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전과
전국에 생강을 재배한 곳이 적지 않았지만, 조선시대에 생강으로 유명했던 지역은 전주(全州)였다.
조선시대의 미식가로 손꼽히는 허균(許筠: 1569-1618)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현재로 치면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나는 생강[薑]이 좋으며, 그 다음은 전라남도의 담양(潭陽)과 창평(昌平)에서 생산되는 생강이 좋다고 평하였다. 이익(李瀷: 1681-1763)도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생강은 전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데, 당시 조선 전역에서 쓰는 생강은 모두 전주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에도 전주는 생강 밭이 우리나라에서 첫째간다고 하였다. 이렇게 생강으로 유명한 전주에 조선 정조(正祖) 대의 문필가인 이옥(李鈺: 1760-1815)이 들른 적이 있다. 그는 천성적으로 생강이나 겨자같이 매운 것을 즐겼는데, 1795년 10월, 당시 조선 내 이름난 생강산지였던 전주의 동성(東城) 객점에 들러 생강을 먹었다고 한다. 이옥이 보니 그곳은 집집마다 생강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생강 밭이 아주 넓었다. 또한 손에 말[斗]를 들고 둥구미를 짊어진 사람들, 즉 상인들은 모두 생강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옥은 돈 세 푼을 꺼내 생강을 샀는데, 받고 보니 생강의 양이 서울의 열다섯 배는 족히 되었다. 주인이 후하게 주었나보다 생각하고, 너무 많이 주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더니, 주인 말이 올해는 다른 해에 비해 생강 수확량이 반밖에 되지 않지만 값은 그대로라고 답하였다. 이옥은 그렇게 산 생강을 껍질을 벗겨 생으로 거의 3분의 1을 먹었고, 그것을 본 객점의 주인은 이 손님이 생강을 참 좋아하는구나 하고 이옥의 밥상을 차릴 때 생강절임 한 접시를 올렸다고 한다. 상에 오른 생강절임의 맛을 보니 절일 때 넣은 소금의 짠맛 때문에 생강의 매운맛이 눌려 생강을 날로 먹는 것만 못했다는 이야기이다.(이옥, 2009: 322~323쪽) 17세기 말의 조리서로 추정되는 『주방문(酒方文)』에 나오듯이 생강절임은 깨끗이 다듬고 씻은 생강을 끓인 물과 소금에 먼저 절였다가 그 물을 버린 후 식초에 절여서 만들었다. 이밖에도 술지게미와 소금을 섞은 것에 생강을 절이는 방법 등이 여러 문헌에 전한다. 하지만 이옥이 생강절임을 먹고 술이나 식초의 향이 아니라 짠맛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무짠지를 만들 때처럼 소금물만 가지고 절인 생강절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생강이 유명해서인지 조선 후기 전주는 생강뿐만 아니라 생강으로 만든 생강정과도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전주의 봉상면(鳳翔面)에서 초가을에 나는 연한 생강으로 만드는 생강정과가 천하의 진미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기는 김교근(金敎根: 1766-?)이 전라도 관찰사였을 때라고 하니, 『순조실록(純祖實錄)』의 기사로 보건대 1815년 12월 초에서 1822년 11월 말 사이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순조 15년 12월 4일, 순조 22년 12월 2일 기사). 이때 순조(純祖: 재위 1800-1834)의 장인이자 안동 김씨 세도가였던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조카뻘 되는 김교근에게 생강정과를 보내라고 청하였다. 이에 김교근이 애써 생강정과를 달여서 보냈으나, 김조순은 너무 늦게 보냈다며 김교근을 야단쳤다. 나중에야 어느 아전이 먼저 생강정과를 올려 보냈다는 것을 들은 김교근은 크게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아전의 처세술에 탄복했다고 한다. ‘생강전과(生薑煎果)’라고도 했던 생강정과를 만드는 법은 비교적 간단한 편인데, 조선 전기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 ?-?)의 『산가요록(山家要錄)』에도 나온다. 이에 따르면, 생강을 얇고 납작하게 편을 내고 꿀과 섞어 노구솥[炉口]에 넣어 아주 연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졸인 후 다시 꿀을 섞어서 만든다고 하였다. 이러한 생강정과는 왕실의 잔치와 제사에도 쓰이던 음식이었는데, 궁중에서 직접 만들기도 했지만 전주에서도 생강정과를 진상하였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때였던 1892년(고종 29) 10월 13일 전주판관(全州判官) 민영승(閔泳昇: 1850-?)이 8전(殿)에 진상했던 물품 목록을 적은 「전라도 가도사 전주판관 민 진상 단자(全羅道假都事全州判官閔進上單子)」에도 생강정과(生薑正果) 1말[斗]이 들어있었다. 전주의 생강은 일제강점기에도 전주특산물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전주의 봉동면(鳳東面)에서 나는 생강은 ‘봉상생강(鳳翔生薑)’이라 불렀다. 봉동면은 당시 조선 제일의 생강생산지로서, 이곳 주민은 생강 생산을 주업으로 삼고 있었다.(<동아일보> 1927년 6월 11일, 1929년 2월 28일, 1931년 8월 28일자) 한편 전주에는 생강 줄기[薑莖]를 고추장에 박았다 꺼내 먹는 향토음식도 있었다.(<동아일보> 1931년 5월 24일자) 이 생강 줄기 장아찌를 만드는 방법은 생강 줄기를 한 묶음씩 묶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어 삭힌 다음, 생강줄기를 물에 넣고 섬유질이 분해될 때까지 곱게 찧는다. 이것을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씻은 후, 물기를 꼭 짜서 한 주먹씩 뭉쳐서 그늘에 말린다. 잘 말린 생강 줄기를 고추장항아리 속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가,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묵힌 뒤에 꺼내어 갖은 양념을 하여 먹는다.(농촌진흥청, 2008: 206쪽) 전주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도 생강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보니, 전라북도에서는 생강 이외에도 생강 줄기를 활용한 음식까지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전주 사람들의 생강 심는 법은 어땠을까.
‘전주 사람들의 생강 심는 법: 가을이나 겨울에 밭을 갈아 준다. 2~3월에 서리가 그치고 언 땅이 풀리면 소똥이나 발품 또는 무엇으로 두게 자를 준다. 이어서 몇 차례에 걸쳐 받을 갈아 있는다. 깨진 기왓장이나 자갈 등을 골라 내어, 혹은 매우 잘고 기름지게 한다. 그런 다음 완전히 싱싱하면서 껍질이 손상되지 않은 생강종자를 가져다 종자마다 2~3조각으로 쪼개 심는다. 포기의 간격은 0.6~0.7척으로 한다. 이어 0.2척 두께로 흙을 덮어 준다. 떡갈나무의 잎이 한창 나올 무렵이 되면 잘고 연한 가지와 잎을 꺾어다가 생강을 심어 놓은 휴전에 덮어 준다. 생강싹이 돋아 나고 떡갈나무의 잎이 거뭇거뭇 썩으면 나뭇가지를 모두 걷어 낸다. 날이 가물면 물을 주고, 잡초가 나면 김매 준다.(행포지)’
예로부터 청옥채(靑玉菜)는 무주(茂朱) 구천동에서 나는 것을 최고로 쳐주었다.
‘청옥채(靑玉菜)는 호남에서 난다. 무주(茂朱) 구천동에는 2~3월이면 싹이 난다. 키가 1척 이상 되면 줄기가 청색을 띠고 둥글게된다. 잎은 여리면서 주먹을 쥔 모양이 부드러운 고사리와 유사하다. 데쳐서 나물로 먹으면 맑고 향기로우며 달고 연하기 때문에 씹어도 입술과 이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산나물 가운데 아주 훌륭한 식품이다. 그줄기가 옅은 자색을 띠는 것은 '자옥채(紫玉菜)’라 한다. 청옥채는 산나물의 하나로 추정된다. 규합총서와 송남잡지 등에 명칭이 보인다.(금화경독기)’
《임원경제지 관휴지》 (전 2권, 총 703쪽, 각권 3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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