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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고부태수 오천유로부터 기생과 술 한 병, 산 꿩을 받은 이규보

고부태수 오천유로부터 기생과 술 한 병, 산 꿩을 받은 이규보

'주량은 비록 그대에 못미치지만/술 즐기며 속소의 가는 허리를 탐하네.(嗜酒仍貪束素腰)/유독 동년만이 나의 뜻을 알아/한 병 술과 옥같은 미인을 보냈도다.//웅주(雄州)의 엽사 기개 몹시도 호협하여/허리에 찬 화살 뽑아 꿩을 쏘아 맞혔네(射落靑鞦箭脫腰)/언덕배기 갈 것 없이 앉은 채 뜻을 이루었우니/무엇 때문에 구태여 웃고 아양부리게 하네//('동국이상국전집' 제17집)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사마시 동기생인 고부태수 오천유의 선물을 받고 답례를 겸해 지은 시(고율시)이다. 오천유가 보낸 선물은 기생(妓女)과 술 한병(美酒), 산 꿩(生雉) 등이었다.

시 가운데 ‘속소의 가는 허리(束素腰)’가 눈에 띈다. 
한마디로 ‘한 묶음의 비단(속소)같은 허리(요)’를 뜻한다.
'청추사락(靑鞦射落)이란 말이 있다. '청추(靑鞦)'는 꿩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 가국(賈國)의 대부로 용모가 몹시 추악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반대로 아주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시집온 지 3년이 지나도록 한마디 말도 건네는 일이 없고 또 웃는 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를 데리고 강기슭 언덕 위로 가서는 꿩을 쏘아 맞혀 떨어뜨리니, 그 무술에 감탄한 나머지 그제서야 아내가 웃으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左傳 昭公 二十八年)'

여기서는 무술로 직접 가서 꿩을 잡지 않았지만 꿩도 있고, 웃고 말하는 자도 있다는 뜻이다.
이규보는 동무가 ‘허리가 가는 미인’을 선물로 보낸 것을 치하하고 있다. 이런 시도 있다.

“젊은 시절 청루에서는 의기가 호탕하여(少日靑樓意氣豪)/초궁의 섬세한 허리를 손바닥에 놀렸지.(掌中纖細楚宮腰)”('사가시집' 제9권 ‘시류’)

시가 말하는 ‘초궁의 섬세한 허리’를 ‘손바닥에서 놀렸다’는 말은 모두 여인의 아랴야리한 가녀린 허리를 뜻한다. 

예부터 세요(細腰), 즉 ‘개미허리 여인’을 미인의 상징으로 꼽혔다.
 개미 허리와 긴 머리는 예부터 모든 남녀의 로망이었다. 가는 허리가 유행된 것은 이미 2500년 전의 일이다. 
긴 머리를 갖지 못한 여인들은 가발이라도 얹어야 미인 소리를 들었다. 고구려 동천왕의 후궁인 관나부인의 긴머리는 9자나 됐가고 한다. 당나라에서는 신라산 가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개미허리’가 유행됐을까. 춘추시대 초 영왕(재위 기원전 541~529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자그만치 2500년이 된 유행이다. '묵자'의 ‘겸애중(兼愛中)’에 나오는 고사이다.

초 영왕이 바로 ‘개미허리’의 신봉자였다. ‘가는 허리를 탐했다’는 뜻의 '탐연세요(貪戀細腰)'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임금이 ‘개미허리’를 좋아하자 궁중의 남녀들은 하루 한끼씩 먹는 등 처절한 다이어트에 나섰다. 가슴으로 숨을 들이킨 다음에 띠를 졸라맸다. 임금의 눈에 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졸라맸는지 일어설 때는 모두들 벽에 의지해야 했고, 길에서는 담벼락을 잡고서야 걸을 수 있었다.
임금이 ‘가는허리’를 밝힌지 1년이 지나자 궁중의 남녀는 모두 깡마른 얼굴빛을 하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초왕이 가는 허리를 좋아하자 궁중에 굶어죽은 사람들이 많아졌다(好細腰而國中多餓人)”고 손가락질 했다. 
이후 ‘세요설부(細腰雪膚)’는 버들가지처럼 가는 허리에다 눈꽃처럼 하얀 피부의 여인을 미인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가늘어야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까.

한나라 성제(기원전 33~7년)의 후궁인 조비연은 얼마나 허리가 가늘고 몸매가 갸날팠는지 손바닥 위에서도 능히 춤을 추었다고 한다.
'남사(南史)'에 등장하는 양간(羊侃·495~549년)의 가기(家妓)인 장정완도 “허리가 1척6촌이며, 손바닥에서 춤을 출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1척6촌이면 지금의 단위로는 40㎝도 채 안된다. 인치로 따지자면 15인치를 살짝 넘는 수준? 그러니 그야말로 ‘한줌의 허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사가시집'에 나오는 ‘초궁의 가는허리’는 바로 초 영왕 때의 일화를, ‘손바닥 위에서의 춤’은 조비연과 장정완의 이야기를 각각 빗댄 것이다.
2600년 전을 풍미한 유행의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춘추 5패의 한사람인 제나라 환공(재위 기원전 685~643년) 때의 일이다. '한비자'의 ‘이병(二柄)’에 나온다.
제나라 환공은 ‘자주색 옷의 마니아’였다. 그러자 온나라에 자주색 의상의 열풍이 불었다. 온 백성들이 앞다퉈 자주색 옷을 입었다.
그러자 하얀색 비단 5필을 주고도 자주색 비단 한 필을 살 수 없을 정도로 품귀현상을 빚었다. 환공이 크게 걱정하며 명재상인 관중을 불러 상의했다.

“내가 자줏빛 옷을 좋아해서 그런가. 어찌한단 말이요.”(환공)

“무엇이 어렵습니까. 우선 측근들을 불러 이렇게 말하십시요. ‘난 자주색 옷냄새가 너무 싫다’고…. 그러면 해결됩니다.”(관중)
다음 날, 환공은 자주색 옷을 입고 나오는 신하들에게 짜증을 부렸다.

“자네. 난 그 옷이 싫다. 냄새가 난다. 썩 물러가라!”

그제서야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도 자주색 옷 입기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초 영왕이나 제 환공은 좋은 말로 ‘춘추시대의 패셔니스타’라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고, 백성들까지 그들의 스타일을 줄줄이 따라했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다이어트를 감행했다니 참…. 특히 초 영왕이 일으킨 ‘개미허리‘와 ’다이어트‘ 열풍이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처음에 인용한 '묵자'나 '한비자' 같은 고상한 분들이 개미허리가 어떻고, 자주색 옷이 어떻고 하는 ‘유행’ 이야기를 꺼낸 까닭도 마찬가지다.
역시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야 유행병처럼 퍼지는 잘못된 풍조를 바로잡을 수 있음을 깨우치려던 것이었다. 
예컨대 제환공의 일화를 전한 '한비자'는 다시 '시경'을 인용, “몸소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믿지 않는다”고 했다. 하기야 맹자 역시 그랬다지 않은가.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지나침이 있다(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맹자 ‘등문공상’)고….

채용신의 미인도 속 조선 미인

우리나라엔 석지 채용신(1850~1941)이
의 미인도 병풍이 전한다.
채용신은 무과출신 관료이면서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제작 총괄하는 주관화사를 역임했다. 그는 서울 출신이지만 전북 지역과 인연이 깊다. 조상 대대로 전북 지역에서 생활했고, 낙향 후에도 전주와 익산, 정읍 등에서 화실을 열고 활동하며, 우리 지역 인물들의 작품을 남겼다 고종의 어진 제작 후, 고종이 직접 변산의 채석강에서 유래해 ‘석강(石江)’이라는 호도 선물하였다 하니, 채용신과 고종의 관계가 각별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채용신은 전통적인 초상화 제작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사진 기술을 받아들인 근대기 초상화로 잘 알려졌지만, 초상화 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병풍은 채용신 특유의 화풍으로 꽃과 새, 동물을 표현한 작품이다. 채용신은 초상화가 가장 유명하지만, 이외에 산수, 화조, 영모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그렸다.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 이매창(1573~1610)이 청추에서 기녀로 활동한 사실을 입증하는 작품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채용신이 그린 팔도미인도 가운데 '청주미인 매창'은 부안의 기녀 매창으로, 작품은 쓰개치마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미인과 구분된다.  이 작품은 다소곳한 모습에 기품이 엿보인다. 얼굴은 미간이 넓고, 둥글고 콧날이 두터운 코를 갖고 있으며 빰에는 살이 올라 있다.
채용신은 무과출신 관료이면서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제작 총괄하는 주관화사를 역임했다. 그는 서울 출신이지만 선조들은 전북 지역과 인연이 깊다. 조상 대대로 전북 지역에서 생활했고, 낙향 후에도 전주와 익산, 정읍 등에서 화실을 열고 활동하며, 우리 지역 인물들의 작품을 남겼다 고종의 어진 제작 후, 고종이 직접 변산의 채석강에서 유래해 ‘석강(石江)’이라는 호도 선물하였다 하니, 채용신과 고종의 관계가 각별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채용신은 전통적인 초상화 제작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사진 기술을 받아들인 근대기 초상화로 잘 알려졌지만, 초상화 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화폭에 담은 조선의 팔도미인도'는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으로  서울, 평양, 경남 진주, 전남 장성, 강원 강릉, 충북 청주, 의주 미인과 기생 등 8명의 전신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얼굴이 모두 비슷비슷해 다들 예뻐 보이지만 유독 평양과 진주 기생이 달라 보인다. 북방계 얼굴을 가진 평양 미인은 새초롬하고 속을 태울 것만 같은 반면 남방계 얼굴의 진주 기생은 동글동글한 볼이 마음 씀씀이가 가을처럼 넉넉하다. 의주 미인은 목이 길며 상체가 작으며, 계란형 두상에 미간과 눈두덩이 상당히 넓다.
청주미인 매창은 1573년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딸로 출생,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화우 흩 뿌릴제’란 작품으로 유명하다.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과 함께 조선 4대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부안의 기녀다. 매창은 계유년에 태어났다. 
‘계생’ 또는 ‘계랑’으로 불렸으며, 스스로 ‘매창’이라는 호를 붙였다. 매창이라는 이름은 차디찬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고결한 매화처럼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의지의 상징이었다.

 '전(傳)채용신 팔도미인도(八道美人圖,8폭 병풍, 면본채색, 병풍: 203.5 x 584cm, , 송암문화재단 OCI미술관)'는 한성관기홍랑(漢城官妓洪娘), 진주미인관기산홍(晉州美人官妓山紅)
화성관기명옥(華城官妓明玉), 장성관기취선(長城官妓翠仙)
청주미인매창(淸州美人梅窓, 부안출신 계생),정평미인취련(定平美人翠蓮),
평양기생계월향(平壤妓生桂月香),
강릉미인일국(江陵美人一菊) 등장한다.

미인도는 동양에서 일찍부터 그려지던 화목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의 미인도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미인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풍속화에서부터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신윤복의 '미인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인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여인을 그려 8폭 병풍으로 만든 작품도 전한다. 채용신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팔도미인도(八道美人圖)'이다.
신윤복의 '미인도'처럼 그려진 여인들은 모두 기생이다. 남녀 유별하던 시대에 볼 수 있는 외간 여자의 얼굴은 그나마 기생뿐이었을 것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병풍이 전(傳)채용신 작품으로 불리는 이유는 병풍 왼쪽 맨 마지막 그림 왼쪽 하단에 ‘팔도미인관기초상채용신사(八道美人官妓肖像蔡龍臣寫)’라는 관지와 채용신의 인장이 찍혀 있지만 그것이 원래의 화폭이 아닌 별지로 부착되어 있는 까닭이다.
'팔도미인도(八道美人圖)'에 그려진 각각의 기생들 면모를 보면 비록 ‘미인’이라는 단어를 동원했지만, 채용신은 단순한 미모보다는 시재(詩才)나 의기(義氣)가 뛰어났던 인물들을 선별하여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 8폭 병풍은 단순히 춘의(春意)적 의도에서 그려진 미인도가 아닌 조선시대의 뛰어난 기생들의 초상화 모음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미인의 조건으로 30가지가 충족되어야 했다. 
살결, 치아, 손은 희어야 하고(3백), 눈동자, 눈썹, 속눈썹은 검어야 하고(3흑), 입술, 볼,손톱은 붉어야 하고(3홍), 목, 머리, 팔다리는 길어야 하고(3장), 치아, 귀, 발길이는 짧아야 하고(3단), 가슴, 이마, 미간은 넓어야 하고(3광), 입, 허리, 발목은 가늘어야 하고(3협), 엉덩이, 허벅지, 유방은 두터워야 하며(3태), 손가락, 목, 콧날은 가늘어야 하고(3세), 유두, 코, 머리는 작아야 했다.(3소)
관지에는 이 기생들이 8도의 관기(官妓)라고 밝혔다. 그러나 채용신이 이 관기들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말을 근거로 하여 그린 것이라 한다.

'한성관기홍란(漢城官妓洪娘):. 그림의 시작은 한성관기(漢城官妓)인 홍랑(洪娘)이다.
화면 속 여인은 전체적으로 약간 비껴선 자세로 고개를 다소 숙이고 시선은 아래에 두고 있다. 무거운 가체를 받치듯 손을 머리에 올리고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채 치마 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은 다른 미인도에서 흔한 도식화된 자태다. 볼이 통통한 얼굴이다.
홍랑(洪娘)은 함경도 홍원(洪原) 출신의 기생이었다. 선조 때에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최경창(崔慶昌)이 함경북도 경성(鏡城)에 북평사(北評事)로 주재할 때 그 막중(幕中)에 머무르면서 최경창과의 사이에 소생까지 두는 사이가 되었다. 후에 최경창이 돌아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성까지 찾아갔고, 최경창이 죽었을 때는 3년 동안 시묘하고 절개를 지켜, 이에 감동한 최씨 문중에서 홍랑이 세상을 떠나자 문중 선산에 묻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진주미인관기산홍(晉州美人官妓山紅)'은 몸은 정면이지만 고개는 왼쪽을 향한 채, 왼 손은 뒷짐을 지고 오른손으로는 가슴두르개인 말기의 끈을 쥐고 있다. 가체를 올리지 않고 가르마를 타 쪽 진 머리를 했다. 둥그스름한 얼굴형에 비해 이마는 각이 지고 편평해 보인다.
 산홍은 진주 교방(敎坊) 소속의 기녀였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사람인 이지용(李址鎔)이 1906년에 진주에 왔다가 산홍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첩이 되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산홍이 큰소리로 “세상사람 역적의 첩이 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지용이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고도 하고, 죽였다는 말도 있다. '교방(敎坊)'은 기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가무를 관장하던 기관을 말한다.

'화성관기명옥(華城官妓明玉)'은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고개는 약간 오른쪽을 향한 채, 두 손은 가슴과 허리 사이에 동여맨 말기의 끈을 만지고 있다. 갸름한 얼굴에 처진 눈꺼풀과 작고 얇은 입술을 지녔다.
명옥은 생몰 연대가 미상인 화성의 기생이다. 다만 그녀가 지었다는 시조 한 수가 전한다.

'꿈에 뵈는 임이 신의 없다 하건마는,
탐탐히 그리울 제 꿈 아니면 어이 뵈리.
저님아 꿈이라 말고 자로자로 뵈시소'
 
'장성관기취선(長城官妓翠仙)'은 살짝 왼쪽을 향해 서서 고개를 조금 숙여 아래를 보고 있다. 왼손으로 치마 끝자락을 돌려 잡고 있고, 오른쪽은 치마 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귀 밑에 실머리가 눈에 띈다. 눈매가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하고, 콧방울이 작고 턱이 조금 뾰족한 편이다.
취선은 시를 잘 짓던 16 ~ 17세기의 전라남도 장성(長城) 기생으로 호가 설죽(雪竹)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백마강회고(白馬江懷古)’라는 한시가 전한다.
 
'晩泊皐蘭寺(만박고란사) 해질녘 고란사에 이르러
西風獨倚樓(서풍독의루) 서풍에 홀로 누대에 기대보니
龍亡江萬古(용망강만고) 용은 떠났어도 강은 만고에 흐르고
花落月千秋(화락월천추) 꽃은 떨어졌어도 달은 천추에 밝네'
 
'청주미인매창(淸州美人梅窓)'은 쓰개치마를 쓰고 오른쪽으로 약간 비껴선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 이매창(1573~1610)이 청주에서 기녀로 활동한 사실을 입증하는 작품이다.
 채용신이 그린 팔도미인도 가운데 '청주미인 매창'은 부안의 기녀 매창으로, 작품은 쓰개치마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미인과 구분된다.  이 작품은 다소곳한 모습에 기품이 엿보인다. 얼굴은 미간이 넓고, 둥글고 콧날이 두터운 코를 갖고 있으며 빰에는 살이 올라 있다.
매창의 본명은 향금(香今)이고, 호가 매창이다.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나 계생(癸生), 계랑(癸娘)이라고도 불렸으나,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스스로 ‘매창(梅窓)’이라고 자호(自號)했다. 그녀가 지은 한시 수백 수 가운데 58수를 추려 모은 '매창집(梅窓集)'이 전하며, 이를 통해 그녀의 생몰년도(1573 ~ 1610)도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 
그림에는 청주미인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매창은 부안(扶安) 출신의 기생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홍만종(洪萬宗)의 시평집인 '소화시평(小華詩評)'엔 “근래에 송도의 진랑(眞娘: 황진이)과 부안의 계생(桂生)은 그 사조(詞藻)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고 적었을 정도로, 조선 불세출의 기생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명성을 얻었었다.
아래는 그녀가 정인(情人)이었던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劉希慶)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시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그 다음은 '정평미인취련(定平美人翠蓮)'이다.
정평(定平)은 조선시대 함경남도 남부에 위치한 군(郡)이었다. 취련(翠蓮)은 영조 때의 정평 기생으로 시에 능하고 노래와 춤을 잘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편자 미상의 시화집인 '해동시화(海東詩話)'에 '정평기(定平妓) 취련(翠蓮)은 시재(詩才)가 있다. 회곡(晦谷) 윤양래(尹陽來)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취련을 감영에 불렀는데 장마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얼굴에 근심하는 빛이 가득했다. 윤공이 시부(詩賦)를 지어보라고 하자 취련이 일절(一絶)을 지었다'란 기록과 함께 아래의 시가 실려 있다.
 
'十日長霖苦未晴(십일장림고미청) 열흘이 되어도 괴로이 장마가 개이지 않아
 鄕愁暗暗夢中驚(향수암암몽중경) 고향 생각 깊어 꿈속에서도 놀라네.
 中山在眼如千里(중산재안여천리) 중산은 눈앞에 있지만 천 리 길 같아
 悄倚危欄黙數程(초의위란묵수정) 근심스레 난간에 기대어 앞길 헤아리네'
 
중산(中山)은 정평의 옛 이름이다. 취련의 시를 본 윤공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말을 주어 취련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평양기생계월향(平壤妓生桂月香)'은 오른쪽을 향하여 몸을 돌려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고 턱이 뾰족하며 나이가 있는 얼굴로 그려졌다.
실제의 계월향( ? ~ 1592)은 절세미인에 가야금, 춤 솜씨도 뛰어난 당대 평양 최고의 기생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애첩이었던 그녀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관장수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敵將)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탈출하려다 왜적에게 발각되자, 자신은 김응서의 칼을 받아 순국하고 김응서만 탈출하게 했다는 평양의 의기(義妓)이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나이 20세이던 평양의 채금홍(蔡錦紅)이라는 기생은 계월향의 사당인 의열사(義烈祠)를 참배하고 아래의 시를 지었다가 왜국 순경에 잡혀 10일간 구류되었다고 한다.
 
'嗟歎前朝桂月香(차탄전조계월향)  슬프도다. 조선의 계월향이여,
 芳魂何處獨悽傷(방혼하처독처상)  꽃다운 혼 어느 곳에서 홀로 슬퍼하는가.
 練光亭上朱欄朽(연광정상주란후)  연광정 위 붉은 난간은 썩어지고,
 義烈祠前蔓草長(의열사전만초장)  의열사 앞에는 덩굴만 무성하네'

'연광정(練光亭)'은  평양 대동강가의 명승지로 관서팔경의 하나이다.
'강릉미인일국(江陵美人一菊)에 대해서는 따로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지나친 다이어트로 심지어는 거식증에 걸려 사망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유행에 맞추느라 분수에 맞지 않은 소비풍조를 일삼기도 한…. 그런 세태를 돌아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요즘의 ‘패션리더’ 혹은 ‘패셔니스타’란 바로 이 시대 유행을 선도하는 ‘지도자’가 아닌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기원전 4년 도성(위례성)을 세우면서 내건 슬로건이 있었다.
바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였다. 어떤가 이 땅의 패션리더들이여. 온조왕처럼 ‘검이블루 화이불치’의 유행을 퍼뜨리는 것은….

이규보 이야기

이규보는 경기도 황려현(여주) 사람이다. 
그의 나이 22살에 사마시에 응시, 첫째로 뽑혔다.
다음 해에는 예부시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에 뽑혔다. 그러나 10여 년간 관직을 맡지 못하다가 전주목(全州牧) 사록(司錄)과 서기(書記)를 겸임하여 32살에 첫 부임지 전주에 도착한다. 
이규보가 전주로 내려온 것은 1199년 9월이었다.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9월 13일에 개성을 떠나 전주로 갈 때 임진강 배 위에서 진공도, 한소와 작별하면서 시 한 수를 지었으며, 9월 23일 전주로 들어가면서 마상에서 회포를 읇은 시 한 수를 지었다
그는 임무 수행을 위해 전주의 영군현과 군현 지역을 돌아다니며 순찰, 지휘 감독을 했다.
부안과 관련해서는 벌목(伐木)하는 일을 감독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작목사(斫木使)’라 불렀다. 
이 책임을 맡아 세 차례 이상 변산을 다녀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벌목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자신을 가리켜 짐꾼이나 나무꾼이라고 했다. 다음해 8월에는 다시 변산을 찾아 소래사, 원효방, 부사의방장 등을 유람하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는 어렵게 부사의방장에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을 피우고 율사(律師)를 모사한 상에 예배했다.
변산의 경치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봉우리가 솟았다가 구부렸다, 폈다를 되풀이하는 그 장관이 끝없이 이어진다’고 감흥을 적었다. 망해대에 올라 부령 현감이 주재한 술자리에 참석하여 아름다운 바다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즐겼다. 그의 재임 기간에 전주목의 낭장과의 다툼이 커지면서 12월에 파직을 당하니 1년 3개월 만에 전주를 떠나게 됐다.
이규보는 국가 행사인 팔관회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이 잔치가 옛날 규례에 어긋난다하여, 책임을 물어 왕유와 송순, 이규보 등이 모두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1230년이니 그의 나이 63세였다.
이규보는 부안에서 작목사로 일한 지 31년 후에 다시 부안을 찾는다. 위도(고려 때는 猬島로 쓰임)로 귀양을 가기 위함이다. 12월에는 보안현에 머물다가 위도에 들어가기 위해 바다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린다. 31년 전만해도 관리의 신분으로 변산으로 들어가서 나무 베는 일을 감독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변산을 유람하여 감흥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부안 현감은 높은 산봉우리까지 그를 찾아와서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제는 죄인의 몸으로 귀양 가기 위해 부안을 찾았으니 그의 참담한 심경을 어디에 드러내랴. 나이 들어 몸은 쇠락하고 정치판에서 조차 쫓겨난 그에게 부안은 어떤 위로를 주었을까.
그의 잠자리는 주로 변산의 절이었는데, 스님이 위로한답시고 ‘일찍 관직 버리지 못함’을 말하니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기도 한다. 
진사(進士) 이한재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부안에 있는 동안, 고부 태수 오천유가 술을 가지고 찾아오고 보안현의 향교 학생들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했다. 해안 지역의 수군을 관장하는 이첨사가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12월 26일에 섬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보안현의 제공(諸公)이 크게 연회를 베풀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채 배에 오른다.
술에 취해야만 갈 수 있는 늙은 정치인의 귀양길, 겨울이라서 사위는 추위에 떨고, 돛 하나에 맡기고 파도를 헤쳐야 하는 그 험한 바닷길. 그의 심경을 담은 시 한 편을 읽어본다.

'평소 무사할 때에는
인정을 진실로 헤아리기 어렵고
이렇듯 어려운 때를 당해야만
비로소 두텁고 얇음을 안다네
옛날에는 깊이 사귀어
일편단심(一片丹心) 드러내다가
이제는 눈을 흘기고서
대면하기가 호월(胡越)처럼 막히네('통판(通判) 김군(金君)에게 주는 시'에서)

산골인 마령과 진안 사람들은 얼굴이 잔나비 같고, 꾸짖거나 나무라면 놀란 사슴처럼 금방 달아날 듯 사람됨이 질박(質朴)하여 꾸밈이 없고, 술상이나 음식은 문화가 뒤떨어진 야만적인 풍모기 엿보인다고 하였다. 산을 감돌아 운제까지 갔고, 운제를 지나 고산까지 가는 데는 길이 좁고 고개가 만 길이나 높이 솟아 있어 말을 타고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이 대목은 '여지도' 고산현의 형승을 그려내는 부분에서 이규보의 '남행월일기'를 그대로 원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1199년부터 2년 동안 전주막부 등 전북 곳곳을 방문한 가운데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란 산문을 지었다. 1199년 11월 지석(支石), 즉 고인돌을 보고 쓴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우리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 기록이다. '지석'은 고인돌의 한자 표기다. 이규보는 또 이렇게 말했다. ‘변산은 나라 재목의 보고이다. 소를 가릴 만한 큰 나무 와 찌를듯한 나무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할 때도 변산의 나 무들로 전함을 만들었다’
그는 전주에 대해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며 백성의 성품이 질박하지 않고 선비는 행동이 신중하다’고 표현한 바 있다. 처음 전주로 들어오면서 말 위에서 ‘북당에서 눈물 흘리며 어버이를 작별하니/ 어머니를 모시고 관직나간 고인처럼 부끄러운데/ 문득 완산의 푸른 빛 한 점을 보니/ 비로소 타향객인 줄 알겠네’라 읊은 7언절구가 전해온다. 
그리고 전주 효자동을 지나다가 그 곳에 있는 무명의 효자비로 인해 효자리가 되었다는 5언고율시 ‘비석 세워 효자라 표했는데/ 일찍이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네/ 어느 때 누구인지 알 수도 없으니/ 어떠한 효행인지 모르겠네’라 읊기도 했다.

그는 ‘전주는 완산(完山)이라 일컫기도 하는데 옛날 백제의 땅이다. 인구가 많고 집들이 즐비하여 옛 나라의 풍(風)이 있는 까닭에 그 백성들이 치박(稚朴)하지 않으며 아전들이 다 점잖은 사인과 같아서 행동거지가 자상함이 볼만하다. 중자산이란 산이 있는데 나무가 가장 울창하여 이 고을에서 크고 웅장한 산이다. 소위 완산이란 산은 다만 나지막한 봉우리일 뿐, 한 고을이 이로써 이름을 얻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고 했다.
예컨대 마령, 진안, 운제, 고산, 예양, 낭산, 금마, 이성 등을 두루 둘러보며 그 지방의 산천과 인심, 음식, 풍물 등을 유려한 기행수필로 엮어내었다. 그는 1200년 8월에 울금바위와 그 옆의 깎아지른 바위동굴에 자리 잡고 있었던 원효방(元曉房)을 답사했던 기록이 나온다. 백제가 망한 후에 신라의 원효는 백제 부흥군들이 끝까지 저항하던 근거지였던 변산까지 왔던 것 같고, 변산의 요지인 울금바위 옆의 동굴에다 방을 만들어 놓고 수도했던 것 같다. ‘경신년(1200, 신종 3) 계동(季冬) 서울에 들어와 한가히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꺼내 보았더니 너무 소략해서 읽을 수가 없었으니, 자신이 기록한 것인데도 도리어 우습기만 하였다. 그래서 다 가져다가 불살라버리고 그 중에서 한두 가지 읽을 만한 것을 모아서 우선 차례로 적어보겠다’고 언급한 그.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이를 답사코스로 지정해, 전라도 정도 천년 행사로 선보일 수는 없는 것인가.
이규보는 부안 객사, 마령객사, 전주객사, 변산노상, 낭산고을, 오수역, 인월역, 남원 원수사, 임실군수에게, 순창 적성강, 보안현, 옥야현, 갈담역, 고부태수 오천유에게, 보안현 진사 이한재에게 등 60 여수가 넘는 많은 작품을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에 담아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전주목에 부임한 지 1년 4개월 만에 면직을 당하기도 했는데, 고종 17년(1230년)에 또 한 사건에 연루되어 부안 위도에 유배를 당했다.

최근들어 전주시는 조선시대 객사인 전주 풍패지관(대한민국 보물 제583호)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를 확인했다. 고려시대 객사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강릉 임영관터를 제외하고는 알려진 사례가 극히 드물다.
전주객사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기록으로는 고려시대 문신이었던 이규보가 전주목의 관리로 부임했을 때인 1199~1200년 무렵 전주객사를 배경으로 지은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전해지고 있다. 이 기록을 참조하더라도 전주객사는 적어도 1199년(고려 명종 25년)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동국이상국전집' 제9권에 '전주 객사(全州客舍)에서 밤에 자다가 편협한 회포를 쓰다'를 창작했다.

'남자라면 다같이 고생과 영광이 있건만(一般男子有枯榮)
가슴속에 쌓인 덩이 모두 불평뿐이네(堆阜撑胸意未平)
종일토록 영중에 무릎 꿇고(盡日營中猶曲膝)
날이 새면 창 밖에 나가 스스로 호명하네(五更窓外自呼名)
여러 차례의 광언 눈썹을 지지고 싶고(狂言屢發眉堪炙)
편협한 분개 사라질 수 없어 병이 생기려 하네(褊憤難消癭欲生)
백 가지로 잘못을 찾아보지만 굽힐 수 없나니(百計覓瘢難屈處)
이 마음 길이 물과 같이 맑다오(寸心長共水爭淸)'

그는 마령 객사에서도 시를 지었다.

'십일월 이십일에 속군(屬郡)인 마령 객사(馬靈客舍)에서 유숙하였는데 중대당두(重臺堂頭)가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시를 지어 주다.

쓸쓸한 옛고을 산 밑에 있는데(蕭條古縣枕山根)
대하는 사람이란 원숭이 모양의 아전일세(只對村胥貌似猿)
그대를 한번 만나 시주회를 만드니(一見暫開詩酒會)
청신한 이야기 공무에 시달림 씻노라(淸談聊洗簿書昏)
찬 구름 뭉게뭉게 송함에 침노하고(寒雲苒苒侵松檻)
눈 내리는 소소한 소리 죽헌에 들리네(乾雪騷騷響竹軒)
술 마신 뒤 함께 몽정록을 맛보며(飮罷共嘗蒙頂綠)
포단에 둥글게 앉아 말마저 잊노라(蒱團櫱坐旋忘言)'

부안의 객사에서 지은 시가 전하고 있다. 

'부령 객사(扶寧客舍)에서 판상(板上)에 있는 좨주 이순우(李純佑)의 시에 차운하다'엔,

'청명한 강산 영주 봉래와 같으니(江山淸勝敵瀛蓬)
옥을 묶어 세운 듯 은을 녹여 만든 듯 만고에 변함 없네(立玉鎔銀萬古同)
풍속은 으레 연자 같은 것 많고(習俗例多如蜒子)
잠총부터 시작된 고을 이름 누가 믿으랴(縣封誰信自蠶叢)
바람 피하려는 파리한 종놈 바위 밑에 숨고(避風羸僕投巖下)
눈을 싫어하는 굶은 새 난간에 날아든다(厭雪飢禽落檻中)
근년에 와서 정미가 없어진 것이지(只是年來情味薄)
원래에 예쁜 여색 싫어하는 것 아닐세(元非不愛眼前紅)'

그는 말 위에서 시를 쓰는 천재시인이었다.

'십이월 어느 날 작목(斫木)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부령군(扶寧郡) 변산(邊山)에 갔다가 그때 마상(馬上)에서 짓다 2수'

호위군 인솔하니 영광을 자랑할 만하지만(權在擁軍榮可詫)
작목관이라 부르니 수치스럽기만 하네(官呼斫木辱堪知)
작목사(斫木使)라고 부르므로 한 말이다.(呼爲斫木使故云)
변산은 예부터 천부라 일컫는데(邊山自古稱天府)
좋은 재목 가리어 동량으로 쓰리라(好揀長村備棟欀)
고각 소리 한번에 새들도 놀라고(一聲鼓角鳥驚飛)
병객이라 옷속에 스며드는 찬 바람 무섭고나(病㥘寒威裂厚衣)
안천에서 행차 머물러 쌓인 눈 구경하고(駐蓋雁川觀雪漲)
견포에선 안장 풀고 조수 물러갈 때 기다리네(卸鞍犬浦待朝歸)

'구월 이십삼일에 전주로 들어가면서 마상(馬上)에서 회포를 쓰다'도 전한다.

'북당에서 눈물 뿌리며 어버이를 작별하니(北堂揮涕忍辭親)
어머니 모시고 직소에 나간 옛사람에 부끄러워(輦母之官愧古人)
갑자기 완산의 푸른 빛 한 점 보니(忽見完山靑一點)
타향인이 된 몸 비로소 알겠구나(始知眞箇異鄕身)'

이규보와 전주 성황제

전주 성황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황제의 하나라는 특징을 갖는다. 전주 성황제에 관한 첫 기록은 고려 무신집권기인 신종 2년(1199년)에 처음으로 확인된다. 전주 성황제의 기록은 지금까지 확인된 성황제 가운데 네 번째로 빠르다. 
하지만, 종래 성황제가 단순히 명칭만 남아있던 것과 달리 당시 전주목의 지방관 이규보가 지은 제문이 남아 있어 전주 성황제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규보가 남긴 전주 성황제에 대한 기록은 최근 전라북도 순창지역에서 발견된 '순창대신사적기'의 1281년(충렬왕 7) 성황제 봉작 기록과 비교해 보더라도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다. 뿐만 아리라 한국 성황제의 유래와 성립, 그리고 변천과정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보고로 평가된다.

전주성황제신문(全州城隍祭神文)

'삼가 채소․과일과 맑은 술의 제수로써 성황대왕(城隍大王) 의 영전에 제사지냅니다.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 나물 끼니도 제 대로 계속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냥꾼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아와서
바치기에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이 고을에는 예부터 매월 초하루에 저희들로 하여금 사슴 한 마리와 꿩 토끼를 바쳐 제육(祭 肉)에 충당하게 하고, 그런 뒤에 아리(衙吏)들이 공봉(公俸)을 받아서 주찬(酒饌)을 갖춰 성황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곧 하나의 관례가 되어 왔습니다.’ 하기에, 내가 노하여 매질하면서 꾸짖기를 ‘네가 어찌 나에게 알려 허락도 받지 않고 이런 짓을 하느냐? 
무릇 제 고을의 선물 꾸러미나 청탁 고기를 거절하지 않고, 산의 살찐 노루나 매끈한 토끼와 곰 발바닥 코끼리 발가락과 바다의 상어․숭 어․메기․잉어와 새벽 비둘기, 야생 고니 등 맛난 음식을 불러들여 수두룩 앞에 쌓는 자들이야 차마 그 진미를 홀로 다 먹을 수 없어서 대왕에게 바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어찌 나물 끼니로 가난하게 지내는 나로서 달마다 생물을 죽여 귀신을 살찌게 하기 위해 내 자신의 죄를 더하겠는가? 그리고 귀신도 정직한 귀신이라면 나에게 이런 것을 바라지 않으리라.’ 하고는, 곧 아리(衙吏)들에게 훈계하 여 이제부터는 다시 고기를 쓰지 않기로 하고 채소․과일과 주찬 따위의 진설은 알아 하게끔 맡겼다오. 나의 약속이 이러하니, 대왕 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바라건대 너그럽게 나를 완악하 여 옛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 하지 마시오'

고려 초로부터 천 년을 이어온 전주의 성황제는 단순한 종교의례로서의 의미를 넘어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의 원형을 엿 볼 수 있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동시에 천 년 동안 전주의 지역과 지역민을 유지와 화합, 그리고 발전시켜 왔던 통합의 원리이자 원심력의 발판이었다. 
글로컬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전주 성황제의 제의구조와 특성을 살피는 일은 단순히 전통문화의 이해를 넘어 새로운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창출하는 작업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규보와 고려시대 음식 이야기

“내가 전에 오신채를 끊었을 때, 소고기도 함께 끊었지만, 마음만 그러했을 뿐 눈앞에 고기가 보이면 참지 못하고 먹어 왔다. 이제야 고기가 앞에 보여도 먹지 않게 되었다”

고려 시대 이규보가 그의 ‘동국이상국집’ 단우육(斷牛肉)이란 시의 서두에 언급한 내용이다. 고기 끊을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 왔지만 막상 제대로 실천을 못해 오다가 이제야 고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단계가 됐기에 이 시를 짓게 됐다는 고백이다. 이규보는 시를 짓기 전 ‘처음 오신채를 끊고서 (시를) 짓다’라는 시, ‘시단오 신유작(始斷五辛有作)’에서 오신채 끊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음을 피력하고 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육류를 선호 혹은 집착하는 것일까? ‘능가경’은 그 이유를 고기 맛에 대한 욕망(貪肉味)이라고 언급한다. 육식은 또한 성적 욕구도 일으키며(食肉能起色力) 따라서 고기 맛을 버리는 것(捨肉味)은 정법의 맛을 보는 것(聞正法)이라고 설한다. 
고려시대 선조들은 어떤 종류의 육식을 했으며 어떤 육류를 가장 선호하였을까? ‘고려사절요’ 성종 조에는 “왕이 서도(西都)에 행차하였는데 주·현의 부로(父老)들이 왕에게 소고기와 술을 바쳐 술은 군사들에게 하사하고 소고기는 돌려줬다”고 한다. 
앞서 이규보의 ‘단우육’이란 시 제명에서도 보듯 고려시대 고급육이자 가장 선호되는 육류는 단연 소고기였다. 소고기에 대한 선호는 단지 고려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도 여전하다.
‘동국이상국집’에는 이규보가 실생활에서 경험한 다양한 육류생활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이규보는 ‘위심시희작(違心詩戱作)’이란 시에서 “배가 불러 그만 먹으려 하면 어린 양고기(羔肉)가 나오고 목이 아파 그만 마시려 하면 술이 가득한 잔을 받는다”라고 하고 있다. 
또 ‘사최천원종번혜양파궤병모(謝崔天院宗藩惠羊羓饋病母)’라는 시에서 양고기포(羊羓)로 병든 노모를 봉양한 내용을 전한다. 
일 년여 동안 병석에 누운 노모에게 이규보는 죽순요리·생선국·생선회 등 갖가지 좋은 음식으로 봉양했으나 노모의 입맛이 점점 까다로워져 한 번 드렸던 것은 토하시니 식사 마련이 쉽지 않음을 토로하고 있다. 하루는 무슨 음식을 드시고 싶으신가 여쭈었더니 “생선은 싫고 양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시는데 양고기를 구하려 해도 갑자기 구하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천원(天院) 최종번(崔宗藩)이 보내준 양고기포가 있어 이를 잘라 국을 끓여 술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드릴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동문선’에는 고려 후기 승려인 식영암(息影庵)의 ‘월등사죽루죽기(月燈寺竹樓竹記)’에 죽순과 소고기, 양고기, 사냥동물 고기를 비교한 내용이 전한다. 
이 글은 죽순의 뛰어남을 주로 언급한 글인데, 죽순을 삶은 다음 구우면 향기롭고 달고 연한 죽순요리가 되어 입에 맞고 뱃속은 살찐다고 하면서 누린내 나고 비린내 나는 육류와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식재료라고 극찬하고 있다.

‘동국이상국집’ 슬견설(虱犬說)에서는 개고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규보의 한 지인은 “어제 저녁에 한 불량배가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 죽이는데 그 모습이 너무 참혹하여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하면서 자신은 맹세코 앞으로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당시 고려인은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개고기 등 사육동물의 고기와 그 고기를 말린 포 등을 식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65~1268년 침몰했다고 추정하는 고려시대 태안 마도 3호선에서 출수된 품목에도 개고기포가 보인다.

고려땐 ‘개고기포’도 공물..마도 3호선 유뮬

고려땐 ‘개고기포’도 공물이었다. 13세기 중엽 어느 날, 한 척의 배가 전남 여수항을 출발해 인천 강화도로 향했다. 배는 전복젓갈, 말린 생선, 개고기포, 사슴뿔 등 권력자에게 보내는 물품으로 가득했다. 선원들은 조약돌로 장기를 뒀고 구석에 놓인 볏섬에서는 쥐가 낟알을 갉아먹고 있었다.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해역에서 2009년 9월 발견된 태안 ‘마도 3호선’은 고려시대 생활유물의 보고였다. ‘마도 3호선’에서는 청어, 전어, 밴댕이, 조기와 같은 소형 어류 뼈들이 뒤섞여 담겨있는 항아리가 보였다. 즉 전어, 밴댕이와 같이 쉽게 부패되는 소형 어종을 뒤섞어 염장하고 발효시켜 만든 ‘잡젓’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마도 3호선'은 고려 무인집권 말의 권력자였던 김준(金俊, ?~1268)과 주변 인물, 고려시대 특수부대인 삼별초, 무신 합좌기구인 중방 등으로 보낸 화물을 싣고 있던 선박으로 1265~1268년 사이 난파됐다. 마도 3호선은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시대 선박으로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배다. 고려시대에는 판매 목적이나 조세(租稅)로 거둔 전라도의 각종 물품들이 서해안을 따라 배로 개경까지 운송됐다. 태안 마도에서 발견된 세 척의 고려 난파선에서 수십 점의 도기 항아리가 나왔다. 항아리 안에 담겼던 물질을 분석한 결과, 벼, 조 등의 곡물과 각종 젓갈이 있었다.
젓갈은 물품 내역과 수취인을 기록한 일종의 송장인 ‘목간’과 함께 발견된 바, 분석 결과와 젓갈의 종류 및 수취인이 일치했다.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목간엔 ‘죽산현에서 개경에 있는 윤방준 댁에 게젓 한 항아리를 올린다’는 내용이 있어 해남에서 개경의 권력자에게 게젓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마도 난파선의 도기 항아리에 담겨 있던 젓갈로 게젓, 새우젓, 전복젓, 홍합젓, 고등어젓과 청어·밴댕이·전어·조기를 한데 담은 잡어(雜魚)젓도 있었다. 요즘도 먹는 젓갈들이다. 배에 실렸던 젓갈들은 각종 곡물, 식재료와 함께 전남 나주, 장흥, 해남, 여수, 전북 고창, 정읍에서 개경과 강화도에 보내졌다. 받는 사람은 당시 고려의 권력층이었다. 무신정권기 최고 권력자 중 하나였던 김준, 왕명 출납을 담당한 3품 고위직 관리인 승제 유천우, 정4품의 시랑 신윤화, 대장군 윤기화, 무관인 교위 윤방준 등의 수취인이 확인됐다. 난파선에서 발견된 전라도의 젓갈은 예부터 지금까지 귀하게 대접받고 사랑받은 지역의 전통 음식문화가 잘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소고기와 양고기와 같은 육류는 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 관계되는데 이규보나 고려 후기의 목은 이색과 같은 고위관직을 지낸 이들도 일단 관직에서 물러나면 소고기와 양고기를 먹기가 쉽지는 않았다는 토로를 그들의 문집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소고기나 양고기와 비교하여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조금은 더 수월하게 먹을 수 있었던 육류였던 듯하다. 그렇지만 육류 자체는 종류를 막론하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식재료는 아니었다. 특히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하인(皂隸), 방자(房子)조엔 고려의 고기식용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중국 사신인 서긍은 사신의 관사에서 심부름하는 방자들이 남는 육류들을 싸주면 여름철이라 육류 음식이 상하고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먹고 나머지는 집으로 가져간다고 하고 있다. 또 고려는 봉록이 아주 박해서 쌀과 채소만을 지급하는 관계로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물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인의 육식은 사육동물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일찍부터 동물사육이 발달한 중국과 달리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육류소비에서 사냥동물의 비중이 높은 것이 우리나라의 사정이었다.
고려 후기 이색의 ‘목은시고’에는 염동정이란 지인이 “늙으신 양친에게 나누어 드리다 보니 양이 적어졌다”며 이색에게 노루고기를 보냈는데 이색은 “햅쌀밥에 아주 잘 어울리는 반찬”이라 하면서 감사함을 표하고 있다. ‘목은시고’에는 생고기 노루뿐만 아니라 사슴이나 노루고기를 말린 ‘포’의 형태로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 보관이 어려운 당시 사정에서 육류는 주로 말린 고기 즉 포의 형태로 만들어져 이용되었다.
한반도에서 삼국 시대부터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육류로 이용되는 사냥동물의 비중은 사육동물보다 높은데 그 주류 동물은 사슴류, 멧돼지, 꿩 등이다. 멧돼지에 비해 사슴류 동물이 사냥동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선류도 자주 언급되는 식재료이다. 고려 시문집에는 생선회에 관한 언급도 드물지 않은데 주로 민물고기 종류이다. 이색은 ‘목은시고’에서 서경(西京), 즉 평양 대동강의 물고기들이 사시사철 손님접대에 이용되었다고 하면서 일찍이 이시민의 집에서 맛보았던 평양의 여름철 생선포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고려인들이 생선회를 먹는 방법은 ‘실처럼 가늘게 썬 생선회에 마늘과 파 등 매운 채소와 장(醬)을 곁들여 먹는 것’이다. 중국 문헌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민물회를 바람에 날아갈 듯 가늘게 썰어 먹는 방식은 고려와 조선 후기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사행 기록인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의 기록(1748년 2월 12일~5월 2일)을 보면 이 시기 일본은 생선회를 무척 굵게 썰어 먹었던 듯하다.
고려인들은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개고기 등 사육동물의 육류와 사슴류, 멧돼지, 꿩, 토끼 등 사냥동물을 통한 육식생활을 향유했다. 인도나 일본과 같은 종교상의 이유로 육식이 엄격히 금기시되는 사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으로 이규보나 이색의 경우에서 보듯 자발적으로 불교 음식규정을 지키는 풍조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색의 ‘목은시고’의 시구가 고려 시대 당시의 육식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집집마다 채소만 상에 가득하고(素食家家菜滿盤) 
가난한 살림에 어쩌다 건어와 젓갈을 구경할 뿐(乾魚臭醯雜寒酸)'

이규보의 시 '가포육영(家圃六詠)'

이규보는 '가포육영(家圃六詠)'이랑 시를 지어 “무청을 장(醬) 속에 박아 넣어 여름철에 먹고 소금에 절여 겨울철에 대비한다”고 읊었다. 
이렇듯 고려시대 여름철에는 무장아찌, 그리고 겨울철에는 소금에 절인 순무김치를 선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채소는 오래전부터 필수 식품이었을 뿐 아니라 흉년에는 구황 식품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예로부터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집 근처에 공터가 있으면 채소밭으로 만들었으며, 곡물을 심고 남은 땅이나 논둑, 밭둑에도 채소를 심었다. 고려시대 채소 재배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이규보가 텃밭에서 가꾼 오이, 가지, 무, 파, 아욱, 박 등 여섯 가지 채소를 읊은 한시 '가포육영(家圃六詠)'이 있다. 다음은 그 중에서 무를 노래한 부분이다.

'담근 장아찌는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김치 겨울 내내 반찬되네
뿌리는 땅속에서 자꾸만 커가니
서리 맞은 무 칼로 베어 먹으니 배같이 달구나'

이 시는 강화도에 도읍이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도시의 관리들이 집 주변의 텃밭에서 채소를 심어서 먹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이규보는 채소 씨앗을 보내 준 이수(李需)에게 보낸 시를 남기고 있어 흥미롭다. 이규보는 그 시에서 “채마밭에 뿌릴 씨 군후(君侯)께 얻었으니, 많은 종류 얻게 되어 나의 뜻과 정히 맞네. 파밭에 대공 솟기 애타게 기다리고, 오이 넝쿨도 시렁에 곧 뻗으리……”라고 읊었는데, 여기서 채소 씨앗이 좋은 선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당시 관료들은 씨앗을 주고받으면서 집 주변의 공터에 채소를 심었던 듯하다.
이런 현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여서 공터만 있으면 채소밭을 만드는 것이 상례였다. 1411년(태종 11) 6월에는 서울 도성이 좁으니 도성 내에는 채소밭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지만 도성 내의 채소밭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종 때에는 궁궐 내에 있는 15곳의 채소밭이 문제가 되었지만 결국 묵인되었다. 또 1420년(세종 2) 5월에는 전구서(典廏署) 안의 양을 키우는 마당이 채소밭으로 둔갑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고, 1511년(중종 6) 7월 대사성 유숭조는 성균관 안에 채소밭을 일구었다가 탄핵을 받기도 했다. 
세종 때 지방관이었던 안직숭은 백성의 집을 헐고 채소밭을 일구기도 하였으며, 인조 때 이경릉은 뇌물로 채소밭을 받고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 한양의 도심 가운데 빈터가 생기면 곧 채소를 심었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한편 관청에도 채소밭이 딸려 있었는데, 그 중 사포서(司圃署), 침장고(沈藏庫)의 채소밭에서는 대개 왕실과 제사에 소용되는 채소를 생산했다.
또 서울의 사부 학당(四部學堂)에도 채소밭이 내려졌으며, 훈련원이나 성균관에도 채소밭이 있었는데, 이곳의 채소는 학생과 군인들의 먹을거리로 충당됐다. 
조선시대에는 경우에 따라 관청에서 개인 땅을 점탈하여 채소밭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만큼 당시 생활에서 채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도 채소 재배와 보관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였다. 흉년에 대비하여 무를 심을 것을 권장하거나 서리가 내리기 전에 채소를 거두어 겨울에 대비하라는 교서를 내리기도 했고, 선조 때에는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에게 채소 씨앗을 구입해 오도록 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 집 땅이 나쁠 경우 채소 재배를 위해서 비옥한 땅을 새로 마련하기도 했다. 
이규보가 이수에게 보낸 시 말미에 붙은 주석에 의하면 이규보는 자기 집 땅이 척박해서 새로 비옥한 땅을 얻어서 채소를 심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