나무가 어지러운 삼줄기처럼 솟아 있어 한기가 평야의 열 곱절이나 더했다. 때때로 소나무는 쌓인 눈 무게를 못 견뎌 가지가 부러지고 황새가 깜짝 놀라 날아올랐다. 절정에 올라 저 아래로 일흔 개 고을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몹시도 상쾌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여행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또 그다음 해 홍문관(弘文館)에 숙직할 때 대설을 만났다. 푸른 나무와 검푸른 추녀만이 어우러져 있을 뿐이었다. 달빛이 환해 금청교(禁淸橋)를 산보하노라니 자줏빛 옷을 입은 내시가 임금님의 보묵을 받쳐 들고 와서 문신들에게 눈을 반기는 시를 지어 올리라는 하명을 전했다. 절을 하고 받들어 시를 지어 바치고 나자 기분이 몹시도 즐거워 눈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시를 지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다음 해 산으로 돌아와 은거하노라고 문을 걸어 닫은 채 겨울을 날 때 또 대설을 만났다.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문을 나서서 매화가피었는지 더듬어 가다 내친걸음에 수리산(修理山)의 절에 올랐다. 선루(禪樓)와 요사채가 눈에 덮였고, 소나무가 눈에 묻혀 대숲을 가두어 거의길이 끊겼다. 문을 두드리자 장작처럼 깡마른 스님이 향불을 사르고 불경을 읽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도 호젓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눈을 감상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축(己丑)년 올해 나는 또 이 누각에 올라 눈이 온 것을 축하했다. 십 년 이래 한 몸이 노닌 자취가 또렷하게도 마음과 눈에 떠오르건만, 머리를 돌려 보면 종적조차 찾을 길 없다. 마치 눈 위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과 같다.
인간 세상 세월이란 이처럼 손아귀에 잡고 즐길 수 없단 말인가! 앞으로 몇 년 만에 어디에 몸을 부쳐 몇 길의 눈을 만나 몇 번이나 즐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내가 이제 이 글을 지어 여기에 남겨 두면 곧 관복을 벗고 떠나리라. 고향에 돌아가 지낼 때 육칠월이 되면 불우산은 허공에서 불타고 시방세계는 가마솥 같으리라. 초가집 처마 밑이나 토방 위에서 나뭇잎 하나 흔들거리지 않고 새 한 마리 울지 않을 때 낮잠 끝에 목침에 기대 누워이 글을 읽는다면 맨발로 꽝꽝 언 얼음을 밟는 기분이 들리라.
*조령(鳥嶺)은 남북과 동서를 가르는 험한 고갯길로서 남에서 북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죽령이 그 역할을 했으나 조선 들어 한반도에 8대 대로를 개통하면서 영남대로의 핵심 관문으로 떠올랐다. 이전에는 죽령과 계립령 하늘재가 주요 통로였다. 죽령은 이미 알려진 대로 신라 죽죽장군이 고구려를 무찌르기 위해 넘었던 최초의 길로서 '삼국사기'에 자세히 소개된다.
*기축(己丑)년:1769년
강흔이 지은 '부안 격포의 행궁' 격포행궁기(格浦行宮記)는 변산에 있었던 행궁을 찾아가 지형과 구조, 건립의 역사에 관리 실태까지 두루 살펴보고 썼다. 여행의 과정을 묘사한 솜씨도 빼어나며, 부안 행궁을 찾았다. 조선시대 전북엔 부안 격포, 위봉진, 무주 무풍 등에 행궁이 있었다. 그는 변산의 행궁을 찾아가 지형과 구조, 건립의 역사에 관리 실태까지 꼼꼼하게 적었다. 그러나 이 글의 묘미는 후반부에 있다. 국난에 대비하려고 요충지에 구축한 요새가 부실한 정도를 넘어 완전히 무너져 있다. 젊은 지방관으로서 민심도 군사 대비도 모두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실태를 관찰하고 개탄과 우려를 담아 감개하게 서술했다. 부안 행궁의 실상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우환 의식을 구체적 체험을 통해 밝힌 의의가 있는 글이다.
△강흔의 '부안 격포의 행궁' 격포행궁기(格浦行宮記)
부안현 관아의 서문을 나와 들길로 이십 리를 가면 변산이다. 변산은 둘레가 구십여 리인데 그 반쪽이 바닷물에 들어가 있다. 산을 안고서 동남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웅연도(熊淵島)이다. 여기에서 바닷배를 타고 산을 따라 아래로 삼십 리를 가면 동남쪽은 큰 바다이고, 서북쪽은 바로 산이다. 산세가 갈수록 둥그렇게 둘러싸고, 풍기(風氣)가 갈수록 단단하고 빽빽해지는데 이곳이 바로 격포진(格浦鎭)이다. 격포진은 산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고, 진 앞에 있는 만하루(挽河樓) 밑까지 조수가 곧장 밀려들어 온다. 진에서 꺾어 서쪽으로 일 리를 가면 그곳이 바로 행궁(行宮)이다.
행궁은 동쪽을 바라보고 뒤로 높은 봉우리에 기대 있다. 봉우리 뒤는 큰 바다이지만 사면을 산이 감싸고 있어 행궁이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음을 전혀 알 길이 없다. 정전(正殿)은 열 칸이고 동서 날개집은 여덟 칸이며 누각 네 칸, 행각(行閣) 네 칸이다. 바깥문은 세 칸이고 안문은 두칸으로 답을 둘러쳤다. 단청이 심하게 벗겨졌으나 건물의 규모는 거창했다. 변산 지역 승려를 불러 모아 행궁을 지키고 있다.
선조 임금 18년 경진년(1580년)에 삼남순검사(三南巡檢使) 박황(朴璜)과 *관찰사 원두표(元斗杓)가 조정에 보고하여 진을 설치하고, 경종 임금 4년 갑진년(1724년)에 관찰사가 또 조정에 보고하여 이 행궁을 지었다. 행궁의 지세가 높은 산에 의지하여 험준하고, 또 험한 바다에 걸쳐 있어서 요새로 삼았다.
이 지역은 몹시 가파른 산이 백 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큰 바다가 여기에 이르면 칠산(七山) 앞바다에 막혀 해로의 목구멍이 된다. 돛을 달고 북쪽으로 항해하면 하루 밤낮 사이에 강화도에 곧장 도달할 수 있으므로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험준한 지형이다. 선배들이 이 지역을 지키지 못하면 강화도조차 믿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진을 설치하고 행궁을 지었다. 그 큰 책략과 원대한 계획이 이와 같다.
정전 뒤편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봉수대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만 리에 층층이 이는 파도가 눈 아래 아스라하다. 서쪽으로 고군산도나 계화도 등 여러 개의 섬을 바라보니 바둑판이 벌려 있고 별이 펼쳐진 모습이다. 주변 풍경을 두루 살피면서 감개한 기분으로 배회했다.
이윽고 격포진의 장교를 불러 무비(武備)에 관해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진의 서쪽 일 리쯤 되는 곳에 대변정(大變亭)이 있는데 무기고입니다. 창은 부러지고 검은 무뎌졌으며, 깃발은 찢어지고 더러워져 어느 것 하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함 한 척과 양곡선 두 척, 척후선 세 척이 있어서 삼 년에 한 번 보수하고 십 년에 한 번 지붕을 교체하는 것이 군율입니다. 지금 십여 년이 흘렀지만 감영이나 수영(水營)에서 물자와 인력을 대 주지 않습니다. 오래된 것은 벌써 훼손되어 버려 지금은 한 척도 남은 배가 없습니다”
오호라! 국가가 태평스러워 바다에 외침의 물결이 일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전쟁을 알리는 나쁜 소리를 듣지 못한 지 수백 년째다. 만에 하나 변경이 안정되지 않아 외적이 침략할 때 무비가 이렇듯 엉성하다면 지리상 이점을 활용할 길이 없다.
바닷가 백성들은 소금 독점과 어세(漁稅)에 핍박당해 생계를 잇지 못한 지 오래다. 풍속이 본디 교활하고 변덕이 심하므로 인화(人和)도 말할 것이 못 된다. 이런 사정이야 군현을 맡은 낮은 관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만 조정의 많은 현명한 분들이 술 마시며 노래하고 흥겹게 잔치하는 여가에 잠깐만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을는지 나는 모르겠다.
*웅연도(熊淵島);일명 곰섬으로, 곰처럼 생겨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섬 앞바다에 깊은 소(沼)가 있어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 두 글자를 합쳐서 우리말로 '곰소가 됐다고 한다.
*관찰사 원두표(元斗杓): 원두표(1593~1664)는 전라관찰사를 세 번이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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