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10> 피어난 독립의 불꽃 만주거쳐 다시 삼례로! 김춘배 의사
1934년 10월 2일 밤.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경찰 주재소에 괴한이 침입한다. 그는 홀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권총 2정(26식)과 실탄 100발, 기관총 5정(38식)과 실탄 600발, 단식 보병총 1정을 빼앗아 유유히 달아난다. 그의 이름은 김춘배(金春培, 1906∼1942). 서슬 퍼런 일제가 그토록 붙잡고 싶어했던 애국열사다.
완주군 삼례에서 태어난 김의사는 1917년 할아버지 김헌식을 따라 만주 용정으로 이주, 아버지는 용정에서 포목 장사를 하고 큰아들 김성배는 홍범도 장군 밑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동생 김춘배는 아내와 함께 양복점 일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김의사는 1927년 길림성 돈화연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정의부 부대에 가담해 무장 항일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8년간 청진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옥했다.
1934년 출옥 후 공산촌락을 건설할 작정으로 혼자 함경북도에 있는 신창주재소에서 대량의 총기와 실탄을 탈취했다가 며칠 후 체포된다.
그해 10월3일 홀로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주재소를 공격해 총기 8정과 실탄 700발을 탈취했다.
2만 여명이 동원된 일제 포위망을 피해 일본인 순사부장 등에게 총상을 입히는 등 활약했으나, 서울로 내려오다가 10월22일 붙잡혔다. 혼자서 주재소를 습격한 이 항일운동은 ‘함남권총사건’, ‘북청권총사건’ 등으로 불렸다. 그는 해방후 출옥했지만 1946년 12월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고인은 간도에서 정의부원으로 군자금 모집의 최전선에서 활동했고, 국내 항일운동으로 함경남도에서 단독으로 의거를 실행한 점은 1930년대 군자금 모금 활동의 대표 사례로 역사적 의미를 가졌다.
삼례에서 일제 침탈에 맞서 김춘배 집안의 김계홍, 김창언 등이 결연히 일어났고, 청산리 전투 등 독립군 무장투쟁이 있던 간도에서는 김춘배가 활약했다. 그러나 분단의 역사로 인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슬픔이 남아있다.
<사진>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
1934년 5월 독립운동가 김춘배의사가 8년형을 마치고 만주에서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의사의 형 고 김성배 목사, 김의사, 김종수(당시 8살)
독립운동가 김춘배의 활약상을 보도한 당시 신문 등의 자료가 행사장에 놓여 있다.
연극 ‘김춘배 홀로아리랑’은 독립운동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한 인간이 가져야만 했던 자식, 부모, 남편으로서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을 차분히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획했다.
전북향토문화연구회는 독립투사 김의사 항일투쟁 학술대회를 가졌다.
김춘배의 검거를 다룬 동아일보 호외 '근래 희유의 함남 권총 사건' 제하의 1934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 호외판. 김춘배의 검거 소식을 다뤘다.
김의사는 1990년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추서 받았다.
독립운동가 김춘배를 조명하기 위해 열린 행사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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