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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국토외곽 먼섬 지원 대상된 ‘부안 상왕등도’

 

행정안전부가 국토외곽 먼섬 지원 대상을 당초 34곳에서 43곳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또 올해 안에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해 체계적인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특별법상 국토외곽 먼섬은 육지에서 50이상 떨어진 유인섬과 영해 및 접속수역법에 따른 직선 기선을 정하는 기점에 해당되는 유인섬이 대상이다. 현재까지는 모두 34개 섬이 이 조건에 해당된다. 영해기점 섬 7곳과 육지로부터 50이상 떨어진 섬 27곳이다. 하지만 행안부는 이 조건에 부합하지 않지만 직선기선(우리나라 영해의 기준이 되선 선)까지 거리가 10이하로 접근성이 낮은 섬 9곳을 추가로 지정해 지원하기로 했다. 추가된 섬은 육지와의 항로거리가 50이상인 섬 6, 정기여객선이 없거나 운항빈도가 낮은 섬 3곳이다.

추가로 지정된 9개 섬은 부안 하왕등도, 전남 영광 죽도·안마도·대석만도, 전남 여수 동도·서도, 제주 상추자도·하추자도, 충남 보령 황도등이다.

국토외곽 먼섬은 군사·안보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다 해양 영토의 지배권을 강화해주는 우리나라 국경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행안부는 이번 시행령 제정을 통해 먼섬의 구체적 범위가 확정됨에 따라 대상 섬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종합발전 5개년 계획도 연내 수립할 계획이다. 종합계획에는 도로·접안시설 확충, 소득증대 및 관광 활성화 등 주민생활 개선 전반에 필요한 사항이 담길 예정이다.

국토외곽 먼섬의 43곳의 총인구는 지난해 말 기준 2,618명이다. 이들 섬의 인구유출 속도는 고령화 등의 여파로 다른 인구소멸위험지역에 비해 10배 이상 빠르다. 인구감소로 무인도가 되면 우리나라 영토주권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세계 170개국이 가입한 유엔해양법협약(121)에 따라 섬에 사람이 한명도 살지 않을 경우 해당 국가는 배타적 경제수역(200해리), 대륙봉 등에 대한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그만큼 해양 영토가 줄어드는 것이다. 특히 먼섬 인구위기는 2의 독도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제 일본은 중국·러시아와 각각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쿠릴열도를 두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

국토외곽 먼섬은 기존 지정 인천 옹진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소연평도, 전북 군산 어청도, 전북 부안 상왕등도, 전남 여수 거문도, 전남 영광 횡도, 전남 완도 여서도, 전남 진도 죽도·곽도·맹골도·동거차도·서거차도·상하죽도, 전남 신안 가거도·홍도·영산도·장도·대흑산도·만재도·하태도·중태도·상태도·대둔도·다물도, 경북 울릉 울릉도·죽도·독도, 제주 비앙도·우도·마라도·가파도 등 34개 섬과 부안 하왕등도, 전남 영광 안마도·대석만도·죽도, 전남 여수 동도·서도, 제주도 상추자도·하추자도, 충남 보령 황도 등 추가 지정 9개 섬을 포함 모두 43곳이다.

상왕등도는 부안 격포항에서 뱃길로 4시간(32)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50여명의 섬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왕등도 이름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 풍이 오른 섬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용문암 등 다양한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고, 서쪽 바닷속 퇴적물에서 1996년 매머드의 어금니 화석 2점이 발견돼 연구 가치가 높은 섬이기도 하다. 영해기점인 상왕등도에는 대한민국 영해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북서쪽 절벽 아래 태극기가 부착된 첨성대 모양의 영해기준점 표지가 설치돼 있다.상왕등도는 국가관리 연안항으로서 조업하는 어민들의 피난처이자 길잡이 역할도 하고 있다.

상왕등리는 하왕등리와 함께 왕등도라 하여 조선 시대에는 부안현(扶安縣)에 속했다. 1896(고종 33)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개편될 때 전라남도 지도군에 편입됏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북암, 모괴도, 열도를 병합, 전라남도 영광군의 위도면 상왕등리로 개설하였다. 1963년 위도면이 부안군에 편입되어 부안군 위도면 상왕등리가 됐다.

하왕등도(下旺嶝島)는 상왕등도(上旺嶝島)와는 2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위도(蝟島)에서 북서쪽으로 23떨어져 있다. 동서로 길게 누운 하왕등도는 남북 방향으로 누운 상왕등도보다 넓고 낮아서 생태 환경은 더 나은 편이지만, 지세가 험하고 평지가 적어서 사람이 살기 어렵다. 해안은 온통 바위투성이의 암석 해안으로 배가 접안하기도 어렵다.

상왕등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300년쯤 전 이곳으로 유배 온 노씨(盧氏), 남씨(南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하였다는 것만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전국 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왕등도-위도 서쪽에 있으며, 물길로 100리 떨어져 있는 작은 섬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다. 사면이 모두 절벽으로 되어 배가 정박할 수 없는 곳이며, 섬 가운데 닥나무·등나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왕등도 사람들이 증언한 정착 연대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상왕등도(上旺嶝島)의 지명 유래는 왕등(王登)이라는 문자 그대로 옛날에 이곳에 왕이 올랐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처음에는 상왕등(上王登)이라고 하였으나 구한말에 이곳에 유배를 온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가 지명이 너무 높다 하여 상왕등(上旺登)이라 하였다고 한다. 상왕등도와 하왕등도는 위치의 위아래를 뜻하는 것으로 왕등도 주민들은 상왕등도를 웃왕등 또는 상도, 하왕등도를 아래왕등 혹은 하도라고 부른다. 주민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며, 마을 주변에서 약초가 재배된다. 흑염소를 방목하여 키우는 농가도 있다. 연근해 일대는 봄과 여름에 제주 난류가 북상하여 난류성 어족이 풍부하고 광어, 농어, 우럭, 돔 등이 잡힌다.

거듭된 여러 번의 상소가 헛되자 간재선생은 아예 홀로라도 저들 오랑캐의 습속에 물들지 않고 오직 도덕을 일으켜 세우겠다며 절해고도 왕등도로 고군산으로 거처를 옮기며 자신의 몸을 바르게 닦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칠십이 넘은 나이였다.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한 비록 나라가 오랑캐의 아가리에 들어가더라도 거기 사는 백성, 민족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10년 뒤 100년 뒤에라도 도덕과 윤리는 살아나 왕도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합천의 선비 창수 정형규(蒼樹 鄭衡圭)는 고향 친구 전순형(田舜衡)과 함께 부안 계화도로 간재 선생을 뵈러 온다. 1915년 을묘년 이었다. 거기에는 마침 전부터 안면이 있던 김여종 택술(金汝鍾 澤述)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간재 선생을 뵌 다음 개암동의 흥무왕 김유신 장군 유허비며 우금암의 산성을 거쳐 월명암과 직소폭포까지 두루 살폈다. 실상 창수 일행이 간재 찾아 서쪽으로 떠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909년에도 역시 고향 친구 전기진(田璣鎭)과 함께 고군 산으로 스승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가 가는 곳이 어디든 간에 그의 주변에는 공부하는 재실과 숙소가 급조 되었다.

창수라는 아호는 간재 선생이 지어주었다. 주자의 시 창창곡중수, 울울창창한 골짜기에 꼿꼿하게 선 한 그루 거목이 되라는 그런 뜻이라고 한다. 합천의 선비가 그쪽의 퇴계나 남명 같은 학풍이 확고하게 확립된 지역에서 율곡 우암으로 이어진 학맥을 따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학문의 깊이는 지역과 인맥을 초월하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반증이라는 이야기다.

간재는 명실상부한 보수의 두령이었다. 그의 눈에는 조선과 다른 나라는 오직 공자님의 나라 중국뿐이었다. 지난 3천년 동안 중국 대륙 중원에 들어선 왕국의 이름이 어떻게 바뀌었든 간에 공자의 도가 행해진 나라만이 나라요, 그 밖의 나라들은 짐승과 같은 심성을 가진 오랑캐의 나라로 여겼다. 흔히 동양 삼국이라 하지만 일본 같은 왜놈의 나라는 섬나라라 해서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인성을 갖지 못한 탓에 나라로 보지 않았다. 다른 서양의 모든 나라도 마찬가지로 보았다. 오죽하면 이러한 철저한 보수기질에 대해 철종의 부마이자 개화파의 거두인 박영효는 간재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고종에게 간청했다. 모진 말을 삼가는 간재 또한 이완용 박재순 등 을사5의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렸다.

국토외곽 먼섬은 국토 수호와 해양 영토 확보 관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국토외곽 먼섬을 지켜주는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내용들을 계획에 담아 체계적으로 지원해 나가기로 했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