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은 ‘밥+반찬’이라는 한식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한국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음식이다.
1921년 4월 “관화시절의 단속, 꽃 때가 되어 사람의 왕래도 차차 많아짐에 따라 경찰관도 많이 출동하야 통행 등을 단속하고, 구호반을 설치하여 부상한 사람이 있을 때 속히 구호하며, 맥주, 사이다 등 음료 및 음식 값을 엄중히 단속한다는데, 물가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맥주 한 병 칠십오 전, 사이다 한 병 삼십 전, 일본식비빔밥 일인분 오십 전, 점심 상등 일 원 보통 칠십 전”이란 신문기사를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1930년 우리 비빔밥의 가격은 10~15전 내외였다. 1931년 5월 윤백남이란 사람이 전주 대정여관에 하루를 묵고 말로만 듣던 전주비빔밥을 먹는다. 그의 평은 "무엇이 좋아서 전주비빔밥, 전주비빔밥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라며 솔직한 소감을 기록했는데, 당시에도 전주비빔밥은 꽤 유명했던 모양이다. 그는 며칠 후 상주에 도착하는데, 서울과 흡사한 비빔밥을 먹을 수 있었다며, 상주 음식에 홀렸다고 단가를 한가락 지어 기록했다.
홍윤성(1425∼1475)은 세조의 신임을 배경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 그의 집에 도둑이 들 뻔했다. 포도청조차 집 근처에 얼씬 거리지 못하는 점을 노렸다. 홍윤성 집 근처를 순찰하던 포도부장 전임(田霖, ?∼1509년)이 이들을 잡아 홍윤성에게 넘겼다. 홍윤성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뜰에 내려와 그의 손을 붙잡아 끌어 올리면서 '이런 좋은 사람을 어찌 이제야 알게 되었는가. 자네 술은 얼마나 마시며 밥은 얼마나 먹는가'라고 물었다. 전임이 대답하기를 '오직 공께서 명하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하니 곧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혼돈반(混沌飯)같이 만들고 술 세 병들이나 되는 한 잔을 대접하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단숨에 그 술을 들이켰다" 여기서 혼돈반이 바로 비빔밥이다. 채소와 생선을 밥에 섞어 먹는 것을 박동량이 살던 시대에 유행하던 혼돈반에 비교했던 것이다.
이는 '기재잡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원문에는 ‘비빔밥’을 ‘混沌飯(혼돈반)’이라고 표기했다. “민간에서 말하는 이른바 ‘혼돈반’같이(如俗所謂混沌飯, 여속소위혼돈반)”라는 표현이다. 혼돈반은 ‘뒤섞은 밥’이다.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라고 했다. 혼돈반은 비빔밥이다.
전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위의 내용은 전임이 갓 벼슬살이를 했을 때의 이야기다. 전임은 1482년(성종 13년) 전주판관이 됐다.
조선왕조실록에 '전주 판관 전임의 재주에 대해 의논하고 다음 정사에 거론케 하다(태백산사고본, 성종실록 169권, 성종 15년 8월 22일 병자 2번째기사 1484년 명 성화(成化) 20년)'는 기록이 보인다.
"전주 판관(全州判官) 전임(田霖)은 사람들이 다 그 재주가 쓸 만하다 하므로 내가 시험하려 하는데, 지금은 농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바로 갈 수 없으니, 가을이 되거든 직임을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자,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전임의 사람됨은 무예(武藝)와 이재(吏才, 관리로서의 재간)를 모두 갖추었고 학문도 넉넉합니다. 또 듣건대 범을 잘 쏘므로 경내(境內)에는 고약한 짐승이 다니지 못하며, 부윤(府尹) 이봉(李封)도 어진 재상(宰相)이므로 두 사람이 서로 의기가 맞아서 자못 다스린 보람이 있다 합니다. 전임은 나이가 적지 않으니, 제때에 기용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다음 정사(政事)때에 다시 아뢰라" 했다.
15세기 후반 고위직 벼슬살이를 했으니, 위 내용의 시기는 15세기 중반 무렵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전임의 혼돈반’은 명나라 동기창의 ‘골동’보다 100년 이상 앞선다. 한반도의 비빔밥은 중국 측 기록에 앞서 오래 전부터 있었다. 문서상의 한자 표기가 ‘骨董飯, 골동반’이었을 뿐이다.
비빔밥의 다른 이름은 ‘혼돈반(混沌飯)’이다. ‘혼돈스러운 밥’이다.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혼돈반’과 같이 만들어 내놓으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웠다'
조선 중기 문신 박동량(1569∼1635)이 쓴 ‘기재잡기’의 내용이다. 엄청난 양의 ‘밥=혼돈반’을 먹어 치운 주인공은 조선 전기의 무관 전임(?∼1509)이다. 그가 먹은 것은 밥에 생선과 채소를 넣은 것이다.
“전임(田霖, ?∼1509년, 중종 4년)이 대답하기를, ‘오직 공께서 명하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하니, 곧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비빔밥과 같이 만들고 술 세 병들이나 되는 한 잔을 대접하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단숨에 그 술을 들이켰다.”
조선 인조 때 박동량이 기술한 <기재잡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원문에는 ‘비빔밥’을 ‘混沌飯(혼돈반)’이라고 표기했다. “민간에서 말하는 이른바 ‘혼돈반’같이(如俗所謂混沌飯, 여속소위혼돈반)”라는 표현이다. 혼돈반은 ‘뒤섞은 밥’이다.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라고 했다. 혼돈반은 비빔밥이다.
전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위의 내용은 전임이 갓 벼슬살이를 했을 때의 이야기다. 전임은 1482년(성종 13년) 전주판관이 되었다. 15세기 후반 고위직 벼슬살이를 했으니 위 내용의 시기는 15세기 중반 무렵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전임의 혼돈반’은 명나라 동기창의 ‘골동’보다 100년 이상 앞선다.
‘혼돈반=비빔밥’이다. ‘혼돈’은 뒤섞여 어지러운 상태다. 혼란, ‘골동(骨董)’과도 비슷하다. ‘혼돈반’이란 표현은 ‘기재잡기’의 시대인 17세기 초반에 사용했다. 비빔밥은 그 이전인 전임의 시대, 15세기에도 있었다.
우리 문헌에서 비빔밥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0년대에 나온 한글 필사본 '시의전서'에서다. 또 요즘처럼 고추장이 들어간 비빔밥 요리법은 잡지 ‘별건곤’(1929년 12월 1일자)에 나온다. 재미난 사실도 있다.
전주의 시장에서 간단하게 팔기 시작한 전주비빔밥이 전국적 명성을 얻은 것은 1980년대 이후 ‘향토음식전’ 같은 지역음식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면서부터다. 대표적 사건이 전두환 정부가 주도한 ‘국풍81’ 축제였다.
비빔밥은 밥과 반찬을 한 그릇에 담아서 양념에 비벼 먹는 간단한 음식으로, 손쉽게 만들 수 있고 간단히 먹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전국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음식이었다. 그러므로 지역별 · 재료별로 매우 다양한 비빔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전주하면 비빔밥, 비빔밥하면 전주’라 할 정도로 전주의 비빔밥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진주의 향토사학자 故 김상조 선생은 전주의 비빔밥을 부뷤밥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원래 진주비빔밥은 가마솥에 밥을 할 때 한 물 넘으면 콩나물을 넣고 뜸을 드려 이미 가마솥에서 콩나물과 함께 섞기 때문에 비빔밥이 아니라 부뷤밥이라고 주장 한다.
여기서 1968년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전주비빔밥 조리법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쇠머리를 푹 끓여서 굳은 기름은 걷어 버리고 쌀을 넣고 밥을 고슬하게 짓는데, 밥이 한 물 넘으면 콩나물을 넣고 뜸을 들인 후 더울 때 참기름으로 무친다.
숙주, 미나리는 각각 데쳐서 참기름과 묽은 장(청장)으로 무친다. 도라지는 소금에 절여 주물러서 다시 헹구어 짜서 볶고 고사리도 삶아서 기름장으로 무쳐 볶는다.
우둔고기는 채 썰어 양념장으로 육회를 무친다. 청포묵은 굵게 치고 계란은 황백으로 지단을 부쳐 란면(卵麵)으로 썬다. 밥을 조반기에 담고 각색 재료를 색 맞추어 덮어 얹고 엿고추장은 종지에 따로 곁들인다.
전주비빔밥에는 반드시 콩나물국이 따라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혹자들은 전주비빔밥이 궁중의 음식이나 섣달그믐날 먹는 음식, 제삿집 비빔밥으로 그 유래를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최승범(崔勝範)의
'난연기(蘭緣記)'에 전주비빔밥의 유래가 잘 묘사돼 있다.
“산과 들 바다가 고루 갖추어진 전라도의 음식은 세 곳에서 나는 것을 모은 것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농번기에 농가의 아낙네는 들에 밥을 이고 갈 때 버들고리나 광주리 밥동구리를 모두 동원하여 찬 접시를 담고 나가려 하나 어찌 나를 수 있으랴, 그래서 생각한 것은 큰 옹배기 같은 그릇에 밥을 담고 찬을 그 위에 열열히 담고 고추장 한 그릇 담고 숟가락 챙겨 이고 나갈 때 논고랑 밭고랑을 쉽게 걸어가서 밭둑 논둑의 푸른 하늘아래 야외식탁이 펼쳐진 것이 비빔밥의 최첨단이고 보니 식단 합리화라”고 칭송한다.
최승범의 <난연기>을 보면 전주의 비빔밥은 농경문화에서 그 유래를 들수 있는 대목이지만, 이철수의 <전주야사>에서 “전주비빔밥은 조선조 때 감영(監營)내의 관찰사, 농약패의 판관 등이 입맛으로 즐겨왔었고 성(城)내외의 양가에서는 큰 잔치 때나 귀한 손님을 모실 때 외에는 입사치로 다루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오래 전부터 전주의 고관들이나 부유층에서 식도락으로 즐겼던 귀한 음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전주부성 향토세서기’ 중 2, 3, 4월경에 기호음식으로 비빔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전주에서는 200여 년 전부터 이미 비빔밥을 즐겨먹었음을 알 수 있다.
전래 과정에서 그 역사․지리적 환경과 관련 지어 볼 때 전주에서 특히 잘 발달한 이유로는 풍부한 식재료(전주10미)와 부녀자의 음식 솜씨 등으로 인해 오늘날의 ‘전주비빔밥’이 탄생하였다고 사료된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 3대 음식 운운하는 것을 좋아 하지만, 그 단초는 조선 후기 실학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일제 때 지식인 호암 문일평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平壤之紺紅露、冷麪、骨蕫飯 평양의 감홍로, 냉면, 골동반이 유명하다는 문장이다’이라 기록돼 있는데, 이 책에는 전주도 언급된다. 생강과 달래가 유명하단 기록은 있어도 비빔밥이 유명하다는 말은 없다.
문일평의 <조선인과 음식물>이라는 책에서는 ‘매식 가운데 개성 탕반과 평양냉면, 그리고 전주의 골동반이 지방도시의 대표적인 명식물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규경과 문일평의 표현이 돌고 돌고 돌아서 조선시대 3대 음식으로 유명한 것은 ‘개성 탕반’ ‘평양냉면’ ‘전주비빔밥’이 된 것이다. 결국 공인된 것도 아니고, 확대 재생산 된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동시대의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우리나라 지방 명식물로 전주에는 콩나물을, 그리고 비빔밥은 전주가 아닌 진주를 들고 있다. 전주지역 관광청에서는 진주, 해주, 전주를 들고 있고, 여기에 안동과 평양 등지도 추가할 수 있다. 결국 일제시대 까지도 전주는 비빔밥이 유명한 여러 지역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실제로 전주비빔밥 외에도 평양·해주·진주 등 비빔밥 등이 유명했다. 일제강점기에 전주 지역에서는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간단한 한 끼 음식인 비빔밥이 큰 인기를 모았다. 전주가 고향인 시인 조병희는 저서 '완산고을의 맥박'에서 “음식점에 들르게 되면 건장한 일꾼이 커다란 양푼을 손에 받쳐들고 옥쥔 숟가락 두어 개로 비빔밥을 비벼대는데 흥이 나면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빙빙 돌리던 양푼이 허공에 빙빙 돌다가 다시 손으로 받쳐들고 비벼대는 솜씨는 남밖장만이 가지고 있는 정경이랄까?”라고 하여 당시 남부시장 일대에서 비빔밥을 만들어 판매하던 정경을 회고하였다. 이처럼 전주 남부시장식 비빔밥은 숟가락으로 빙빙 돌려 가며 밥을 비빈다 하여 ‘뱅뱅이 비빔밥’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시장음식으로 출발한 전주비빔밥이 외식업에 본격 편입된 것은 1950년대 초에 이분례가 옛 전북도청 인근에서 장사를 시작하면서였다. 6·25전쟁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 이분례는 ‘한국떡집’이라는 떡집을 차렸다. 그러나 떡이 기대만큼 잘 팔리지 않자 인근 공무원과 회사원을 상대로 점심 장사를 시작했다. 이때 개발한 메뉴가 비빔밥이었다. 이 비빔밥은 남부시장식 ‘뱅뱅이 비빔밥’에서 착상했지만 시장비빔밥과의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도라지, 쑥부쟁이, 꽃버섯 같은 특별한 재료를 넣고 그 위에 쇠고기육회를 올리는 방식으로 비빔밥을 좀 더 고급화했다. 이분례의 비빔밥이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주변 식당들이 메뉴에 비빔밥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60~1970년대 옛 전북도청 인근에는 비빔밥 전문식당이 늘어선 비빔밥 골목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들 식당 중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조리법을 개발한 집들이 있었다. 어느 집은 고추장 양념에 밥·콩나물·참기름을 넣어 밥을 미리 볶은 후 그 위에 고명을 얹어내고 또 어떤 곳은 비빔밥에 잣·은행·밤·대추 같은 영양식 재료를 추가하기도 했다. 또 다른 식당은 아예 사골육수를 넣어 밥을 짓기도 했다. 이처럼 1960년대 전주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던 비빔밥은 1970년대 무렵 서울로 진출하게 된다. 당시 백화점은 매상을 올리기 위한 새로운 판매 전략으로 '팔도민속전'을 기획하면서 전주 지역 명물로 비빔밥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지역사회에서는 원래 ‘콩나물비빔밥’으로 불리던 비빔밥이 전주라는 지역명과 결합하여 ‘전주비빔밥’이 되었다.
시장음식이던 비빔밥이 전문음식점에서 판매하는 비빔밥 형태로 재구성된 것은 195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여러 식당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형태 면에서의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식당마다 고유한 조리법을 보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주비빔밥 조리법을 한 가지로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전주비빔밥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다만 쥐눈이콩으로 재배한 콩나물이나 청포묵(황포묵) 등과 같이 전주 지역 고유의 식재료를 활용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전주비빔밥을 외국에 알린 주인공은 2002년 월드컵경기가 있는 해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먹고 원더풀을 외친 마이클 잭슨이다. 그 이후 전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전주비빔밥은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잡았다.
미국 뉴욕에 전주비빔밥 식당이 문을 열고 영업을 하는가 하면 항공기 기내식으로 제공되고 있고 최근에는 한겨울에도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게 조리돼 우주식으로 제공된 바 있다.
더욱이 정부의 한식 세계화 사업에 의해 미국, 스위스, 헝가리, 프랑스, 일본, 중국 등에 진출해 비빔밥의 비빔 시연을 하고 외국인들에게 무료시식의 체험 행사를 열 정도로 전주비빔밥은 불고기, 김치 등과 함께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식문화를 알리는 첨병이다.
연간 50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전주. 전주를 찾은 관광객이 먹거리로 찾는 비빔밥. 일부러 비빔밥을 먹어보기 위해 전주를 찾을 정도로 전주비빔밥은 전주의 경제를 견인하는, 빼놓을 수 없는 관광요소가 됐다. 왜 관광객들은 외국인들은 전주비빔밥에 매료된 것일까?
#비빔밥은 전주만의 것은 아니었다
비빔밥은 전주만의 것이 아닌 전국적인 음식이다. 지역별로 여러 형태의 비빔밥을 먹는데, 전주시 문화경제국 한스타일관광과 최행자 한식팀장에 따르면 비빔밥은 양반세력가들이 번성하고 식재료가 풍부한 지역에서 각 지방마다의 특산 농산물의 사용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는데 특히 전주, 진주, 해주에서 독특한 식재료가 곁들여지는 국물이 독특한 향토명울 음식을 발전했다고 말했다.
진주비빔밥은 화반(花飯)이라 하는데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해초나물과 해불보탕국을 한 국자 얹고 소고기 생육회를 듬뿍 얹어낸다. 국물은 선지국을 쓴다.
안동 비빔밥은 헛제사밥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제사음식이 아니고 가상하여 만든 것이라 헛 제사밥이라 했다고 한다. 파, 마늘, 고추장을 쓰지 않고 간장(청장)으로 맛을 낸다. 국물은 탕국을 쓴다. 산적을 곁들이는 것이 특징이다.
해주비빔밥은 해동죽지에 시로 소개되고 있는데 교방 또는 짠지밥이라고 해서 유명했다. 황해도 짠지는 김치를 말하는 것으로 겨울철 김장김치를 잘게 썰어 솥에 기름을 두르고 펴놓은 다음 쌀을 얹어 밥을 지어 양념간장에 비벼 먹었다. 여기에 돼지고기를 넣거나 연하고 살진 콩나물과 함께 넣었다. 국물은 무국을 쓴다.
전주비빔밥은 밥을 지을 때 소고기 육수를 쓰고 뜸을 들일 때 콩나물을 넣어서 콩나물밥을 지어 갖은 나물로 탐스럽게 담아내고 황포묵과 육회, 오실과로 멋을 낸다. 곁들이는 국물로는 콩나물국을 쓴다.
이렇게 지역별 비빔밥은 명성이 있는데 현대에 와서 전주비빔밥이 그 중 으뜸으로 손꼽혔고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음식의 재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주를 찾은 사람은 물론 전주 인근을 지나는 사람들조차 일부러 전주로 차머리를 돌려 전주비빔밥을 먹고 갈 정도로 전주비빔밥은 전주의 무엇을 보기 위해 들렀다가 먹거리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비빔밥을 먹기 위해 전주를 찾는 먹거리 관광상품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전주경제를 견인하는 중요한 요소인 전주비빔밥의 영향력이 새삼 부러울 따름이다.
이름난 비빔밥 집은 점심 때, 저녁 때 구분 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어온다. 큰 식당은 하루 500명도 찾을 정도라고 하니 속리산 식당의 하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크다.
속리산에 들르거나 보은을 지나는 사람들이 일부러 차머리를 속리산으로 돌려 속리산 산채비빔밥, 속리산 버섯전골을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음식을 먹는 관광객들의 모습만 보이는 것이 속리산의 현실이다.
그럼 왜 전주는 속리산과 전혀 다른 모습이 보이는 걸까?
#최상의 재료로, 만드는 법 거의 동일
전주비빔밥의 재료는 30여 가지나 된다. 이중 특히 전주비빔밥의 풍미에 중요한 작용을 하는 재료는 콩나물, 황포묵, 고추장, 쇠고기 육회, 접장 등이다.
특히 황포묵은 녹두로 만든 것인데 치자 물을 들여서 색이 노랗게 들인 것을 말한다. 치자 물을 들이지 않은 것은 청포묵이라고 하는데 황포묵은 전주 8미의 하나다.
또 비빔밥을 비비는데 사용하는 고추장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엿기름을 삭혀서 찹쌀과 고춧가루를 혼합 숙성시켜 만든 것으로 3년 묵은 고추장을 써야 제맛이 난다고 한다.
또 5년이상된 간장을 접장아라고 하는데 구수한 맛이 난다고 한다. 나물을 무치는데 3년이상된 간장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밥을 지을 때 그냥 맹물이 아니라 소고기를 삶아낸 육수를 사용하는 것이 전주비빔밥의 특징 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밥을 해놓아도 밥알이 하나하나 살아있고 또 밥을 비빌 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젓가락 사용함으로써 밥이 찰떡처럼 붙지 않는다. 참 과학적인 방법인 것이다.
이렇게 밥을 지어 유기나 돌솥에 담는 전주비빔밥은 30여가지의 재료가 들어가는데 밥 위에 얹은 고명은 음양오행, 오방위, 오색, 오실과를 맞춰 맛과 멋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밥이 곧 약’(食醫同原)이라는 사상과 음양오행의 철학을 바탕으로 발달해왔는데 오행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음식이 바로 전주비빔밥이다.
그것은 바로 오색고명으로 나타나는데 유기에 고슬고슬 지은 밥 위에 올린 선홍빛 육회, 아삭한 콩나물, 치자물들인 황포묵, 얌전하게 부친 황백지단(동-청색, 서-백색, 남-주황색, 북-검정색, 중-노란색)으로 우주의 이치를 담고 밤, 은행, 대추, 호두, 잣에 이르는 오실과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입의 사치를 돋운다.
전주비빔밥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오행, 오방위, 오색을 맞춘 그야말로 스토리가 있는 음식인 것이다. 음식 하나에도 이같이 만물이 이치, 자연의 섭리까지 표현한 것이다.
최상의 재료를 이용해 음식의 궁합, 그리고 한국인의 정서까지 고려한 맛의 잔치 전주비빔밥이 명성을 얻을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딸에 이어 외손녀까지 3대에 비빔밥을 전수시키고 있는 전주비빔밥 명인인 김년임(75) 명인이 운영하는 가족회관은 1979년 개업했는데 김장 배추 1만포기, 고춧가루 3톤을 쓸 정도로 손님을 많이 치르는 곳이다.
김 명인은 주방에서 손님에게 음식이 나가기 전 최종 점검하는데 “가격이 아무리 비싸도 들깨와 참깨를 직접 구입해 기름을 짜고 순창에서 나는 고추를 구입해 고추장을 담가 사용하고 있다"며 “가격보다는 내 집을 찾은 손님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놓기 위해 365일 그것만 머릿속에 넣고 있고 또 전주비빔밥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수 십 년에 걸쳐 쌓인 것이기 때문에 전 세계인이 먹는 최고의 비빔밥을 만든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1952년 전주비빔밥이란 것을 최초로 시작한 친정어머니 고 이분례님으로 부터 물려받아 현재 딸에게 전수 중인 주순옥씨 식당은 지난 2011년에는 미슐랭그린가이드 한국편에 전북 최초로 선정된 식당이기도 하다.
주순옥 여사는 “우리집 비빔밥의 비법은 향을 살리는 것"이라며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비빔밥 재료의 고유의 맛과 재료의 향, 그리고 색감을 살리기 위해 달걀후라이 대신 각각 노른자와 흰자 지단을 부쳐 올리는 것이 특징"이라며 가장 오래된 집이지만 고유의 맛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나름의 비법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
#비빔밥 산업화 위한 행정의 노력
이같이 민간에서 시작해 비빔밥집들이 누대에 걸쳐 비빔밥의 역사를 쓰고 있는 동안 행정의 뒷받침은 비빔밥의 전국화를 넘어 세계화에 날개를 달아줬다.
전주시는 전통장(간장, 고추장, 된장) 숙수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비빔밥명인, 명소 발굴 육성 및 조례를 제정하고 외국인의 기호에 맞는 메뉴 및 조리 표준화. 국제적인 행사에 비빔 이벤트 및 세계화사업을 추진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기념 2002인분 비빔밥은 기네스북에 등록됐으며 일본 오또나 국제전시장 1200명분, 뉴욕, 모스크바, 스페인, 중국 등에서 전주비빔밥 비빔 이벤트, 서울 국제음식산업박람회 비빔행사 등 홍보 및 세계화를 위한 행사가 200여회나 된다.
전주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주비빔밥 캐릭터 및 우리민속문화연구소를 통해 음식 명인의 구술 생애사 채록작업, 음식업소의 역사문화 뿌리찾기 등 스토리를 개발했고 전주비빔밥 지리적 표시제 표장을 등록하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일본 등 국제 상표권 특허등록 및 미국, 일본, 유럽 등 10개국 수출 및 프랜차이즈 가맹점도 개설했다.
또 식자재를 공급하는 완주군과 순창군까지 아우르는 전주비빔밥 연구센터를 운영하며 비빔밥 가공저장 기술 및 포장기술을 개발하고 체질별 맞춤형 고기능성 비빔밥을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리고 관심을 끄는 전주비빔밥 축제를 2008년부터 매년 10월 개최하며 맛의 고장 전주를 확인하는 음식 큰잔치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같이 전주라는 도시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주목받는데 비빔밥이 큰 역할을 하는 것 처럼 음식, 먹거리는 특별히 볼거리가 없어도 관광객을 유인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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