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전주 선너머와 강당재(講堂峙)

전주 선너머와 강당재(講堂峙)

전주MBC 입구에 자리한 빗돌의 '화산명곡응(華山鳴谷應)'은 방송국이 진북동시대에서 화산동시대로 옮길 때 쓴 글씨다. 

'화산이 울면 계곡이 응답한다'는 의미로, 1995년 11월 최주호 우성그룹회장이 기증했으며, 이는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 1924 ~ 2008) 선생이 썼다.

화산(華山)은 전주 화산공원의 정상 높이는 약 121.6m이다. 

전주 화산공원은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고, 산세가 가파르지 않아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전주시 도심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으나, 산세가 가파르고 바위가 많다. 

하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가벼운 복장으로 자주 찾는다. 

최고봉은 서산(西山)으로 해발 109.2m이고, 서신 롯데아파트에서 시작, 예수병원 뒤쪽 선너머로 까지는 편도 30분 정도 걸린다.

화산서원이 있어서 화산이라는 지명이 유래됐다. 동쪽으로 다가동, 서쪽으로 효자3동, 남쪽으로 효자1·2동, 북쪽으로 서신동·진북2동에 면해 있다.

 화산서원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4호)는
화산서원이 있었다는 비석이다.

화산서원은 선조 11년(1578)에 전주부윤으로 백성들에게 도덕과 예절을 가르치는 데에 힘쓴 이언적(李彦迪)과, 전라감사로 청렴하게 정치를 펼친 송인수(宋麟壽)의 행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웠다.

효종 9년(1658)에 서원의 가치를 인정해 왕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주고 노비, 서책, 토지 등과 현판액자을 내려주는 사액서원이 됐다.

 화산서원비는 사액서원이 된 것을 기념하여 세웠으며, 현종 5년(1664)에 조선시대 대학자인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다. 

고종 6년(1869)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건물은 헐리고, 현재는 화산서원의 역사를 기록한 비만 남아 있다. 

지금비석만 남아, 이곳이 예전에 선비들이 글을 읽던 학문의 전당임을 전해주고 있다.

전주시 화산동 고개를 넘으면 물씬 미나리의 향취가 코를 찌른다. 이 일대는 유래가 깊은 미나리 방죽이 있었다.
 근영여중고 근처에 뒷골 방죽, 은하아파트 인근에 사거리 방죽, 그리고 강당재에도 방죽이 있었다.

 옛부터 전주 미나리는 유명하다. 미나리 줄기가 연하고 겨우내 물속에서 자라 그 맛이 또한 일품이다.
미나리는 특히 간장에 좋다 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으나 전주의 미나리는 그런 약용보다는 그 맛이 독특해서 밥 반찬으로 손꼽힐만하다. 

아주 어려운 일을 능수능란하게 한다는 뜻의 ‘선너머 아가씨 미나리 다듬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조선시대 당시 전주 지역에 서원이라는 곳이 있었고 ‘선(서원) 너머’란 현재 중화산동 인근의 미나리꽝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일대 미나리는 줄기가 연하고 겨우내 물속에서 자라 그 맛이 또한 일품이었다.

화산(華山)을 넘어 서원(書院)이 있다고 해서 ‘화산서원 넘어’라는 뜻의 ‘서원너머(선너머)’라고 불렀다. 

바로 이곳에서 나오는 미나리는 줄기가 연하고 겨우내 물속에서 자라 그 맛이 또한 일품이었다는 평가를 받아 ‘완산십미’로 유명했지만 택지 개발로 인해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전주대 인근, 삼례 등 더 외곽으로 밀려난 가운데 겨울 미나리, 하우스 미나리, 노지 미나리 등이 생산되고 있다.


‘강당(講堂)재’는 중화산1동과 완산동을 잇는 오래된 고개다.
 과거 화산서원(華山書院)의 강당이 있는 고개를 선비들이 오르내리면서 공부를 했다고 전해지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화산동에 위치, 전주의 구도심과 남쪽 신시가지를 이어주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엔 "신유년에 태조의 빛나는 용상(龍像)을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게 되자 학교와 경기전이 너무 가까워, 시서(詩書)를 외우는 소리와 태만한 학생에게 매질하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성령(聖靈)을 편안히 모실 곳이 못 되므로, 마침내 성의 서쪽 6~7리 되는 곳으로 옮겼다. 무릇 성전(聖殿)과 강당(講堂) 재랑(齋郞)과 부엌이 차례로 완비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서원을 지은 곳이 전주부의 서쪽인 화산(華山) 기슭인 삼계리이고, 그 이름을 화산서원(華山書院)이라 했다. 
서원의 강당이 있는 고개를 선비들이 오르내리면서 공부를 했다고 해서 강당재라 칭했다. 화산(華山) 너머에 서원(書院)이 있다고 하여 선너머라고 불렀다. 현재 강당재라는 지명보당 선너머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예수병원, 신흥고교 등이 있다. 이 고개를 넘는 도로명을 서원로(書院路)로 부른다.

'강당재'는 구 예수병원 좌측 고개로 주변에 화산서원이 위치하고 있어  강당재라고 불렀다. 
고개마루 근처 좌편에는 인민군이 학살했던 움푹파인 터가 있어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이곳엔 맹꽁이들이 살았다.

이 도로는 용머리로와 서원로가 생겨난 이후에도 많은 차량과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다가공원을 산책하는 시민들이 중화산동에서 다가산 정상으로 넘어오는 주요 산책로로도 이용되고 있다.

기독교 교세가 확장되면서 신흥학교는 1920년에 60명에 불과하던 학생 수가 1921년에는 200여 명으로 증가한 바, 주일에는 학생과 교직원들이 단체로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경기전에 인접해 있던 향교를 서원너머로 옮기고 화산서원을 설립, 요즘말로 학교군을 형성한 현재의 예수병원 주위는 항상 선비들로 들끓었다. 

노송이 우거진 오솔길로서 아침 저녁으로 학문을 닦는 교실(강당)을 향해 오르내리는 고개라고 해서 '강당재'로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