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종광대(鐘廣臺)와 물왕말(水王村)
견훤왕궁길은 전주고등학교와 전주동초등학교 사이에 동에서 서로 난 길 이름이다.
기점은 중노송동 774-12, 종점은 인후동2가 1529-1, 길이는 2,901m이다.
서낭당에서 서쪽으로 난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전주동초등학교 정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솟은 산이 종광대(鐘廣臺)이다.
'종광대'는 후백제시대에 이 곳에 종이 있었던 자리다. 후에 그 곳에 대를 지었는데, 그 대의 이름이 종광대이었다고 한다. 이 때의 종은 누가 왜 만들었을까.
장수에서 발견된 후백제 시대 동종은 약간 작지면 전형적인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후백제 시대 시간을 알린 동종이 온전한 형태로 출토됐다. 장수 대적골 유적을 조사중인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후백제~조선시대로 편년되는 종합제철유적이 다수 확인됐다”면서 “특히 9세기말~10세기 초 후백제 문화층에서 크기는 작지만 일반적인 범종의 형태를 완전히 갖춘 청동종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동종은 높이 26.5㎝, 지름 10~15.6㎝ 정도인 약간 작은 크기의 범종(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공양 및 예배 때 사람들을 모을 때 쓰이는 종)이다.
매달 수 있는 용뉴(용의 모습을 한 고리) 부분에는 용 한마리와 음통(音筒·소리대롱)이 조각되어 있다. 용뉴의 바닥이자 천판(종의 천정부분) 가장자리에는 서있는 형태의 꽃무늬가 둘러져 있다. 종의 가장 상부와 하부에는 꽃가지무늬가 새겨져 있고, 상부 아래에는 4개의 연곽(상대 밑에 붙어있는 네모난 테)이 있다. 각각의 연곽 안에는 9개의 연뢰(연꽃봉오리 형태로 돌출된 장식)가 볼록하게 돌출돼 있다.
또한 몸체에는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2개의 연꽃무늬 당좌(종을 칠 때 망치가 닿는 자리)가 있다. 당좌 사이에는 연꽃자리에 앉아 합장하고 있는 2구의 불보살상이 장식되어 있다.
전상학 전주문화유산연구원 조사1부장은 “이 동종은 전체적으로 비교적 세련되고 표현이 우수한 형상”이라면서 “소형 동종은 경주 지역 등에서 몇 건 출토된 적이 있었으나, 전북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 누군가는 '종광대'를 '학동들을 갈쳐서 밝게 하는 곳이라 '동광대(童光臺)'라고 증언한다.
'종광대'의 남쪽 물왕말이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의 중심지였고, 바로 옆인 동초등학교 앞 부분도 남쪽을 바라보고 뒤쪽은 북쪽 바람을 막아주어 산성으로서 지리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 동정리라 불렸으며 조선시대엔 전주이씨들이 살았던 곳이다.
'종광대' 아래 전주고등학교와 전주동초등학교 사이의 마을이 물왕물이다.
'물왕말(水王村):전주고등학교 서쪽 담장 일대)'은 물왕멀, 무랑물, 무랑말, 물왕물, 수왕촌(村) 등으로 불린다. 우리는 흔히 '물왕말'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왕물', '물왕멀'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말'은 옛 제도의 마을을 말한다. 국어 사전은 마을의 준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유명사인 '물왕말'을 변형된 물왕물 혹은 물왕멀로 부르는 것은 좋은 이름을 두고 별명을 부르는 것과 같으니 이 기회를 빌어 바르게 불러주기를 바란다.
전에 마을 가운데 공동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맑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후백제시대에 이곳은 견훤의 왕궁터라고도 한다.
반태산이 전혀 개발되지 않고 있을 때 바가지샘(동네 공동 우물)이 네다섯 곳에 있었다.0
반태산의 중턱였음에도 불구하고 맑은 물이 흘러 넘치는 샘이었다.
'물왕말' 마을 앞의 전주고등학교가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모두 논이었으며, 인봉리방죽의 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전주의 동부지역이 모두 기린봉 자락들로 이어져 있어서 변변히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없던 데 비하면, '물왕말' 지역은 비교적 넓은 경작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을의 규모나 위세가 크고 드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고등학교 뒤의 '물왕말'은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곳으로 20여년 전만해도 좁은 고샅길이었는데 현재 전주의 순환도로가 있다.
견훤의 출생이 지렁이 정기를 타고 났다는데서 전해오는 설화에 연유되고 있으나,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씨로 고쳤다고 한다. 견훤이 진훤으로 발음되는 데서 지렁이의 정기가 떠돌고 있다. 견훤은 이 물왕멸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궁궐을 지어 도읍으로서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성곽을 쌓았다고 전한다.
전영래 원광대 교수의 '전주(全州)· 동고산성개괄 조사보고'에서 살펴보면 "고토성(古土城)은 부북오리(府北五里)에 있다 하였는데 이가 견훤도성(甄萱都城)의 외성(外城)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전주부사(全州부史, 1943년 발행)에서는 현 전주시청 노송동(老松洞) '물왕말'(水王村)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고 설명하면서 전주부사 도성(都城)의 대요를 살필 수 있는 다음의 글을 인용했다.
"전주역(현 전주시청) 동(東) 반태산(盤台山, 속칭 반태미)의 구릉지는 후백제 견훤왕궁지로 보아도 대과(大過)가 없으며 또 승암산(僧岩山) 남동방 성황사 소재(南東方 城皇祠 所在) 산곡(山谷)의 성지가 동왕궁(同王宮)에 가장 인접한 산성으로 보인다"
"전주역 동(東, 현 전주시청 동), 고산가도(高山街道, 전주중앙성당에서 코아백화점 옆으로 해서 전주농고 앞을 지나 고산에 이르는 도로)와 구(舊) 동정리에 통하는 도로(전주고교 동편에서 서낭댕이를 거쳐 진안으로 가는 도로)의 중간에 낀 일련의 구릉지대는 고래(古來)로 후백제왕 견훤이 쌓은 토성지로 전해져 왔고, 특히 이곳은 왕궁지로 추정되는 증거가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연화문화당(연화문와당)도 그 물증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이 지역이 전주의 고성지(古城址)중 가장 형승지(形勝地)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대의 민가를 자세히 조사한 결과 왕고(往古)의 왕성의 건축초석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각형석재(角形石材)나 대형천석(大形川石)이 무려 일만 여개가 현존하고 있는 점이다"
전교수는 "중심왕궁 · 관아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은 전주부사에서 지적한대로 전고(全高)에서 반태산에 이르는 중노송동 일대였을 것으로 1930년대에 건물초석 1만 여개가 산견(散見)되었다는 점이나 신라식 연화문와당이 출토됐다는 점으로도 짐작이 간다"고 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고토성재부북오리(古土城在府北五里) 유기지(有基址) 견훤소책(甄萱所策)'이라 한 것도 이곳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책 사조조에 '여단 재부북오리라 했는데, 이 여단지가 바로 반태산 이므로 이 고성지는 반태산 일대임을 알 수 잇다"고 결론지었다.
'물왕말'을 포함한 반태산, 전주고교, 동초등학교가 있는 일대가 견훤성이었고 중심 왕성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곳 일대가 견훤왕성이었다면 아마도 이곳에서 솟는 우물에서 왕성의 필요한 물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아지고 또 후백제가 고려에 통합되어 왕성이 없어지고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니 이 마을의 이름을 왕이 먹던 샘물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물왕말(水王村)'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한다는 생전에 유장우 선생이 말한 기억이 난다.
전북지역 고고·역사 연구자 등 80여 명은 성명을 통해, 국가유산청과 전주시가 후백제 유적이 다수 발굴된 종광대 재개발 구역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재개발 구역에서 발견된 도성벽이 현재 전주시에서 유일하게 남은 후백제 도성 유산으로 판단되는 등 역사적 가치가 높다며 보전과 발굴 등을 위해 민관학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지역 정치권에는 후백제 유산 보전을 위한 국가예산 확보 등을 요구했다.
국가유산청이 전주 종광대2구역 재개발 사업 구역에서 확인된 후백제 시기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유물에 대해 보완 발굴조사를 주문했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주시에 이런 내용의 '전주 종광대2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부지 내 유적 전문가 검토회의 조치사항'을 통보했다.
발굴조사가 미흡하다며 보완 조사를 통해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는 취지다.
시가 조치 사항 이행 결과를 제출하면 2차 전문가 검토회의를 열어 보존조치 방향 등을 검토할 수 있다.
종광대 2구역 주택재개발지역(31,2436㎡)에서 후백제 도성벽 북벽(동-서 길이 130m, 너비 10~14m, 잔존 성벽 높이 2.5m)이 확인됐다. 성벽은 구시가지 북동쪽 해발 60여m 구릉에 있으며, 시내 조망에 좋은 지형조건이다.
고도 지정을 위해 후백제 도성, 왕궁지 등 유산 보존이 매우 중요하나 도성과 왕궁지로 추정되는 중노송동과 인후동에 재개발이 시행되며 유산 멸실 위기다.
또 이곳은 후백제를 상징하며 수많은 역사·문화적 의미를 함축하는 곳이므로 보존이 마땅하고, 발굴된 도성벽은 현재 전주시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후백제 도성 유산으로 판단된다. 만약 이곳이 훼손되면 후백제 역사는 사라질 것으로 시가 추진하는‘왕의 궁원 프로젝트’와도 역행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유산청은 종광대2구역 유적 발굴지에 대한 전문가 검토회의를 열었다. 전문가 검토회의는 발굴 과정에서 중요 유구 및 유물이 나왔거나 발굴 완료 단계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필요할 때, 개발사업 부지 중 일부 조사완료 구역에 대한 사업 시행 여부를 검토할 때 등에 한다.
재재발 사업이 추진되는 전주시 인후동 종광대2구역에 대해 지난해 초부터 전북문화유산연구원이 진행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자연 지형을 이용해 흙으로 쌓은 130m 길이의 성벽이 확인됐다. 성벽 인근에서는 동고산성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후백제 유물인 기와도 나왔다.
이 일대는 전주시가 추진하는 후백제 고도 지정 구역에 포함돼 이번에 나온 유적이 후백제와 연관성이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와 일부 시민사회단체는 종광대2구역에서 후백제 도성벽 존재와 축조공법 등이 파악된 것을 근거로 현지보존을 요구하고 있다.
현지보존 조치가 나오면 재개발 사업은 전면 중단된다.
반면 재개발조합 측은 관리계획처분인가까지 끝나 집을 철거한 마당에 사업이 중단되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며 기록보존에 따른 재개발사업의 정상적 추진을 요구하고 있다.
인후동 소재 종광대2구역 재개발 사업지구 주민들이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라는 시위를 펼쳤다.
이들은 재개발 정비사업으로 주택 등의 철거가 90% 이상 추진된 시점에서 문화재 발견으로 사업 전면 중단이 우려되고 있다며 이럴 경우 사유재산권 제한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막대한 피해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시는 종광대2구역의 경우 시에서 개발하거나 보존할 권한이 없으며 국가유산청의 결과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국가유산청은 전문가 검토회의에서 보존조치 의견이 제시될 경우 건설공사 시행자나 해당 지방자치단체 의견을 토대로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존조치 방향을 결정한다.
'전북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현십경(古縣十景) (0) | 2025.01.24 |
---|---|
선운사 동백나무의 용도는 '방화수림대(防火樹林帶)' (3) | 2025.01.23 |
방화수림대(防火樹林帶), 선운사 동백나무 (0) | 2025.01.22 |
'계화도 역사와 주민들의 삶을 밝히다' 국립새만금간척박물관 3월 16일까지 전시 (0) | 2025.01.21 |
이종근, '전주MBC 반갑습니다' 18일 방송 출연 (1) | 2025.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