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11> 500년 전 자수를 사랑한 소세양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청송서 자수첩은 조선 최고의 학자요 문장가로 익산출신인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일화가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왕조와 함께한 자수에 대한 기록이 흥미롭다.
자수에 대한 기록은 일곱 차례 정도 언급된다. 그중 문종 즉위년 경오(1450년) 2월 28일의 기록이다.
'대행왕(大行王)이 훙서(薨逝)하던 저녁에 후궁(後宮)으로서 머리를 깎고 여승(女僧)이 된 사람이 대개 10여 명이나 되었다. 각궁의 자수(刺繡) 잘하는 사람을 내전(內殿)에 모아서 부처를 수놓게 하고, 또 밖에서 공장(工匠)을 모아서 불상(佛像)을 만들게 하고, 중의 무리로 하여금 그 일을 주간(主幹)하게 하였다'”
왕이 돌아가시던 날 저녁에 후궁 10여명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 각궁의 자수를 잘하던 사람들은 모두 내전에 모여서 소복을 입고 소임에 따라 부처본을 그리고, 수놓을 비단을 마련하고, 실을 만들어 부처를 수놓고 있는 광경이 상상된다.
붉은 비단조각에 화려한 비단실들을 꼬아 금사나 은사로 징금하여 부처를 수놓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상중의 일과는 무관하게 그 정경들은 화려한 색감으로 가득했을 것이고, 정성 가득한 손길로 망자를 위한 수를 놓았을 것이다.
순종 4년(1911) 4월27일에는 “한성고등여학교(漢城高等女學校)에서 동교(同校) 졸업생도(卒業生徒)들이 만든 작품 중 앵두나무 조화분재(造花盆栽) 1발(鉢), 자수비돌(刺繡臂突) 1개(箇), 자수견(刺繡絹) 1매(枚)를 진상(進上)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성고등여학교는 현재 경기여고의 전신이다. 그 졸업생들이 수놓은 작품 중에서 앵두 나무 조화분재, 자수비돌, 자수견을 특별히 뽑아서 왕에게 진상하였다는 기록은 무너져 가는 왕가의 뒤안길에도 자수가 진상되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애잔한 정경으로 다가온다.
몇 년 뒤 순종 8년에는 “고노 히로나카(1849~1928, 1914년 오쿠마 내각에서 농상무상을 역임)가 순종과 고종에게 자수 병풍을 각각 한 틀씩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농림부장관이었던 고노 히로나카가 일본수를 놓은 자수병풍을 선물했다. 한국인들이 생활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병풍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아마도 자수 병풍을 선물했을 것이다.
이미 주권이 넘어가버린 나라의 왕에게 바쳐진 병풍이 어떤 수였는지, 그 병풍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병풍을 받은 왕의 심경은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조선 문장가로 대제학을 역임한 ‘소세양’은
16C 최고 명필 성수침에 글씨 부탁해
명나라 자수 명인 수소문해 ‘첩’을 제작,
당대 최고 시인 이태백 한시 내용을 담았다.
가보로 삼고 간직한 사연 상상의 여지가 엿보이며 송도 기생 황진이와 사랑 연관 추측도 전한다.
소세양은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중국으로 사행을 하면서 평소부터 존경해 마지않았던 후배인 성수침(成守琛)에게 글씨를 부탁해 소지한 채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던 12월에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명나라 수도였던 연경으로 가서 그곳에서 백방으로 자수 명인을 수소문 끝에 만나서 후한 값을 주고 성수침의 글씨를 수놓게 해 이를 가지고 돌아왔고, 이를 첩으로 만들어 가보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의 명필과 중국 자수 명인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조억(趙億)이란 이가 1659년에 쓴 자수첩의 발문이 남아 있어 가능했다.
발문에 의하면 이 첩은 소세양으로부터 임진왜란 무렵인 1594년에 평산신씨의 소유가 됐고 정유재란 당시 호남과 해서로 피란해 병화를 벗어날 수 있게 됐다.
평산신씨 신득준(申得濬)이란 이는 외손자에게 이를 전했고 그가 바로 발문을 쓴 조억이라는 내용이다.
발문에는 이 첩이 진주 소씨로부터 평산 신씨로, 그리고 다시 한양 조씨에게로 전전한 내력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전래된 이 첩의 소장 내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세양이 성수침에게서 받은 한시 두 수는 모두 중국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태백(李太白)의 작품이다. 이 가운데 ‘여산 오로봉에 올라서(登廬山吾老峰)'란 시의 내용이다.
여산 동남쪽의 저 오로봉이여
치솟은 그 모습 금부용 같은데
구강의 풍광 손에 잡힐 듯하여
내 이곳에다 쉴 집 지어 보려네
廬山東南五老峰
靑天削出金芙蓉
九江秀色可攬結
吾將此地巢雲松
중국의 당대의 시를 16세기의 대표적 명필이요 학자였던 성수침이 써주었고 그 글씨를 수를 놓아 귀히 가보로 간직하였다는 이야기는 예사롭지 만은 않은 듯하다.
성수침의 행서체는 조선 초 이래 유행되던 조맹부체와는 다른 독특한 것으로, 당대는 물론 이전에도 그 예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자성일가(自成一家)’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서법을 계승했다는 서계 박세당은 그 글씨의 특징을 ‘탈속(脫俗)’과 ‘기일(奇逸)’에 두었다는데 적절한 평가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이처럼 놀라운 성취에도 이를 그저 ‘여사(餘事)’로 여겼다. 그러함에도 조선의 선비들은 그의 글씨를 보배로 여겨 서첩으로 꾸며 가보로 간직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소세양은 성수침의 글씨를 단순히 글씨 작품으로 간직한 것이 아니라 이를 자수로 놓아 보관한 것에는 특별한 연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세양은 대제학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또 “훌륭한 재주가 있어 글씨도 잘 쓰고 시문에도 능했다”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의 행적에 송도 기생 황진이와의 사랑이야기가 흥미롭다.
황진이가 지은 한시 ‘야사하(夜思何)’는 그녀가 소세양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부른 노래이다. 유명 가수 이선희가 번안, 불러 그 노랫말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소세양이 중국으로 사행을 할 때 송도를 거쳐갈 수 있었고, 당시 송도의 황진이는 석학 서경덕으로부터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서경덕의 정사를 자주 방문하여 당시를 배우고 익힌 일화가 전하기도 하는 것과 유관한 것은 아닐까.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조선의 선비가 중국까지 가서 수를 놓아 자수첩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다른 상상의 여지를 준다.
야사하를 번안한 이선희 노래의 한 소절에 황진이의 마음을 담아 들어본다.
소세양을 향한 사랑이 화인(火印)처럼 찍힌 황진이의 가슴이 느껴진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얘기를 해 주세요”
내 자신이 꽃잎 떨어지는 풍경 앞에서는 비단결처럼 떨고 폭풍처럼 힘든 일 앞에서는 저 뜨거운 열기도 꿋꿋하게 견디는 면 천처럼 견고한 단단함으로 서 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
청송서 자수첩은 1533년 경에 만들어진 것 같다
청송서 자수첩에 조억이 쓴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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