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골목길의 '삼원한약방'
전주 경기전은 ‘용의 눈물’ 등 많은 사극이 촬영됐으며, 전동성당은 영화 ‘약속’, 전주성심여중·여고에서는 ‘클래식’이 촬영됐다. 바로 전동성당이 있는 거리(태조로)로 나가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어여쁜 집 한 채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전지현의 청순 데뷔작인 ‘화이트 발렌타인’이 촬영된 곳이다.
삼성전당포라는 간판이 보이는 이 집은 분위기 그 자체에 함몰되기 쉽다.
이 영화에서 박신양이 비둘기를 날리는 집과 아담하고 고풍스런 전지현의 책방 모두 이곳에서 촬영됐다. 2층 창문에서 전지현이 불쑥 고개를 내밀 것 같기도 할 정도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쉬이 걸음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집은 도로의 모서리 부분만 2층으로 올려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건립 일은 1933년 5월 8일(완산구 일반건축물대장)로 나온다. 상가 출입은 도로에서 직접 이뤄지며, 주택은 남쪽에 나있는 골목길을 통해 이뤄지도록 설계, 주거 영역과 상사 영역의 출입을 서로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계획한 건물이다.
1954년 6월 28일 전주의 공설전당포 설치조례안이 통과돼 운영 자금은 중앙 당국에서 보조를 했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대부 금액은 1회 5,000원 이내, 1세대에 1만원 이내로 제한했으며, 대부금 이자는 월 5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옥마을이 번창하면서 지금은 로하스 한지(경인상사)가 들어와 영업을 하고 있어 완전히 이전과 딴판이지만 여전히 바로 앞 베테랑 칼국수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바로 바로 옆에 삼원한약방이 자리하고 있다. 1,200명이 응시한 지난 1967년 전라북도한약종상시험에서 이 집의 주인 김종육씨가 16위를 차지한 것이 인연이 돼 시작한 한의원이다.
주인은 부안에서 전주로 이주한 후, ‘삼원’이란 주인의 아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맨 처음엔 삼원서원이라고 명명했다.
‘삼원(三元)’이란 천지인(天地人)의 소통관계를 사람과 지구와 하늘을 연관시켜서 일컫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삼원’이 학문에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삼원서원이란 현판을 올렸으며, 하냥 꿈을 먹으며 한약방을 운영하고자는 뜻으로 삼원한약방이라 했다.
도시형 한옥으로 가로에 길게 면하고 있는 이 건물의 건립 일은 1946년 5월 8일(사용 승인, 전주시 완산구 일반건축물대장). 안채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사랑채는 안채와 수직으로 놓여진 도로에 면하고 있으며, 담장으로 공안이 구분된 것이 특징으로 보인다.
마당은 정원으로 조성, 근대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굴뚝이 지붕 위로 솟아있는 이 건물은 1939년도에 건축됐다는 주인의 설명이다. 주인이 집을 수리하면서 본 상량문에 이같이 기록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주 성심여중‧고 교문이 있는 경기전길은 수많은 여학생들의 발길을 안고 있는 길이다. 학교에 오갈 때만 아껴 신었던 여학생들의 운동화 발자국들이 무수히 찍혀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여학생들의 뒤를 쫄쫄 따라다니던 남학생들의 발자국도 함께 찍혀 있다. 세라복이라고 불렀던 해군들이 입던 군복과 비슷한 성심여고 교복은 먼 곳에서 보아도 금방 눈에 띄었고 교복이 예쁘다고 전국체육대회 때는 기수로 나서기도 했다.
천주교 재단인 해성학원의 계통인 성심여중‧고는 1926년 라크루 신부에 의해 해성강습소가 설치되면서부터 시작된다.
1932년에는 이춘화 씨가 학교 터를 기증하고 교실을 신축하여 기증한다. 그리하여 1938년 ‘해성심상 소학교가 개교된다. 그 후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되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해방이 되자 1946년 10월에 ‘성심여학원’이 개교됐고 1948년 9월 16일, ‘전주성심여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1952년에는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가 개교를 하였다. 그 후 1970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 운영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 많은 세월이 말없이 흘러가면서 많은 것들이 변해 갔지만 학교 길에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들이 있다. 학교 교문 옆에서 학교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는 집 한 채다. 자세히 보면 학교 울타리 안이 아니라 울타리 밖이다. ‘ㄷ’ 자로 둘러싸여 있는 개인 집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서 학교 마당에 있는 집을 팔지 않고 버티어 온 것일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아들이 징병되어 군대에 가게 됐다. 그 후 전쟁이 끝났는데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망통지서가 온 것도 아니었다. 실종이 된 것이다. 행여나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집을 찾아올 것인데 이사를 가버리면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아들을 기다리기 위하여 이사를 가지 않고 집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언 70년이 지나갔다. 어머니도 아들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후손들도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이 골목을 지켜온 가게와 집들이 있다. 일본 시대 다다미 집도 있고 환갑을 넘긴 가게들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삼원한약방이다.
약방 주인이 서울대 출신이란다.
1938년생인 약방 주인은 지금도 약을 지어주고 신수를 봐준다.
목소리가 쩡쩡하다. 기자들이 자주 찾아오는데 기자들에게 월급을 받느냐고 묻는단다. 월급을 못 받는다고 하면 그런 일 당장 때려치우고 다른 데 취직을 하라고 야단을 친단다. 자기가 평생을 매달릴 일을 찾아서 하라고 권한단다.
부안 출신으로 부안에서 잘 나가던 때에 정치에 입문하려다 좌절되자 이곳으로 옮겨와 한약방을 열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단다.
한약뿐만 아니라 사주나 신수도 보아주고 작명도 해준단다. 또 한 사람의 경기전길 지킴이를 만난 것이다.
특별히 오래도록 한 골목을 지켜온 성심여중‧고 등하교 길이었던 한옥마을 경기전 길은 다른 학교 길보다 더 많은 추억들을 간직한 채 오늘도 많은 여학생들의 발자국을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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