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07> '보천교' 건물을 지은 심사일과 유익서, 그리고 교주 차경석
심사일(沈士一, 1879~1972)은 부안군 하서면 장신리 복룡마을에서 출생했다. 호는 능하(能下)이다.
부안은 호랑이 지명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당대 손꼽히는 대목장들을 배출한 지역이다.
심태점(沈泰点), 심사일, 이한기(李漢基) 대목장, 또 이들에게서 목수 일을 배운 고택영(高澤永, 국가 무형 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그리고 고택영 대목장에게서 사사받은 전 전북 무형유산 예능보유자 제30호 김정락 대목장이 있다.
심사일은 부안 사람 윤성실의 제자이자 고택영의 스승이다. 그는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에 위치한 '노휴재(老休齋)'를 건축했다. 또, 보천교(普天敎)의 '차천자궁(車天子宮)'을 지었으며, 1928년 보천교의 본당 건물을 조계사 대웅전으로 이축하는 작업을 도맡았다.
정읍 입암면 대흥리에 있는 보천교는 600만 신도를 자랑했던 곳이다. 1929년 대지 2만평에 건물 45개 동이 들어섰다고 한다.
'차천자궁'은 천자(天子)를 표방한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이 머물던 궁으로, 중국의 천자궁을 모방한 것으로 규모나 건축면에서 전설적인 건물이다.
차경석은 1925년부터 4년에 걸쳐 대흥마을 2만평 부지에 대규모 성전(聖殿)을 지었다. 건축물이 45채, 부속건물이 10여 채였다. 그 중 중심교당이 '십일전(十一殿)'이었다. '십일전'은 건평 350평에 높이 30m, 가로 30m, 세로 16.8m에 이르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도교적 요소가 강한 민족·민중종교로 분류된 보천교의 성전이었던 '십일전(十一殿)'. 따라서 문양이나 조각들이 불교양식과는 거리가 있는 선도적인 색채가 담겨 있다고 한다. 더러는 경복궁 근정전을 모방,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십일전'은 땅과 무극(無極)을 상징한 '십(十)'과 하늘과 태극을 상징한 '일(一)'을 적용하여 붙인 이름이다
목재는 백두산 근처의 침엽수를 베었고 조선팔도의 석재를 모아왔다. 1929년 완공한 '십일전'을 일제는 황와(黃瓦)를 이었다는 이유로 지붕을 헐게 했다.1936년에 해체, 현 서울 조계사 대웅전이 됐다.
건물이 조계사 대웅전으로 이축할 당시 경매 가격은 500원(건축비 50만원)으로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고 한다.
조계사 대웅전 능하 심사일이 도감독으로 소-대목장 100여 명을 지휘, 완성했다.
'십일전' 건물의 꽃인 공포는 고창출신 대목장 유익서(1882~1944)가 맡았다.
6·25 전쟁 당시 정읍의 내장사 대웅전이 소실되자 심사일이 보천교 보화문 건물을 이축하여 내장사 대웅전으로 사용했으나 이마저도 화재로 소실됐다.
'보화문'은 부안 김상기 씨의 집이 됐다가 내장사 대웅전이 됐다.
지난 2012년 겨울 내장사의 화재로 잿더미가 돼버린 대웅전이 바로 유익서 대목장의 솜씨로 지은 '차천자궁'의 건물을 뜯어다 세운 것이었다.
정문이었던 2층 누각 보화문은 내장사 대웅전으로 재건축됐다. 내장사는 6·25 전쟁 때 건축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석재로 된 대웅전 배흘림 기둥 3개만 살아 남았다. 지난 화재로 내장사 대웅전이 다시 소실됐다.
1921년 차경석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리고 국호를 '시국(時國), 교명을 (보화 普化:뒤에 보천교라 함)로 선포했다.
정문은 보화문이라 이름했는데 광화문을 본떴다고 한다. 보천교 건물 중앙에는 경복궁의 근정전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게 바로 십일전이라고 한다.
건축물이 45채, 부속 건물이 10여 채로 성전(聖殿)이라 불렸다. 보천교 본당이지만 궁궐을 짓고자 한 것으로 본다.
심사일은 평생 목조 건축 장인으로 지내다 1972년에 사망했다.
심사일의 제자론 이안기, 조두선, 정재숙, 고택영 등이 있다. 동료로는 박인겸이 있다. 심사일을 재주가 뛰어난 목수로 증언하고 있다.
대흥리(접지리)는 본래 정읍군 서일면 지역이다. 1789년에 작성된 ‘호구총수’에 정읍군 서일면 대흥촌리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어서 역사가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12년에 작성된 ‘지방 행정구역일람’에는 정읍군 서일면에 대흥(촌)리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쇠락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입암면 접지리에 편입됐다.
접지리 동부와 서부가 분리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936년 장봉선 저(著) ‘정읍군지’에는 대흥동부와 대흥서부로 이름이 나온다.
주민들은 동서로 나눠 천원천 둔덕에서 거대한 용줄을 만들어 줄다리기하며 즐겼는데 그 후 마을이 분리되었다고 기억한다.
당시에 진등마을 앞 천변은 넓은 모래밭의 둔덕이었다. 이곳은 보천교가 활발할 때 주차장으로 이용됐다. 마을 안에는 하천이 많았다.
증산 강일순이 이곳에 머물며 도를 펴고, 고수부(고판례)가 태을교의 교문을 여는 동안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도 했으며, 1911년 이후 증산의 제자인 월곡 차경석이 보천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교인이 모여들어 마을이 크게 번성하게 됐다.
차경석교주가 대흥리에서 보천교를 포교하면서 1921년에는 전국 각지의 교인들이 엄청난 세력으로 확장해 나갔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기구와 조직을 가지고 교전을 경영하여 한때 600만 교도를 거느리기도 했다.
보천교 이전 대흥리는 10여 호로 이뤄진 작은 촌락이었으나 교세의 엄청난 확장으로 전국에서 수많은 교도가 모여들어 700여 호에 이른 적도 있었다.
차경석은 본명이 윤홍이며 호는 월곡으로 1880년 지금의 고창군 부안면 연기동(선운사 입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차치구는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피체지인 순창 피노리까지 수행했던 동학 접주이자 장령이었다.
차경석은 아버지가 흥덕현감에게 죽음을 당하자 14살의 어린 나이로 부친의 시신을 업어다 집으로 모셔와 장사를 치렀다. 1899년 기해농민봉기에 참여했고, 그 자신도 장성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풀려나온 일도 있었다.
차경석은 1907년 5월 17일 전주 가는 길에 김제 금구면 거야주막에서 강증산을 운명적으로 만나 새로운 길을 걷는다.
건장한 체구에 뱃심이 두둑했고,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1926년에는 당시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직접 정읍 본부로 찾아와 면담할 정도였다.
보천교는 강증산의 유훈 실천에 노력했다. 강증산의 유훈인 지상 선경사회 건설을 저해하는 식민지 체제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한국의 독립을 기도하고 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유용했다. 이것이 1921년경 일제의 보천교 탄압 명분이 됐다.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보천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다. 일제는 치성금 등으로 모인 보천교 교금의 독립운동 자금 유입 동향을 예의주시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 후 정읍을 찾아 “정읍에 빚진게 많다”고 얘기했다. 이는 보천교를 통한 독립운동자금 제공이 임시정부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됐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보천교는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안고 모여든 자들로 이뤄진 신앙 공동체라는 점에서 이는 폭넓게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독립을 위해 가문과 자신을 희생한 애국지사들 다음으로 민족 종교운동에 참여해 인적, 물적 자원을 아낌없이 제공한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보천교의 세력이 커지자 일제는 교단에 대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회유하기 시작했다.
차경석은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내각 총리대신에게 친일 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토를 순회하면서 보천교의 소개와 함께 대동아단결(大東亞團結)을 강조하는 친일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났고, 고위 간부들이 신도를 이끌고 별도의 교단을 세우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교세는 크게 약화 되기 시작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대흥리 보천교 본소에서는 매년 다섯 차례씩 교인들에 의해 치성식이 올려지고 있는데 영정은 모시지 않고 방안에 12층의 나무탑을 놓고 식을 올리고 있다.
대흥리엔 1920년경부터 직물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해 90여 개가 호황을 이뤘으나, 지금 쇠퇴해 20여 개 업체가 거즈, 소창, 개량 한복의 재료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접지리엔 보천교 석축 담장 일부가 남아있다.
담장은 도로에서 보았을 때 최고 높이가 1.80m이고, 평균 1.54m이다. 이 석축 담장은 가로 21~33cm, 세로 30~38cm 가량의 쐐기형 돌을 접착제로 위아래가 절반쯤 겹치게 외벽과 내벽을 쌓았고, 내외벽 사이에는 콘크리트를 채워 넣었다.
대흥리(행정구역상 접지리) 지역의 땅이름이 이전부터 삼군리(三君里), 수령동(守令洞), 조회동(朝會洞), 군령촌(軍令村), 재령봉(宰令峯), 천관산(天冠山) 등 왕조를 뜻하는 지명으로 불려 새로운 왕조가 이 지역에 개창될 것이라는 믿음이 민간에 유포됐다는 주장도 있다.
향토사학자 김재영박사(전 정주고 교사)는, ‘풍수와 땅이름으로 본 정읍의 종교적 상징성’이란 논문에서, 1920년대 신도수가 6백만명에 달했던 보천교의 예를 들어 “왕조를 뜻하는 이 지역의 땅이름과 신흥 종교의 발흥이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식민지시대 당시 일반 민중들이 이 일대에 자리잡은 보천교를 새로운 왕조로 인식, 전답을 팔아 이 지역으로 이주했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또, 1920년대 당시 기미독립운동이 무위로 끝나 민중이 절망에 빠졌을 때 보천교 교주인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라는 이야기가 교세 확장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당시 민간에 유포된 이같은 이야기가 이 일대의 땅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으로 인해 더욱 신도들을 흡입할 수 있었으리라.
증산교에서 비롯된 보천교는 일본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한때 신도수가 6백만명에 달하기도 했으나 사이비종교로 인식돼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바 있다.
최근들어 독립운동과의 연관성이 알려지면서 민족종교로서의 면모에 대해 연구가 진행중이다.
http://sjbnews.com/news/news.php?number=828115
<사진>
보천교 교주 차경석(고창출신)
보천교의 문제를 파헤친 당시 동아일보 (1929.7. 17일자)
정읍시 입암면에 있던 보천교의 '십일전'이 서울 조계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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