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간납대(諫納臺)와 낙수정(樂壽亭)
간납대
전주 한옥마을 인근 간납대(諫納臺) 마을 자투리땅이 초화류와 수목이 어우러진 멋진 정원과 쌈지 텃밭으로 탈바꿈된다.
한옥마을 자만동은 기린봉과 중바위를 양 어깨로 하고 북두칠성(완산칠봉)을 향해 긴 목(발산, 조선조 이왕가가 일어난 산이라고 해서 발이산으로 부름)을 빼어 머리 숙여 거북이에게 북두칠성(만유의 근본, 풍수는 옥황상제라고 함)에게 얼마나 주고 싶은 게 많았겠냐는 이야기가 전한다.
거북이는 양 어깨, 목덜미 부분을 의미하는 만큼 후백제 견훤왕성이 자리한 곳이며, 목 왼편이 자만동으로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이안사)의 태생지이며, 조선의 개국 공신 최담이 말년에 후학을 가르친 곳이며, 명필 이삼만이 공부한 곳이다.
그리고 목 오른편(자만동의 발산 너머 반대편)이 간납대(현 천주교 전주교구청에서 군경묘지까지)로
부성팔현(府城八賢)의 두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전주 한산(韓山) 이씨 가문에서 무인세족
(武人世族)이 있었는데 이들은 속칭 병사터라고 한 경기전 동쪽 길 건너 전 전주경찰서 자리에 모여 살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기발은 형인 이흥발과 함께 청주에 진주하여 남하하는 호병(胡兵) 아홉 급(級)을 목 베고 남한산성을 사십리 거리에서 바라보며 달려가 던 중 강화(降和)한 소식을 듣고 비분방개 한 끝에 의병을 해산했다.
이듬해 벼슬을 그만둔 그는 고향에 돌아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 높은 돈대로 올라 북쪽을 요배(搖拜)했다.
그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때로는 적취정(績翠亭) 골짜기(구 영생학교에서 국군묘지 사이로 속칭 낙수정골)에서 방황하고 애국충정으로 제자를 길러내면서 우울한 일생을 보냈다.
'간납대'는 부성팔현(府城八賢) 가운데 조선시대 인조때 사간(司諫) 이흥발(李興潑)과 헌납(獻納) 이기발(李起潑)형제가 병자호란 이후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고 해서 사간(司諫)의 ‘간(諫)’자와 헌납(獻納)의 ‘납(納)’자를 따서 '간납대(諫納臺)'라 했다고 한다.
'부성팔현(府城八賢)'은 홍남립을 비롯 이흥발·기발·생발 삼형제, 전의(全義) 이씨인 이홍록·후선·순선, 그리고 송상주로, 팔과정 터에서 배출한 선비를 말한다.
'팔과정(八科亭)'은 17세기에 이곳에 살았던 선비 송사심(송면)의 제자 8명이 줄줄이 과거에 급제하자 이를 기념하여 지은 정자이고, 신복리는 당시에 이 지역에서 가장 번창하였던 마을이었다.
이들 형제가 고향 전주에 돌아와 살았던 곳은 기린봉 아래의 적취정(積翠亭) 골짜기이다. 이는 구 영생고등학교에서 국군묘지에 이르는 곳이다.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74∼1957)선생은 '차적취정운(次積翠亭韻)'이란 시를,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1877~1960)선생은 '등적취정(登積翠亭)'이란 시를 각각 남겼다.
지금은 적취정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분명히 남아있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1872년 채색 지도를 보면 왼편에 성황사와 적취정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산 중턱에 올라 당시의 어지러운 시사를 개탄하고 산중턱에 올라 당시의 어지러운 시사(時事)를 개탄하고 때로는 한운야학(閑雲野鶴)과 같이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한 때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지낸 까닭에 '간(諫)'과 '납(納)'의 두 자를 따서 간납대라고 했다.
'간납대'는 전주시장을 지냈던 이주상 씨의 부친인 이석한 씨의 소유였다고 한다.
남문교회 강홍모 장로는 전라선 철도로 인해 시내와 단절되어 쓸모없는 산으로 보이는 이곳에 이석한 씨의 협조로 영생학원 인가를 얻었다.
신동아학원은 공업전문대학을 전주대 옆으로 이전하고, 간납대를 처분했으며 현재 천주교 전주교구청이 들어왔다.
향토학자 고 이철수선생의 ‘완산승경’이란 책자를 보면 32경 가운데 '간납자규(諫納子規)'가 있다.
이는 ‘간납대에서 들려오는 두견이 울음소리’를 말한다.
나를 애무하는 바람에 대잎마다 달이 뜬다. 이승에서 못다 푼 맺힌 한, 두견새 되어 대숲 끼고 간납대 동천(洞天)을 따라 울부짖는다.
낙수정
낙수정(樂壽亭)은 향교골 동쪽에 있는 정자 터로 전하지만 지금은 정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낙수정 국군묘지가 현판이 한문으로 적혀있어 낙수정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낙수정은 동고산성 성황사에 물줄기가 발현하여 이곳에 와서 물이 응집되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이 지역에서도 많은 콩나물을 예전에는 재배했다고 전한다.
남노촌 안쪽에 자리잡은 낙수정은 예전에 몇몇 가호들만이 있었던 아주 작은 동네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범종이 발견되어 전 낙수정 동종이라 하여 보물 제1325호로 지정되어 국집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범종은 일본인 다까하라 히미꼬 여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 오던 중 1999년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기증·반환한 것으로,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의 훼손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곳 지형은 발이산을 두고 남쪽으로 자만동과 옥류동이 자리하고 반대편 낙수정과 간납대가 있다. 이곳은 동고산성을 가는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낙수정이라고 하면 군경묘지를 떠올린다. 6.25전쟁 때 희생된 국군의 영령들을 모신 묘지다.
전주에서 가장 동쪽 기린봉과 치명자산(승암산) 사이로 뻗어 내린 맥이 멈춘 언덕배기에 조성되어 있어 풍수지리로도 명당이라고 할 만하다. 어쩌면 이 영령들이 전주시를 굽어보며 전주를 지켜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국군전몰장병들만 안장하는 국군묘지였는데, 그 뒤 경찰묘역을 증설하여 군경묘지가 됐다.
안타까운 것은 1960년대 만해도 현충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참배하여 헌화도 했었는데 요즈음은 참배객도 없고 헌화도 거의 없어 쓸쓸하기 짝이없다.
인근에는 폐광된 광산이 있다. 입구는 철문으로 잠겨져 있었다. 폐광된 이 굴은 6.25 때 부역한 사람들이 수복 후에 겁에 질려 폐광된 굴속으로 숨어들었다. 경찰은 자수하라 권고했지만 나오지 않자 굴 입구에 불을 놓아 많은 사람이 질식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낙수정마을은 6.25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모여 건축물을 지으면서 형성된 주거지로, 30년 이상 노후주택 비율이 전체의 약 89%를 차지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전체 거주자의 18%에 달하는 등 주거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이다.
기초생활 인프라가 부족한 낙수정마을은 이주민이 급증하면서 마을 곳곳에 공·폐가가 급증하고, 노령인구 및 저소득층이 주변 지역보다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마을이 점차 활기를 잃고 있다.
기마대 순경 집은 교회가 들어서 있어 보이지 않았으며, 공동 우물은 폐샘이 됐다.
슈퍼마켙에 들러 물어보았더니 기마대순경은 일찍 돌아가시고, 그 부인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에 전주시는 이 사업을 통해 낙수정마을 노후주거지 일원에 오는 2027년까지 국비 30억 원 등 43억 원을 투입해 노후주택 정비사업 등 마을 여건에 맞는 다양한 주민활동을 지원할 계획이다.
후백제의 다양한 흔적이 잠든 낙수정 마을을 대상으로 사업이 시작되면서 시는 전주 곳곳에 있는 후백제부터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을 한데 엮어 미래관광자원으로 육성하는 왕의궁원 프로젝트의 추진 동력을 얻게 됐다.
산사의 아침저녁으로 잔잔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국립전주박물관에 들어서면 이와 비슷하게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 왠지 경건한 자세로 관람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길게 울려 퍼지는 범종의 장엄하고도 청명한 소리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주며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참회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범(梵)은 신성(神聖), 청정(淸淨)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교 의식에 사용하는 종을 범종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지옥에 있는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아무런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가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한다.(극락정토, 極樂往生). 또, 불법의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의미도 있다.
보물 1325호 이 범종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부호 박영근이 낙수정(樂壽亭, 현재 전주시 완산구 교동)을 수리하다가 발견된 것이다.
낙수정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동종이 발견된 곳에서 1909년 개원사(開元寺)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됐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에 개원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이고, 동종은 절에 걸려있던 것이리라.
어느 시기에 개원사는 폐사되고 동종은 종을 매다는 부분이 깨어져 땅속에 묻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 자리에 조선시대 낙수정이라는 정자가 들어섰던 것이라고 한다.
이 종이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된 연유는 바로 전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즉 종을 처음 조사한 마츠오카 히토시(松岡史)의 조사 내용에 의하면 사이토 총독이 일본 수성원(水城院) 주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이 종이 전주의 박영근 소유의 낙수정(樂壽亭)이란 정자의 나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편지에는 종이 발견된 장소에서 메이지(明治) 42년(1909) 음력 3월 15일에 순화(淳化) 2년(991) 개원사(開元寺)란 명문 기와가 출토된 기록도 보이고 있다.
최소 이 종은 같은 해나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출토된 사실과 명문 기와를 통해 이 곳이 고려시대 초기 사찰지로 추정되지만 어디까지 편지의 내용인 점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이 종은 당시 일본 총독 사이토오 마코도(齊藤實)에게 기증,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이 범종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오던 다카하라 히미코(高原日美子)씨가 1999년 한국에 기증하면서 70여 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는데 의미가 있다.
박영근의 묘는 자만동 맨위 산 정상에 있으며, 손수쓴 자서비 등이 남아있으며, 밀양박씨의 후손이다.
'조선신사보감'에 따르면 박영근은 1872년생으로, 전주 대화정(大和町) 즉 지금 전주 웨딩거리로 유명한 곳에서 거주했던 인물이다.
박영근은 주식회사 전주농공은행장을 역임하고, 전주여자잠업전습소장으로 근무하는 등 전주지역 친일 인물이었다. 박한상(朴漢庠)은 박영근의 아버지였다.
낙수정 동종은 처음 알려질 때엔 고려 범종으로 학계에 보고됐다.
이 동종은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중심으로 4명의 비천상이 구름 위에 꿇어 앉아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하고 있다.
이 범종은 문양 및 배치가 고려 범종의 요소인데 비해, 형태는 통일신라 범종과 비슷하다.
또. 범종의 시료분석 결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鐘, 725년)의 성분비와 같음이 밝혀져, 맑고 장엄한 소리를 내기 위한 전대(前代)의 전통 제작 방법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이 범종은 신라 말~고려 초 범종의 양식 변천과 제작 방법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님과 동시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원래의 낙수정 터는 낙수정마을에서 보석사로 들어가는 길목 산 언저리에 있었다고 한다.
낙수정 마을 앞쪽으로 해방 무렵에 피난민들이 정착한 농원 마을이 있었다. 이같은 농원마을은 인후동에도 자리했다.
하지만 낙수정의 정확한 유래와 자료는 없다. 낙수정(樂壽亭)이란 이름엔 '즐겁게 살면 천수를 누릴 것'이란 한자 뜻풀이가 가능해 전주 사람들의 긍정적 삶을 떠올릴 수 있다.
ㅡㅡㅡ
*페친 한인석님이 소개해달라고 댓글달아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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