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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7> 전북 9곡과 8경남원 용호구곡

                                                       이삼만이 쓴 글씨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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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6> 전북 9곡과 8경

남원 용호구곡

남원시 주천면에 위치한 용호구곡((龍湖九曲)은 지리산 서북쪽 능선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대표적 명승으로, 특히 구룡폭포(九龍瀑布)는 만복대(1,438m)에서 발원해 남원시 주천면으로 흘러드는 원천천 중간에 형성된 구룡계곡 최상류에 위치한 폭포로, 원천천 상류에 있어 원천폭포라고도 불리운다.
구룡계곡에는 음력 4월 초파일이면 하늘에서 아홉 용이 내려와 폭포를 하나씩 끼고 놀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 계곡의 구룡폭포는 ‘남원팔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지리산 서북능선에서 내려오다가 구룡계곡(九龍溪谷)이다. 이 계곡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주천면 덕치리까지 약 3km에 이르는 심산유곡이다.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와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폭포와 소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우리는 이곳 구룡계곡을 용호구곡(龍湖九曲)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구곡(九曲)이 많다. 남원의 용호구곡을 비롯, 괴산의 화양구곡(華陽九曲), 선유구곡(仙遊九曲), 쌍곡구곡(雙谷九曲), 고산구곡(孤山九曲), 제천의 용하구곡(用夏九曲), 능강구곡(綾江九曲), 단양의 운선구곡(雲仙九曲), 양평의 벽계구곡(碧溪九曲), 청양의 지천구곡(之川九曲), 공주의 갑사구곡(甲寺九曲), 영덕의 옥계구곡(玉溪九曲), 성주 김천의 무흘구곡(武屹九曲), 영주의 죽계구곡(竹溪九曲), 부안의 봉래구곡(蓬萊九曲) 등이 그것이다. 화천의 곡운구곡(谷雲九谷), 삼척의 무릉구곡(武陵九曲), 가평의 용추구곡(龍湫九曲)도 있다.

왜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 남송의 성리학자 주희(朱熹)의 영향 때문이다. 주희는 무이산(武夷山) 아홉 굽이의 절경을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칭했다.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동굴을 가진 무이산은 푸젠성(福建省) 제일의 명산이다. 무이구곡은 무이산 구비구비 8㎞에 이른다. 무이구곡 제1곡은 승진동(升眞洞), 제2곡은 옥녀봉(玉女峯), 제3곡은 선기암(仙機巖), 제4곡은 금계암(金鷄巖), 제5곡은 철적정(鐵笛亭), 제6곡은 선장봉(仙掌峯), 제7곡은 석당사(石唐寺), 제8곡은 고루암(鼓樓巖), 제9곡은 신촌시(新村市)이다.

우리나라에는 구곡 관련 인문지리, 자연, 문화 유적이 100여 곳이나 있다.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구곡 관련 유적을 통해서 주희가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주희는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상수학(象數學)에서 9(九)는 완성수 10(十)에 가장 가까운 수로써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경지를 상징한다. 10은 신의 영역이다. 바둑의 최고수도 10단은 없으며, 9단이 최고다. 성리학자들에게 있어 구곡의 9는 인격의 수양과 학문의 도야를 통해서 도(道)의 완성에 이른 단계를 상징한다. 주희 이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자신의 구곡에서 학문과 도의 완성을 추구했다.

용호구곡의 제1곡은 송력동(松瀝洞, 송력동폭포), 제2곡은 용소(龍沼) 일명 불영추(佛影湫, 또는 玉龍湫), 제3곡은 학서암(鶴棲岩), 제4곡은 서암(瑞岩) 일명 구시소, 제5곡은 유선대(遊仙臺), 제6곡은 지주대(砥柱臺), 제7곡은 비폭동(飛瀑洞), 제8곡은 석문추(石門湫) 일명 경천벽(擎天壁), 제9곡은 교룡담(蛟龍潭)으로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제1곡

주천쪽 지리산 국립공원 매표소에 조금 못미치고 있는 송력동폭포를 1곡이라 한다.

제2곡

매표소를 조금 오르면 높이 5m의 암벽에 이삼만이 썼다는 ‘용호석문’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는 절벽 아래 흰 바위로 둘러싸인 못이 2곡으로 불영추라 한다.

제3곡

육모정에서 300m 지점에있는 황학산 북쪽에 암석층이 있는데 이 암벽 서쪽에 조대암이 있다. 이 조대암 밑에 조그마한 소가 바로 4곡이며, 학들이 이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는다고 해서 학서암이라 한다.

제4곡

학서암에서 300m쯤 오르면 흰 바위가 물에 닳고 깎여 반들 거리고, 구시처럼 바위가 물살에 패여있다. 또 거대한 바위가 물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건너편 작은 바위는 중이 꿇어 앉아 독경하는 모습같다고 해서 서암이라고 하며, 일명 구시소로 더 알려져 있다.

제5곡

구시소에서 1km지점에 45도 각도로 급경사를 이룬 암반을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곳에 깊은 못이 5곡인 유선대이다. 유선대 가운데에 바위가 있는데 금이 많이 그어져있기 때문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 신선들이 속세의 인간들에게 띄지 않기 위해서 병풍을 치고 놀았다 하여 은선병이라고도 한다.

제6곡

유선대로부터 500-600m쯤 거리에 구룡산과 그 밖의 여러갈래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게곡 물이 여기에서 모두 합류한다. 그 둘레에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제일 뾰족한 봉우리가 계곡물을 내지르는 듯해서 그 봉우리 이름을 지주대라 하고, 이곳을 6곡이라 한다.

제7곡

지주대로부터 왼쪽으로 꺾이면서 북쪽으로 1km 지점에 거의 90도 각도로 깎아지른 듯한 문암이라는 암석층이 있는데, 이에 속한 산이 반월봉이고, 여기서 흘러내린 물은 층층암벽을 타고 포말려 비폭동이라 하며 이를 7곡이라 한다.

제8곡

비폭동에서 6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고,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그 곳을 통과한다 해서 석문추라 하는데, 바로 이곳이 8곡이다. 경천벽이라고도 부른다.

제9곡

경천벽에서 500m 상류 골짜기 양켠의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있다. 멀리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두 갈래 폭포를 이루고, 폭포 밑에 각각 조그마한 못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용 두 마리가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 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서로 꿈틀 거린 듯하므로 교룡담이라 하고, 이곳이 바로 9곡이다. 아홉 마리 용이 살다가 승천 했다는 전설과 함께 일명 구룡폭포라 한다.

불영추(옥룡추) 바로 아래 바위 절벽에는 창암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썼다고 전하는 '용호석문(龍湖石門)'과 김두수가 8세 때 썼다는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이 새겨져 있다.

지리산국립공원 북부사무소 구룡분소와 육모정 중간지점에 크게 각석된 ‘용호석문(龍湖石門)’ 바위글씨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좌측으로는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김두수(金斗秀) □□서(□□書)’ 라고 각자됐다.

'용호석문'과 '방장제일동천' 각자 사이에는 자연 석불이 있다. 이 석불의 그림자가 소에 비친다고 해서 불영추라고도 한다. 동천(洞天)은 본래 중국의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일컫는 말인데, 별천지(別天地)라는 뜻도 담겨 있다. 주희의 '무이구곡도가' 제9곡에 나오는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으랴(除是人間別有天)'라는 마지막 구절과 같은 뜻이다.

또다른 ‘방장제일동천’은 이종묵, 이종학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제3곡의 바위 글씨를 제외하고 구곡을 알리는 바위 글씨가 존재한다.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의 '용호구곡경승안내(龍虎九曲景勝案內)'엔 제1곡 송력동의 이름이 붙여진 유래, 송림사가 폐사가 된 전설, 제2곡 불신당 주변의 석문(石文)을 쓴 작자들, 제4곡 칠성암(七星唵)의 명칭 유래, 제5곡 유선대에 전해지는 산서(山西) 조경남(1570∼1641)의 일화, 제8곡 경천벽(擎天壁)과 제구곡 용화굴(龍化窟)이 그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경관의 모습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곡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북 8경들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은 동정호로 흘러들어가는 양자강의 지류인 상강(湘江)과 상강의 지류인 소수(瀟水)의 여덟 가지 경치를 말한다. 송나라 때 화가들이 이 풍경을 그렸고, 북송의 학자 심괄(沈括)은 '몽계필담'에서 아래의 여덟 가지를 말했다.

평사낙안(平沙落雁): 가을날 남쪽으로 와서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원포귀범(遠浦歸帆): 저녁나절 멀리서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산시청람(山市晴嵐): 산 속 마을이 맑은 아지랑이에 싸여 있는 모습.

강천모설(江天暮雪): 겨울 날 어두워질 무렵 하늘과 강을 뒤덮은 눈.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뜬 맑은 가을 달.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수가 상강과 합류하는 곳에 내리는 쓸쓸한 밤비.

연사만종(烟寺晩鍾): 연무가 낀 강에서 듣는 청량사의 저녁 종소리.

어촌석조(漁村夕照):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어촌의 풍경.

중국 송나라에서 유행한 이 여덟 가지 풍경을 그린 그림의 제목은 이후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수없이 많은 그림과 시가 나왔다. 그리고 여덟 가지 경치라고 하는 ‘팔경’을 붙이는 것도 함께 유행해 다양한 팔경이 나오게 된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팔경은 강원도 관동팔경, 충청도 단양팔경, 평안도 관서팔경, 평양 기성팔경, 서울 국도팔경, 전주 완산팔경 등이 있다. 이렇게 유명한 것 외에도 수많은 팔경이 있다. 가장 유명한 팔경인 관동팔경은 조선시대 강원도 동해안의 여덟 가지 경치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순서대로 보면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 등이다.

서거정의 패향십영(沛鄕十詠)

서거정이 전주부의 승경을 노래한 패향십영(沛鄕十詠)이다.

경기전(慶基殿)

手提金尺靖東韓 손수 금척을 쥐고 동한을 평정하셨기에
閟殿眞容爲奉安 깊고 그윽한 신전에 진용을 봉안하였네
好是龍興根本地 훌륭하다 예가 바로 용흥의 근거지이니
千秋蕉荔謹黃丹 노란 파초 붉은 여지를 천추에 올리리다

견훤도(甄萱都)

猾賊當時事險微 교활한 적은 당시에 음험을 일삼았는데
蕭墻奇禍不堪譏 뜻밖의 집안 재앙은 가소롭기 그지없네
可憐四十年間業 가련도 하여라 사십 년 동안 벌인 사업이
城郭依稀鶴語非 성곽마저 희미해 학의 말대로는 아니로세

만경대(萬景臺)

臺高千仞倚靑空 천 길이나 높은 대가 창공에 솟아 있어
俛仰乾坤萬里通 위아래 천지 사이에 만 리가 탁 트였네
莫說甄郞興廢事 견훤의 흥망에 관한 일을 말하지 마소
靑山黙黙鳥飛中 청산은 말이 없고 새만 높이 나는구나

기린봉(麒麟峯)

山河磅礴瑞輪囷 산하의 충만한 기세에 상서가 우뚝해라
仙李盤根弈葉春 선리가 뿌리를 내려 대대로 봄이로다
豐鎬由來形勢異 풍호는 예로부터 형세가 유독 달랐거니
請君來此看麒麟 그대는 이곳에 와서 기린봉을 보게나

봉황암(鳳凰巖)

甄家兩顆不才兒 견훤의 집 두어 자식은 못나기 그지없어
梟獍爲心豚犬姿 효경 같은 심술에 돈견 같은 자질이었네
當日鳳凰去何處 그 당시엔 봉황이 어느 곳으로 갔던고
如今覽德自來儀 지금은 덕을 보고 스스로 내려왔는걸

건지산(乾止山)

虎擲龍疲一霎空 용과 범의 싸움이 한순간에 끝나버리고
江山依舊雨昏濛 강산은 예전대로 비만 자욱이 내리누나
傷心莫問濟羅事 상심되거니 백제 신라의 일은 묻지 마소
多少峯巒露碧䓗 하 많은 산봉우리만 우뚝우뚝 푸르구려

덕진연(德津淵)

以德名津語不空 덕으로 이름 지은 그 말이 헛되지 않았도다
澤民曾有濟時功 백성에게 은택입혀 세상 구제한 공이 있네
誰知泓臥龍行□ 그 누가 알리오 깊은 못에 용이 누워서
十雨時能又五風 때로 능히 십우와 오풍을 행사하는지

공북정(拱北亭)

北望神州稽首欽 북으로 대궐 향해 경건히 머리 조아릴 제
華山高聳碧抽簪 우뚝 솟은 화산은 흡사 벽옥잠 같아라
南州冠蓋多於織 남쪽 고을 관리들은 유독 많기도 한데
戀闕思君只此心 대궐과 임금 사모하는 그 마음뿐이었네

제남정(濟南亭)

濟南佳麗惱人多 제남정 화려한 경치는 퍽 사람 들뜨게 하여
憶昔瞢騰盡醉過 내 옛날 잔뜩 취해서 곤드레가 된 적 있네
爲問今時老□□ 묻노라 지금은 ---(이하 원문 누락)
□□□□□□□

쾌심정(快心亭)

畫棟朱甍對碧岑 단청 화려한 정자가 푸른 산 마주했는데
竹林蒼翠轉深深 푸른 대나무 숲 돌아서 깊숙이 들어가네
何時賢尹一樽酒 어느 때나 어진 부윤과 술자리를 열어서
快盡平生未快心 평소 울적한 마음을 유쾌히 다 풀어볼꼬

서거정은 한상 이봉(李封)이 보내준 시에 차운, 전주의 풍경으로 열가지(패향십영)를 노래했다.

조수삼의  전주8경

오늘날의 전주팔경을 이야기한 인물로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1762~1849)을 꼽을 수 있다.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조수삼은 말년(74세경,1835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2년 동안 호남지방에 머물렀다. 그 당시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들 가운데 현재의 전주팔경과 부합하는 작품들이 그의 문집인 추재집 3권과 4권에 들어 있다.

죽림야우(竹林夜雨)

雨入竹中鳴達宵 비 내리는 대숲은 밤새 울어대니
竹聲相近雨聲遙 대소리가 가까우니 빗소리 멀어지네
伶人百隊人千口 악공 수천 명으로 하여금
口口爭吹綠玉簫 녹옥피리 다투어 부는 듯

죽림(竹林)은 완주군 상관면 만덕산 아래인 현재의 죽림온천 지역으로 추정된다.전주인근은 예전에 대나무 숲이 우거졌고,특히 상관면 일대는 매우 무성해서 ‘죽음리(竹陰里)’라고 하였다고 한다.소상팔경의 첫수인 소상야우를 본 딴 ‘죽림야우’는 ‘죽림(竹林)+야우(夜雨)’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밤에 대숲에 내리는 빗소리는 낮에 듣는 빗소리와 달리 매우 뚜렷하고 크게 들린다.그렇기 때문에 전구와 결구에서 수백 수천의 악공들이 다투어 피리를 분다고 표현하였다.

덕진채련(德津採蓮)

蓮唱初高刺掉頻 채련곡 노래 소리 높아질 때 배를 끌고 나서니
水禽驚起綠粼粼 물오리 놀라 일어나니 연잎이 맑도다
畵舫漸入花深處 놀이배를 타고 점점 꽃밭 속에 들어가니
一色紅粧不見人 온통 붉은 속에 사람은 보이지 않네

덕진연못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다만,후백제의 견훤이 도성방위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고려 때 이미 호수가 있었다는 설도있다.또한 조선조에는 풍수적으로 보아 북쪽에 산이 없는 전주의 지형상, 북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막기 위해서 건지산과 가련산을 이어 제방을 만들어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덕진연못의 절반가량을 채우고 연꽃은 가장 큰 볼거리로,오월 단오를 맞아 피기 시작하여 한 달 가까이 꽃이 피고 진다.단오가 되면 전주시내의 아낙네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기 위해 덕진연못을 찾아 나서곤 했다.놀잇배를 끌고서 우거진 연밭 속으로 들어가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온통 여기저기온통 붉게 피어 있는 연꽃만 보이게 된다.조수삼은 이러한 절경을 팔경의 하나로 노래했다.

동포귀범(東浦歸帆)

江鄕魚米不論錢 강마을에는 물고기와 쌀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巨口長腰日貿遷 넓은 해구와 긴 강줄기를 따라 날마다 바꾸어 가네
試向南峯高處望 잠깐 남쪽 봉우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遠帆無數入靑天 멀리 수많은 돛단배가 푸른 하늘가에 떠 있네

동포귀범의 동포(東浦)는 ‘동지포(東之浦,혹은 東止浦)’의 줄임말이다.여기서 동지포는 곧 만경강의 청하면 동지산(東之山,혹은 東止山)리에 있는 옛 포구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조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주의 관할은 서쪽으로 옥구 임피현 경계까지였다.
‘거구’는 ‘입이 큰 농어’라고 하고,장요미(長腰米)는 모양이 좁다랗고 길쭉한 쌀의 일종으로 전자(箭子)라고도 하며,한수(漢水)가에서 산출되는 절품(絶品)으로 꼽힌다.하지만 짧은 절구의 형식에서 기구에 물고기와 쌀을 이야기하고,승구에서 다시 ‘거구’,‘장요’라는 말로 풀이를 하는 것은 언어의 경제적 측면에서 큰 낭비라고 할 수 있다.즉,승구의 ‘거구’와 ‘장요’는 농어나 쌀 대신에 동지포 일대의 경치를 묘사한 것으로 풀이해야 풍경이 풍부해진다. 이에 ‘넓은 강어귀’와 ‘긴 강줄기’로 해석하였다.전구의 ‘남봉(南峰)’은 청하면 신창진 뒤쪽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의 지명이다.만경강이 신창진을 돌아서 서해바다와 마주하는 곳에 이르면 남봉보다 높은 곳이 없다.그래서 남봉에 올라가면 신창진 앞으로 왔다갔다하는 배들을 볼 수 있다.

인봉토월(麟峯吐月)

麟峯雙䯻碧嵯峨 기린봉 두 봉우리 푸르게 우뚝 솟고
秋月迢迢漾素波 가을 달빛은 멀리서 하얗게 일렁이네
五木臺前黃葉盡 오목대 앞의 노란 잎은 다 하고
南川橋上醉人多 남천교 위에는 취한 사람이 많네

인봉토월은 기린봉 위로 달이 떠 오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현재의 기린토월에 해당한다.인봉토월은 달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계절인 가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인봉토월에서는 다른 시들에 비해서 지명이 많이 사용됐다. 기구의 ‘인봉(麟峰)’은 전주부 동쪽에 위치한 기린봉을 말한다.전구의 ‘오목대(五木臺,梧木臺의 誤記)’는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를 황산벌에서 토벌하고 전주에 이르러 잔치를 했다는 곳이고,결구의 ‘남천교(南川橋)’는 전주천에 걸쳐 있는 다리이다.기구,전구,결구에서 ‘인봉,오목,남천’이란 지명이 사용되었다면,승구에 쓰인 ‘추월’의 경우도 지명일 가능성이 많지만,이에 해당하는 지명은 찾지 못했다.

한벽청연(寒碧晴烟)

遠視迷離近卽空 멀리서 보면 아득하고 가까이 보니 텅 비었는데
一川寒碧漾冥濛 전주천 가의 한벽당은 흐릿하게 일렁이네
隔村多少斜陽樹 건너 마을에는 석양 아래 서너 그루 나무들
只坐輕籠淺抹中 다만 옅게 붓질한 듯 앉아 있네

한벽당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7~8차례의 중수 과정을 거쳤다.이 과정에서 숙종때 관찰사 이사명(李師命)은 별도로 여러 층의 누각을 창건하고 화려하게단청하였다. 완주부성 지도와 규장각 지도에 나타난 것을 참조하면,이 때 지어진 한벽당은 비탈면을 따라서 4동의 건물이 일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벽청연의 시간적 배경은 해질 무렵이다.해가 뜨기 직전의 시간과,해가 지고 난 직후 완전히 어두워지기까지는 하루 중에서 가장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이다.이 시간에 사물은 흐릿하게 보여서 물건을 똑바로 보기 매우 어렵다.기구와 승구는 초저녁 시간대에 밖에서 본 한벽당의 모습이다. 전주천변에 세워진 한벽당은 뒤편에 발산 자락이 자리하고 있어 더욱 어둡게 보이기 마련이다.건너 마을에 석양이 지는 가운데,서너 그루의 나무들은 수묵화에서 옅게 붓질한 듯 서 있다.전구와 결구는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자주 끼는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이로 보아서 한벽청연은 남원쪽에서 들어오는 입구에서 한벽당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남고모종(南固暮鍾)

城郭鍾聲何處聞 성곽의 종소리 어디에서 들리나
上方斜日下方曛 상방에 석양이 드니,문턱이 따뜻하네
回頭更欲尋初地 머리 돌려 다시 초지를 찾으려니
惟見空山多白雲 텅 빈 산에는 흰구름만 보이네

남고모종은 남고산 남고사의 저녁 종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남고산성은 전주 남쪽의 고덕산과 천경대,만경대,억경대로 이어진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산성이다.이 산성의 안쪽에 남고사가 있다. 불교에서 종을 치는 이유는 모든 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생겨나 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있다.

상방(上方)은 관아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던 방을 이르던 말이고,하방(下方)은 벽의 맨 아래쪽 기둥사이를 가로지른 나무를 이른다. 초지(初地)는 십지(十地)의 처음 단계로,번뇌를 끊고 마음속에 환희를 일으키는 경지로서 환희지(歡喜地) 라고도 한다.저녁에 해가 지면서 절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듣고 초지를 찾으려고 했지만 산에는 무심히 흰 구름만 보이고,찾고 싶은 초지는 보이지 않는다.결국 화자가 찾으려는 ‘환희지’는 ‘남고사’를 의미한다.전주 시내에서바라보는 남고사는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결구는 이런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위봉수폭(威鳳垂瀑)

白練垂垂掛翠微 하얀 비단이 푸른 산에 걸린 듯
雨絲霞線染餘暉 빗줄기는 저녁노을에 물드네
何人直把幷刀去 어느 누가 곧바로 칼을 가지고 가서
斷下淸秋織女機 맑은 가을 하늘아래 직녀가 짠 베를 잘라놓았나

위봉수폭은 위봉산 동문쪽에 있는 위봉폭포를 말한다. 위봉폭포는 높이가 60m로,2단으로 물줄기가 쏟아진다.물이 떨어지는 폭포 주변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절경을 형성한다.기구의 하얀 비단이 푸른 산에 걸린 듯한 것은 위봉폭포의 물이 떨어지는 모양을 표현했다. 이 폭포는 태양을 등지고 있는 위봉폭포의 하얀 물줄기와 석양에 물드는 빛줄기가 묘한 대비를 형성한다.위봉수폭은 기구부터 결구까지 모두 위봉폭포의 떨어지는 물줄기를 형상화하는데 주력하였다.하얀 비단,푸른 산,저녁노을에 물든 빗줄기,그리고 맑은 가을 하늘은 백색,붉은 색,푸른색이 서로 강렬한 색으로 대비되게 그리고 있다.

비정낙안(飛亭落雁)

飛飛亭下雁飛秋 비비정 아래 가을 기러기 내려앉은
水碧沙明十里洲 물 맑고 모래 고운 명사십리길
北望京華何處是 북쪽 서울 집은 어느 곳이던가
家書容易到南州 편지는 쉽게도 남주에 이르네

비정낙안은 평사낙안에 해당하는 시다. 비정(飛亭)은 비비정의 줄임말로, 삼례를 지나는 만경강가에 서 있다.그 밑으로는 하얀 모래밭이 십리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고 해서 명사십리라고도 한다.
정자는 선조 6년(1573)에 무인 최영길이 건립하였으며 몇 차례 쇠락을 거듭하여 현재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최영길의 손자 최양이 우암 송시열에게 부탁하여 지은 비비정기(飛飛亭記)에서 송시열은 ‘비비’라는 말의 뜻을 “지명에서 연유하였다기보다는 익덕 장비(張飛)의 신(信)과 용(勇),악비(岳飛)의충(忠)과 효(孝)를 본따서”비비(飛飛)23)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했다.(전주 팔경시의 형성과정 및 특성 연구, 정훈 전북대 참조)

춘향가의 완산8경

판소리 춘향가 사설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제법 역사가 오래된 ‘완산팔경’이다. 기린토월(麒麟吐月)은 전주 동쪽에 비껴서 솟아있는 기린봉 정상에 비가 갠 후에 달이 여의주처럼 떠오르는 모습이고, 한벽청연(寒碧晴烟)은 전주천이 물안개를 일으키며 흐르는 모습을 옥류동 한벽당에 앉아서 조망하는 청아한 풍경을 말한다. 남고모종(南固暮鐘)은 해질녘에 남고진의 저녁놀을 가르며 울리는 남고사의 범종 소리이고, 곤지망월(坤止望月)은 ‘곤지산(坤止山)에서 달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다가사후(多佳射帿)는 다가 천변 물이랑을 끼고 있는 천양정에서 무관과 한량들이 과녁을 향해 화살을 당기는 모습으로 백설 같은 입하화(立夏花)가 나비처럼 날리고 삼현 육각(三絃六角) 선율에 기녀들의 노래와 춤사위가 함께 하는 일대장관의 풍정을 집약한 풍경이다. 덕진채련(德津採蓮)은 저녁 노을과 달빛을 끼고 풍월정에 앉아서 뜸부기 소리와 피리 소리에 젖어 맞은편의 승금정(勝金亭)을 내다보는 덕진연못의 연꽃 풍경을 일컫는다. 비비낙안(飛飛落雁)은 달빛이 부서지며 반짝이는 한내(大川)에 고깃배가 오르내리고 백사장의 갈대숲에는 기러기 떼가 사뿐히 내려앉는 수묵화를 닮은 정경을 비비정(飛飛亭)에 올라 바라보는 경치이고, 위봉폭포(威鳳瀑布)는 심산유곡을 돌고 돌다가 홀로 부서지는 위봉폭포의 비경을 폐허에 홀로 앉아 바라보는 풍경이다.
기존의 ‘완산팔경’과는 달리, ‘동포귀범’이 빠졌다. 동포귀범(東浦歸帆)은 고산천을 마그네 선창부두에 돌아 닫는 소금배 젓거리배 등의 행렬이 만드는 산수화 같은 풍경을 말한다. 완산십경은 여기에 남천표모(南川漂母)을 더해 완산십경이라 하기도 한다. '남천표모'란 전주천 빨래터에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하는 풍경을 말한다.

남원 영사정(永思亭)8경

영사정(永思亭)은 전북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내기마을에서 50m 거리의 야산에 있는 누정이다. 영사정은 순흥안씨 가문의 효의 상징이자 조선중기 호남사림의 교유 장소로서 이에 대한 다수의 시문학이 전하고 있다.
영사정팔경도 작품은 지본수묵화로 전체 8폭 중 6폭만 남아 있고, 화면의 박락이 심하여 처음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각 화면의 측면 상단에 남아 있는 잔조(殘照)와 고주(孤舟) 방장청운(方丈晴雲) 등 일부 화제(畵題)가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이 지은 '영사정팔영(永思亭八詠)' 시제(詩題)와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영사정팔경도’라고 명명됐다.

제1경 순강모우(鶉江暮雨)는 순강의 저녁비, 

제2경 방장청운(方丈晴雲)은 지리산에 피는 청운, 

제3경 야도고주(野渡孤舟)는 순강 나루터의 외로운 배, 

제4경 단안쌍루(斷岸雙樓)는 순자강 을 사이에 두고 단안 위에 마주한 보허정과 북정, 

제5경 폐성잔조(廢城殘照)는 영사정 인근 황폐한 옛 산성 터의 낙조, 

제6경 장교효설(長橋曉雪)은 금석교의 새벽 눈발,

제7경 창송냉월(蒼松冷月)은 영사정의 일곱 그루 소나무에 걸린 쓸쓸한 달빛,

제8경 수죽청풍(脩竹淸風)은 영사정(永思亭) 뒤쪽 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 을 소재로 한 양대박의 '영사정팔영'과 '영사정팔경도'가 쌍을 이룬다.

 

양대박의 ‘영사정팔영’

 양대박의 ‘영사정팔영’의 시제(詩題)와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영사정팔경도’라고 명명됐다.

 靑溪集 [3] 卷之二 永思亭八詠

 石作層峯黛七松 蒼髥不改歲寒容 虬枝政好月來掛 人在曲欄尋短筇 蒼松冷月
誰遣龍鍾擁小亭 千竿如來拂雲靑 人間熱惱除無術 留得凉飇滿一庭 脩竹淸風
江頭烟斂欲斜陽 山外歸雲雨脚長 風捲浪花驚不定 漁舟箇箇入蒼茫 鶉江暮雨
一朶花峯聳半空 閑雲舒卷杳茫中 傍人莫作無心看 膚寸能成潤物功 方丈靑雲
一葉輕舠野水濱 烟波隨處卽通津 沙汀盡日少來往 付與苔磯垂釣人 野渡孤舟
紅樓如畫水東西 羽客曾同一鶴棲 千古遺蹤但雲物 秪今行旅汚丹梯 斷岸雙樓
古壘荒凉雉堞欹 當年蠻觸尙依依 如今獨帶孱顔在 千古無言送落暉 廢城殘照
一夜郊原銀界遙 曉來寒氣挾風驕 江梅度臘香魂返 催得淸愁訪野橋 長橋曉雪

 

<제1경> 창송냉월蒼松冷月 : 푸른 솔에 걸린 쓸쓸한 달빛
 <제2경> 수죽청풍脩竹淸風 : 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
 <제3경> 순강모우  江暮雨 : 순자강에 내리는 저녁 비
 <제4경> 방장청운方丈晴雲 : 방장산에 피는 청운
 <제5경> 야도고주野渡孤舟 : 나루터의 외로운 배
 <제6경> 단안쌍루斷岸雙樓 : 단안의 쌍루
 <제7경> 폐성잔조廢城殘照 : 황폐한 성터의 낙조
 <제8경> 장교효설長橋曉雪 : 장교에 내리는 새벽 눈발

 현재는 각 화폭을 유리액자에 보관하고 있지만, 화폭 크기는 박락 부분을 제외하고 대략 70×50cm로 일반 화첩의 크기와 달라 원래는 조선중기 유행한 8폭 소병풍(小屛風) 형식으로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사정팔경도’는 16세기 조선 회화에서 유행했던 안견파 화풍과 절파 화풍을 반영하고 있는 팔경도 중 하나이다.
한편 화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기도 했던 청계의 문집인 청계집(靑溪集)[3] 권2 영사정팔영에 수록된 8편의 시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그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영사정팔경도’의 작자는 정 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단지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신잠(申潛, 1491~1554)의 작품이라는 전언(傳言)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는다.

진안 월랑8경

진안군 진안읍 대성동마을 운강 송상완씨가 제11회 전라북도 서도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작품 ‘진안팔경’을 진안읍에 기증했다. 
작품의 ‘진안팔경’은 ‘耳山歸雲(마이귀운, 마이산을 감도는 구름), 羌嶺牧笛(강령목적, 강령 목동들의 피리소리), 富貴落照(부귀낙조, 부귀산 저녁노을), 古林暮鐘(고림모종, 고림사 저녁종소리), 鶴川魚艇(학천어정, 학천 고기잡이 배), 牛蹄細雨(우제세우, 가랑비 내리는 우제들 풍경), 南樓曉角(남루효각, 남루의 새벽 고동소리), 羽化齊月(우화제월, 우화산에 둥실 솟은 밝은 달)’이라는 글귀로 진안읍의 아름다운 팔경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이는 진안읍 내의 팔경을 읊은 사언절구로 ‘진안지’에 실려 있으며, 작자는 미상이다.

‘월랑’은 백제시대에 부르던 월량(月良)이란 말에서 유래한 진안의 옛 이름이고, ‘마이귀운’은 마이산에서 구름이 걷히는 모습을 말한다. 마이산 지역은 원래 광대한 진안고원의 한 부분이며 호남지방의 지붕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곳으로 금강 상류는 무주구천동의 수려한 경치를 만들고, 다시 마이산은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 빼어난 풍광과 함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순창 종호(鍾湖)8경

 만수탄은 순창군 내의 섬진강 구간에서 가장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전시관에 소개된 '만수탄 종호8경'을 읽어보면 그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순창 군민들은 순창지역 섬진강 구간을 적성강(赤城江)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취암산 동쪽, 무량산 아래를 흐르는 적성강 지역을 특별히 만수탄(萬水灘)이라 했다.

이 일대는 섬진강 물줄기가 호남정맥을 넘나들며 빚어낸 기암괴석으로 섬진강 구간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이다. 무량산 너머로 벌동산(옛 취암산ㆍ587m)과 마주하며 북으로 용궐산(647.6m), 동으로 무량산(587.0m)이 에워싼 곳에 투구 모양의 돌섬들이 형성되어 있는 바, 이 일대 소(沼)를 ‘종호(鍾湖)’라 한다. 종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향유하고 풍류를 누린 대표적 인물이 초로(楚老) 양운거(楊雲擧ㆍ1613∼1672)였다. 그는 남원양씨 구미리 입향조인 양사보(楊思輔)의 9대손으로 조선시대 효종 때 사람이다. 산수를 사랑해 구미리 만수탄에서 지북까지 모두 9개의 정자를 세운 부호였다. 종호정(鍾湖亭)이라고도 불리는 육로정(六老亭)을 짓고 시주(詩酒)를 즐겼다.

‘종호’ 바위글씨와 취암산(현재 벌동산) 자락에 ‘석문’ 바위글씨를 새겼으며, ‘종호바위 위에 술을 부어 놓고 마신 거사’로 알려져 있다. 국가에서 큰 부자에게 주는 칭호인 참봉 칭호를 들었던 인물로 '현종실록'에 흉년이 들자 쌀 수백 석을 내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와 함께 노닐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남원 사람들인 양진당(養眞堂) 하만리(河萬里), 최휘지(崔徽之)와 최유지(崔攸之) 형제, 유동연(柳東淵)과 유동달(柳東達) 형제였다. 이들을 여섯 명의 노선(老仙), 즉 육로(六老)라 불렀다. 양운거가 지었다는 9개의 정자는 소멸되었지만 '종호팔경운'(鍾湖八景韻ㆍ종호팔경 시 운자를 따서 짓다)이라는 시가 있어 옛 만수탄 종호의 경관과 풍류객들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

제1경은 '호중석서(湖中石嶼)'이다. 이는 '호수 안의 돌섬'을 말한다.

땅은 종호(鍾湖)를 숨겨두고 주인을 기다리는데
하늘이 돌섬을 만들어 놓으니 낚싯줄 드리우기 좋네
그대는 육로암에 새겨진 글자를 보았는가
물이 넘실거려 모래로 갈아도 물에 갈리지 않네

제1경은 강물 한가운데 배치된 풍류의 공간인 돌섬(石嶼ㆍ석서)들을 노래하고 있다. ‘종호암’(鍾湖巖)과 ‘육로암’(六老巖), ‘조대’(釣臺)라 새겨진 바위들이 펼쳐진다.

제2경은 암상와준(巖上窪樽)으로, '바위 위 웅덩이 술통(巖上窪樽)'이다.

하늘이 기이한 바위를 쪼아 술통을 만들었으니
병 같기도 하고 사발 같기도 하고 또 동이 같기도 하네
다만 아홉 웅덩이로 하여금 길이 마르지 않게 한다면
남들 비록 다음 산으로 갈지라도 나는 홀로 남아 있겠네

바위 위 ‘술을 담는 독’, 바위 모서리에 구준암(九樽巖)이란 글씨가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이는 ‘아홉 개의 술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바위에 형성된 다수의 돌개구멍에서 유래된 같다.

양운거는 이 바위 위에서 벗들과 술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술 주전자가 너무 작아 거듭 술을 채워야 하는 것이 번거로워 바위 웅덩이에 술을 가득 채우고, 술로 목을 축여가며 시를 주고받으며 읊었다고 한다.

제3경은 '영축귀운(靈驚歸雲)'으로, '영취봉의 돌아가는 구름(靈驚歸雲)'이다,

집 뒤에는 취봉이 우뚝 솟아 있고
하늘가를 돌아보니 푸른 연꽃이 피었네
구름이 와서 장맛비 된다 한들 상관 않는
무심한 듯 태연한 네 모습을 사랑하노라

‘영험한 취암산을 돌아오는 구름’을 노래하고 있다. 취암산은 종호암 전면에 펼쳐진 산으로 만수탄을 중심으로 동서로 무량산과 대응하고 있다. 현재 명칭은 벌동산이다.

제4경은 '향로조일(香爐朝日)'로, '향로봉의 아침 해'를 말한다.

동쪽 봉우리에 아침 햇살이 구름 사이를 통과하니
따뜻한 기운이 왕성해 큰 산과 같네
주인은 술에 취해 아침 잠을 편히 자고
늦게 일어나 아이 불러 낚싯대를 드리우네

제5경은 '석문낙엽(石門落葉)'으로 '석문의 낙엽(石門落葉)'을 말한다.

산길 험한 곳에 돌로 문을 만들었고
늙은 회화나무는 구불구불 몇 년 된 뿌리인가?
가을 바람에 잎이 떨어져 다니는 자취를 덮으니
물의 근원을 다시 찾을 적에 헤맬까 미리 염려하네

제6경은 '탁탄수압'(濯灘睡鴨)'으로 '갓끈 씻는 여울에 졸고 있는 오리'를 말한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 바닥까지 맑고
강에 임하여 바로 적합한 곳이면 내 갓끈을 씻으리
아이에게 크게 노래하지 말라고 말을 전하는 것은
물가 모래톱에서 오리 놀랄까 두렵기 때문일세

제7경은 '전교목적(前郊牧笛)'이니 '앞들의 목동 피리소리'를 말한다.

비 온 뒤 강물 흐르는 교외에는 작은 풀이 푸르고
목동의 피리는 새로운 소리를 연주하네
말등이 소등의 편안함만 못하니
은거하는 선인이 도를 깨달으면 이러한 한가한 심정이리.

제8경은 '고사신종(古寺晨鐘)'이니 옛 절의 청아한 새벽 종소리다.

절은 아득히 푸른 하늘에 가깝고
만 길 낭떠러지라 길이 통하지 못하네
늙은 스님 참선에 들었으니 누가 보리오
맑은 새벽에 오직 예불 종소리만 들리누나

옛 절에서 들리는 새벽 종소리를 노래하고 있다. 만수탄 인근에 있었던 취암사 또는 불암사의 타종 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순창8경과 순창8경가

왕족 출신 시조 작가 이세보(李世輔, 1832~1895)가 선정한 순창의 팔경이 있다.

순창팔경가(淳昌 八景歌)

'금산(錦山)에 봄이드니 꽃과 버들은 붉음과 푸름을 다투는데 무릉의 범나비는 간곳마다 꽃이로다 아이야 술부어라 취코 놀게

헌납(獻納) 바위 맑은 폭포 사시무궁 괘장천(掛長川)을 황계백주(黃鷄白酒) 남은 흥은 청가일곡(淸歌一曲) 한가하다 아마도 무한풍경은 이 뿐인가 하노라

대숲동(竹林村)의 녹죽(綠竹) 노는 군자 어대가고 적막공산의 일대 풍죽 되었느니 우리도 풍상을 격고셔 임자다시 만나자

응향지(凝香池)에서 배를 타고 놀았으니 연꽃도 좋거니와 월영수영(月影水影)은 은은한데 가지마다 낙화로다 지금에 이적선(李謫仙, 이백) 소자첨(蘇子瞻, 소식)은 어대 간고

아미산(峨眉山) 솟은 달이 초당에 들었도다 술먹다 다시보니 미산미월(眉山眉月)이 분명하다 미산의 솟은 달은 보름에도 미월인가

귀래정(歸來亭)에 달이 밝았으니 이태백과 놀러 나가세. 전필언(全弼彦)은 황계백주, 이종현(李鐘鉉)은 채소 반찬에 현미밥을 들고 오니 그중에 날낭은 풍뉴와 기생이나

우연히 장대(壯臺)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무변초색 너른 뜰 곳곳이 백곡(百穀)이라 아마도 태평성대는 금세(今歲)신가

적성강(赤城江) 가랑비에 사립쓴 저 어옹(漁翁)아 백구(白鷗)를 이웃하여 사시수월(四時水月) 한가하다 우리도 그대를 좇아서 누대(樓臺) 풍경이나 바라보리


익산 웅포8경

웅포팔경은 

강풍어화(江風漁火)-금강의 고기잡이 배의 밤 불빛, 
웅포귀범(熊浦歸帆)-곰개포구에 돌아오는 돛단배, 
십장유암(十丈儒巖)-선비들의 수도장이었던 함라산 왕바위, 
숭림모종(崇林暮鐘)-숭림사의 저녁 종소리, 
피포노화(皮浦蘆花)-금강변에 피어 장관인 갈대꽃, 
남당낙안(南塘落雁)-금강에 돌아오는 철새 떼, 
붕암노송(鵬巖老松)-금강에서 바라보는 어우러진 노송, 
덕양낙조(德讓落照)-덕양정에서 바라보는 서해에 지는 저녁노을을 말한다.

함라8경

웅포귀범(熊浦歸帆): 웅포 앞바다에서 범선이 돌아오는 풍경
숭림모종(崇林暮鐘): 저물어가는 숭림사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송당명월(松堂明月): 양진폭포 위에 위치한 송당폭포의 물에 비치는 달빛
양진폭포 (養眞瀑布): 함라산 계곡 아래에 위치한 폭포, 여인들이 목욕과 빨래를 하던 곳 
간교낙안 (艮橋落雁):함열 간다리의 논에 만수가 되면 함라산을 넘어온 수천마리의 기러기와 오리떼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곳
용산부운 (龍山浮雲): 용산의 아침 햇살에 안개가 뜬 구름이 보이면서 오색창연한 경치를 형성하는 곳
나산괘염(羅山掛念): 함라산 중턱에 병풍을 두른 듯 일렬로 서 있는 바위
유제청풍 (柳堤淸風): 함열읍 아래 버들이 울창하게 둘러싸인 아담한 숲  <출처 : 익산시, 함민속마을 지정보고서 및 중장기 복원 활용계획(2013)>

 

이리8경

예로부터 '이리팔경(裡里八景)'이 있었다고 한다.  

요교(腰橋)의 낙안(落雁), 
배산(山)의 모설(暮雪), 
남당(南堂)의 야우(夜雨), 
수월(水月)의 추월(秋月), 
만경강(萬境江)의 융희교(隆熙橋), 만경강의 주선(舟帆), 
사강(事崗)
의 청람(晴嵐), 
이리(里)의 효종(曉鐘)이 바로 그것이다.

한때 이리팔경에 꼽혔던 '만경강 융희교(萬頃江 隆熙橋)', '만경강 범선(萬頃江 帆船)'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른 아침 시내에서 내려다보는 목천포 동자포에 몰려든 돗단배와 융희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만경강 건너 맑게 갠 하늘에 아득히 보이는 안개 띠 두른 모악산과 구성산의 그윽한 풍경을 그려 본다.
융희교는 남개(木川浦)에 있었던 만경강 최초의 다리였다. 1908년 군산-전주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설치된 다리다.
1909년 10월 만경강 대장포에 세천교, 1912년 10월 고잔 마을 앞에 만경강 철도교, 1914년 11월 삼례 비비정 옆에 경전북부선 만경강철교가 개통됐다. 그러므로 융희교가 만경강의 첫 다리임이 분명하다.
'이리팔경에 부쳐(寄裡里八景)'는 고아쿠산인(向岳散人)이 쓴 시가 전한다. '아침에 비치는 융희교를 건너 오고 가는데 완산(完山)을 저멀리 바라보니 맑은 하늘 한가롭구나'
융희교는 적어도 30년 이상 전주 이리 군산 고베 오사카의 쌀 고속도로의 핵심 다리로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융희교가 있던 만경강은 한동안 강줄기로 남아있다가 언제부터인가는 잡종지 빈터로 남거나 집이나 창고가 들어섰지만 옛 만경강의 흔적을 일부 희미하게 남기고 있다.
'이리의 종소리' 시도 궁금증을 더한다.'긴 밤도 짧은 밤도 꿈 속에서 꿈을 꾸는 잠자리, 사랑하는 이에게 새벽을 알리는 이리의 종소리' 이리의 종을 만들어 세상을 깨우치는 목탁이 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만경8경

제1경 만경낙조(萬頃落潮) 만경강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낙조를 조망할 수 있는 곳
제2경 신창지정(新倉之情) 새창이 나루를 오가던 사람과 이곳에 남겨진 역사문화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곳
제3경 사수곡류(泗水曲流) 만경강의 옛 이름인 사수(泗水)의 중심에서 옛 물길과 사람들의 어우러짐을 의미하는 곳
제4경 백구풍월(白鷗風月) 백구정에서 만경강을 내려다보며 아름다운 경치를 벗삼아 자연을 노래하는 곳
제5경 비비낙안(飛飛落雁) 비비정에서 바라보는, 만경강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와 낙조가 아름다운 곳
제6경 신천옥결(新川玉潔) 옥같이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로, 만경강의 허파역할을 하는 신천습지가 있는 곳
제7경 봉동인락(鳳東人樂) 편안하고 즐거운 봉동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곳
제8경 세심청류(洗心淸流) 세심정에 앉아 마음을 씻고, 흐르는 만경강에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곳

일정집(一亭集)'에 나타난 임실 '일정8경'

일정(一亭)은 임실읍 오정리 1번지에 있었던 정자 이름이다. 이 정자는 이 지역출신 선비 박용성(朴容晟)이
지금의 극락사 자리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원근(遠近)의 많은 사우(士友)들이 모여 서로 시를 읊으며 후학들을 길러내던 곳이다. 이때 여러 지역의 선비들이 찾아와 남긴 글이 200여 편에 이르며 이 시를 모아 1941년 10월 30일 아들인 박승수(朴升洙)가 일정집(一亭集)을 발행했다. 이 시집 중에서 임실을 중심으로 한 '일정팔경(一亭八景)'이 전한다.

一亭八景(일정팔경)

[葛川垂釣] 갈천(川)에 낚싯줄 드리우고

白首桐江一餌鈞 백수(白首)로 동강(桐江)에서 하염없이 고기 낚다가, 
風塵顧睡復長嘯 풍진(風塵)을 돌아다보니 다시 긴 햇볕 내리 쬐이네. 
羊嘯五月天徵涼 양이 우는 5월이라 날씨는 서늘한바람 불어오건만,
 誓使朱門不奉詔 맹세코 대궐이 조서(詔書) 받들지 않도록 하겠노라.

[極樂靑霞] 극낙(樂)에 푸른 안개

綺羅一幅抹殘霞 비단 한 폭으로 남은 구름을 휩쓸어가지고,
樹樹繁霜醉似花 나무마다 내린 서리가 꽃을 시들게 하더라.
禱佛祈山遐算盡 부처께 빌고 산신에 빌어 천수를 누리니,
人間極樂翠谽欲 인간 세상에 극락은 푸르른 골짜기이더라.

[鸞臺淸風] 난대(臺)에 청풍(淸風)

携手同歸遡晚風 손을 잡고 함께 가서 저물녘바람을 쏘이니,
層臺百尺暮雲中 백자쯤 층층 난대 저녁구름 속에 있네.
輕鸞如惜今人老 작은 난새가 애석케도 지금사람 늙게 했을까,
亂啄殘花數點紅 마구 쪼아 먹고 남은 꽃 두어 송이 붉었더라.

[蛤島吹笛] 합도(蛤島)에 피리 소리

一縷天風吹送笛 하늘이 한번 바람을 불어서 피리 소리 보내고는,
明沙錦石臥蘆荻 명사(明沙)와 금석(錦石)에 갈대를 눕혀버리네.
碧雲孤島雨黃昏 고도(孤島)에 벽운(碧雲)은 황혼에 비를 뿌려서,
樵唱如星碎霹靂 나무꾼의 창가는 별이 벼락에 부서지듯 하더라.

[龍山落照] 용산(龍山)에 낙조(落照)

夕暉冉冉鬢眉照 저녁 석양빛이 뉘엿뉘엿 수염 눈썹에 비추었고,
芳艸如煙野欲燒 방초(芳艸)에 연무는 들판을 태우듯 자욱했는데,
落帽龍山孟萬年 *맹만년(孟萬年)이 용산에서 모자 날아간 일은,
不知今日世人笑 모르겠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을지도.

[鳳樓明月] 봉루(鳳樓)에 명월(明月)

鳳凰臺上一輪月 봉황대(鳳凰臺) 위에 둥근달이 떠올라서,
遍照人間不染髮 두루 세상을 비추고 세속 때 묻지 않았네.
夜夜相尋多別離 밤마다 서로 찾으니 이별이 허다해서
小焉東出復西沒 잠시 동쪽에 나왔다가 다시 서쪽에 숨더라.

[德岫歸雲] 덕수(德岫)에 귀운(歸雲)

德軸蒼蒼萬朶雲 창창한 덕수(德袖)에 일만 타래 구름이,
無心出處氣気 무심히 떴다가 졌다가 뭉게뭉게 피어나더라.
紛紛去作人間雨 분분하게 뭉쳐서 인간에게 비를 내려주셔서,
莫使桑林更禱 *상림(桑林)에 또 기우제 지내지 말게 하소서.

[竹林暮鍾] 죽림(竹林)에 저녁 종소리

竹院深深落暮鍾 죽원(竹院)이 깊을수록 저녁종소리 잦아들자,
黃昏乘月人西峰 석양은 달과 사람을 서쪽봉우리에 탑승하고,
雲林獨臥空門友 구름숲에 홀로 누워서 공문(門)과 벗하니,
窓下鉢孟藏一 창문 아래 바리때에는 한 용(龍)이 담겼더라.

*맹만년(孟萬年): '만년'은 위진(魏晉)시대 진(晉)나라 사람 맹가(孟嘉)의 자이다. 맹가가 중구일(重九日)에 환온(桓溫)이 베푼 용산(龍山)의 주연(酒)에 참석했다가, 술에 흠뻑취한 나머지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전주(世說新語箋疏) 식감(識鑑)'

*상림(林): 지명(地名). 상(商)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이 기우제를 지낸 곳이다. 탕왕이 하(夏)나라 걸(桀)을 정벌한 후 7년 동안 혹독한 가뭄이 들었는데, 태사(太史)가 점을 치고는 하는 말이 "사람 희생을 바친 다음에 비를 내려줄것을 빌어야 한다"고 했다. 탕왕이 이에 자신이 희생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재계(齋戒)한 다음, 소거(素車)와 백마(白馬)를 타고 자신의 몸을 흰 띠풀(白茅)로 싸서 희생의 모양을 갖추었다. 그리고 상림(桑林)의 들에 가서 세 발달린 정(鼎)을 놓고 산천(山川)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해(四海)에서구 름이 피어나고 수 천리 땅에 큰비를 내렸다는 데서 연유한 고사(故事). 후대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일컬어지고 있다. '사문유취(事文類聚) 천도(天道) 기우(禱雨)'

임실의 명승8경(名勝八景)

임실은 관촌에 방수 팔경, 임실읍의 운수 팔경,신안팔경, 청웅의 구고 팔경, 오수의 둔덕 팔경, 신덕의 운호 팔경이 전해 내려온다. 각 지역의 아름다운 팔경을 안내한다.

♠관촌- 방수8경(芳水八景)

관촌 초등학교 앞에서 약 11키로정도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임실군의 상수도 수원지가 있으며 조선 숙종원년(1675)에 신계징 임실현감때 만든 운수지(임실군지)에 의하면 이곳 방동에 읍의 터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하북면 방동, 조선시대 상북면은 임실읍을 하북면은 관촌면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데 옛지명은 방동이다. 지금도 어른들은 방동이라고 부르지만 방(芳)자는 상서로움을 뜻한다 하였다. 이곳 방동마을의 팔경.

◎방미추월(芳尾秋月)

마을 앞에 우뚝솟은 방미산 봉우리에 보른달이 떠오르면 아름다운 야경을 말함

◎약암어화(藥岩漁火)

마을 앞 동남쪽 강변에 있는 약바위에서 밤에 강태공들이 관솔불을 붙여놓고 고기를 낚았다고 함. 어둠속에 불빛이 아름다웠다고 전함.

◎성산만하(城山晩霞)

마을 남쪽을 감사고 있는 성미산에 늦게가지 걷히지 않고 산을 감돌고 잇는 안개를 이른다.

◎송대백조(松垈白鳥)

마을앞에 있는 동산의 노송위에 백조가 날아와 앉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

◎안치낙조(雁輜落照)

마을서쪽 산에 석양이 붉게 물들었을 때 기러기가 날아가는 정경은 황홀경에 이른다. 기러기 안,수레치,

◎ 황두폭포(凰頭暴布)

마을 북동쪽의 황두에 있는 높이 30여미터 가량의 폭포를 이른다.

◎ 서제설죽(西堤雪竹)

마을 서쪽에 있는 대나무 숲에 눈이 쌓인 겨울 풍경

◎ 장제무림 (長堤茂林)

마을앞 제방에 노거수들의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

♠임실읍- 운수8경(雲水八景)

임실읍 운수봉은 임실의 상지이 되엇다. 현재 임실군청 맞바라기, 높은 봉우리로 임실의 중심이 되어왔다.

◎죽림모종(竹林暮鍾)

죽림암은 읍내의 주산인 봉황산 서쪽 운수봉에 세워진 고찰이다. 서산에 해가질 땅거미가 질무렵 은은히 들려오는 저녁종소리는 죽림암에서 부처께 저녁공양을 올리는 종소리로 죽림암에서 저녁종소리가 아름답다는 것

◎봉루명월(鳳樓名月)

어느때인지는 알수 없으나 봉황루는 구 경찰서 부근에 세워진 것으로 2층의 루각이었다고 전한다. 루의 2층에는 종이 있었는데 종의 이름이 봉황종이다. 달밝은 밤 선비들이 2층루각에 올라 시 한수 읊는 것은 아름다운 풍류였다. 봉황루는 하루 세 떼 종을 울려 시각을 알려주었으며 종을 울릴때는 삼현육각이 수반되었다고 전한다.

◎덕수귀운 (德岫歸雲)

여름철 운수봉으로 구름이 모아들면 반드시 비가오고 이 구름이 덕재산으로 돌아가면 비가 그쳤는데 덕재산은 지사면과 성수산의 경계에 있다. 그름은 남쪽으로 되돌아가는 풍경이 계절풍의 조화로 이루어진것인데 덕수로 귀운하면 오던비도칠 것을 예상한다는 뜻

◎합도취적 (蛤道吹笛)

고덕산이 풍기는 예기를 꺽기위해 숲정 앞 임실천에 인공으로 섬을 만들고 섬을 합도라 하였다고 전한다. 합도에는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그 옆에 석불을 세웠다는데 그것도 고덕산의 독기를 억제하기 위한 민속적인 방편으로 풍류객들이 석양이면 이곳에 모여 피리를 불고 즐겼다고 전한다.

◎만대청풍 (巒臺淸風)

만대는 읍내의 동남쪽 바위의 절벽위에 우뚝서서 삼복더위에 일진 청풍을 가슴에 안고 땀을 식히는 것은 나그네의 즐거움이엇다. 이곳은 속칭 만대미라 부르고 지금도 동쪽 들녘 모서리의 한토막 풍경을 이루어 이따금 사람이 오르내린다도 한다.

◎갈천수조 (葛川垂釣)

갈천은 지금의 임실천으로 옛말은 하상이 낮아서 수량이 풍부하여 지금보다 자연미가 있었다고 전한다. 물이 맑고 깨끗해서 오원강을 거슬러 올라온 은어가 갈천까지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강태공들이 줄지어 앉아 낚시줄을 담그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한다.

◎극락청하 (極樂淸霞)

극락봉은 시내의 앞산에 솟은 봉우리로 지금의 군자정이 세워진 산이다. 이곳에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면 봄이 온 것을 실감했고 때로는 안개가 띠처럼 산허리를 감돌고 있는것도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현재는 이곳에 극락사가 있다.

◎광암단풍 (廣巖丹楓)

현곡에서 운암으로 향하는 길목에 광석바위가 있는데 주위의 산들이 단풍이 들면 가경을 이루어 이곳은 신안주민들이 봄가을 화전놀이하는 장소가 되어왔다한다.

♠임실읍- 신안8경(新安八景)

신안에는 옛부터 신안서원이 있어왔는데 신안서원의 사림(士林) 들이 신안팔경을 뽑았다고 전한다. 신안서원의 사림들은 임실읍의 풍광은 물론 군내 전역의 명소들을 망라했음을 엿볼 수 있다한다.

◎이산청풍(夷山淸風)-백이산의 바람은 무더운 여름철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한다.

◎용요귀운(龍腰歸雲)-구름이 용요산으로 되돌아 갈때면 지루한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인다해서.

◎사촌모연(沙村暮烟)- 사치리(모래재)의 저녁연기는 민가에서 밥짓는 연기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도평어화(島坪漁火)-현곡리 섬들시 냇물에 밤마다 고기잡이 하는 어화가 휘황하대서 도평어화... 예전에는 밤에 고기를 잡으려면 관솔불을 들고 나갔다.

◎만산백설(滿山白雪)-신안을 둘러싼 모든 산들이 눈으로 덮인 은세계는 한층 아름다웠다고 한다.

◎봉대조양(鳳臺朝陽)- 봉황대와 조양정은 사시마다 색다른 풍경으로 아름다웠다.부족사회때에 추장의 거주지로 추정한다고 했는데 저녁노을 땅거미가 질 때 발산부락상공에 띠처럼 깔린 연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한폭의 동양화였다고 전한다.

◎두만락조(斗滿落照)-두만산은 읍의 서쪽에 있어 해가 이산에 잠긴다. 두만산에 해가 질때면 봉황산에 새들도 둥지에 깃들이고 갈천의 낚시꾼도 하나둘 낚싯줄을 거두는데 이때 서쪽하늘은 붉게 물들고 가을의 단풍철은 산도 하늘도 함께 물들어 한층 가경이었다고 한다.

◎공령화우(孔嶺化雨)-신안에서 임실읍으로 넘어오는 재(峙), 이 고개에 구름이 모여들면 비가 왔다고 한다.

♠청웅면 -구고8경(九皐八景)

구고는 고대사에 대석색국(大 으로 백제때는 들평현(突平縣), 신라때는 구고현,고려때는 한때 구고군으로도 불렀다. 오래세월 청웅, 강진,덕치,운암을 아우르는 현감이 배치되었던 고장이다.

◎두만명월(斗滿明月)-운수 팔경 두만 낙조와 같은 산으로 두만산에 솟아오른 달을 구고리에서 보면 동쪽이므로 항상 두만산에서 달이 떠오른다.

◎백이청풍(伯夷淸風)-백이산은 신안팔경에서는 이산 청풍으로 같은 뜻이다. 이것은 신안리와 구고리에서 보면 반대의 지형이기 때문이다.

◎용추수성(龍湫水聲)- 두만리 입구 저수지 아래 용소, 이곳은 저수지가 있기전 깊은 소가 있어 용소라고 했는데 두만산 줄기가 이곳에 합쳐 폭포가 쏟아지며 은은한 소리를 낸다해서.

◎이윤귀운(伊尹歸雲)-백연산 넘어가는곳 이윤고개에 그름이 모아들면 산에서 뭉게뭉게 구름이 이는 것 같고 이 구름은 여름철엔 소나기 겨울에는 폭설을 동반한다고 한다. 이윤리는 현재는 강진면이다.

◎발산모연(鉢山暮烟)- 발산은 바르뫼,스님들의 바리를 뜻하는 발산, 연대가 미상이나 이곳 발산이란 지명이 생긴 이유가 스님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이곳발산에서 스님들의 저녁 짓는 연기가 아름답다는 뜻으로 여겨짐.

◎효례어화(孝禮漁火)-효례천은 예전에 구고천을 이른다고 한다. 효례천이란 이름은 목심제(牧心薺)박훈과 인덕정(仁德亭) 박서 두형제가 구고천에서 기러기를 잡아 부모의 병을 낫게 하였다는 전설에서 효례천이라 했다한다. 밤이면 관솔불을 잡은 하동들의 불빛을 이름이다.

◎응봉고송(應蓬孤松)-응봉은 매봉을 말한다. 우뚝솟은 봉우리는 석벽이 되어 석산이므로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는데 봉우리에 한그루 소나무가 낙낙장송으로 아름다운 것을 일컫는다.

◎백련낙조(白蓮落照)-구고리 서쪽 백연산은 석산이면서 단풍이 좋아 석양에 백연산너머로 지는 해는 산위에서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가을이면 백연산 단풍과 함께 지는해가 아름답다.

♠ 오수면- 둔덕8경(屯德八景)

조선 태종의 아들 효령대군의 증손자 춘성정(春誠亭) 이담손이 450여년전 터를 잡아 그 후손이 창성하였다. 춘성정이 살던 35칸의 넓은 저택과 그가 후손 교육을 위해 세운 서재의 이름이 둔덕강사 혹은 삼계강사 라 부르는데 이곳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주변의 풍광을 골라 강사 팔경이라 시를 지어 즐겼다고 전한다. 이갓아 팔경이 곡 둔덕 팔경이다.

현재 삼계강사가 남아있으니 그곳을 한번 방문하여 둔덕팔경을 짚어보아도 좋을 듯 싶다.(오수면 방축리 둔덕부락) 조망할 수 있는 다른 곳이 마을앞 노거수 아래 정자도 있다.

◎천황관월(天皇觀月)-보절면에 위치한 천황봉에 달이 떠오르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릅답다.

◎방장수운(方丈需雲)-지리산의 다른이름, 반야봉이 아득히 바라보이는데 바람따라 오고가는 구름의 운치를 이름

◎도언연약(道淵漁躍)- 마을앞 도석금이라는 개울이 있었다는데 군데군데 연못을 이루고 고기들이 노니는 것

◎경정앵천(警亭鶯川)- 경정은 서도역을 이른다고 함. 이곳을 정그랭이들이라 부르는데 아름들이 정자나무가 많아 녹음이 우거지면 꾀꼬리가 떼지어 살았다.

◎운교답청(雲橋踏靑)- 운교리의 구름다리이다. 둔덕리 주민들은 청명일에 이곳을 거닐었다.

◎풍악낙홍(楓岳落紅)-풍악산은 임실, 남원, 순창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름이다. 서남쪽으로 꿈뜰거리며 뻗어내리는데 가을 단풍이 정정을 이루고 낙엽이 질 때는 꽃이 지는 것 같다.

◎용사범종(龍寺梵鍾)- 남원교룡산의 선국사를 용사라고 일렀다. 첫새벽 삼경에 울리는 종소리가 둔덕리까지 들렸다 한다.

◎별천어적(瞥川漁笛)- 별천에서 고기를 잡으며 피리부는 소리, 말티재 자라울에 냇물이 별천이라 하였다. 밤이면 고기잡는 하동들의 피리부는 소리가 흥취를 돋우었다.

신포정-1846년에 뜻있는 사람들이 협력하여 정자를 세우고 탁월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자밑에는 소(召)가 있고 달이 물결에 비치면, 출렁거리며 달을 씻는 듯 하다고 탁월정이라 하였다. 1922년 친목회 후손들이 정자를 고치고 신포정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 오르면 오수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신덕면- 운호8경(雲湖八景)

운호 팔경, 조선시대 산수와 벗삼아 풍류를 즐겻다는 신덕면의 운호 팔경은 수천리에서 조망하며 음미해 봄직하다.

◎ 상암모연(商巖暮煙)

상암(商岩)은 신덕면 수천리의 서쪽에 우뚝 솟은 바위로 웅장하기가 이를데 없다. 특히 황혼에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옛 어른들을 무아지경으로 끌어들이는 비경의 정경이었다고 전한다.

◎용동조운(龍洞朝雲)

용동은 수천리의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용소골로 알려져 있다.아침 안개가 용소골에 드리워진 모양이 마치 용이 등천하는 것 같다하여 용동조운이라고 한다.

◎ 호치숙무(虎峙宿霧)

수천리 동남에 위치하여 골짜기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안개가 여기에서는 더욱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사당춘초(麝塘春草)

사당은 수천리의 정 북이다. 이곳은 특히 봄철에 대지의 푸르름이 산수와 조화를 이루어 생동하는 삶의 고동을 느끼게 한다는 뜻이며, 사당은 노루가 산등성이 넓은 곳에서 풀을 뜻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강추월(芝岡秋月)

지강의 가을은 풍성한 대지를 마치 축복이나 하는 듯 만월이 서서히 동천에서 떠오르면 꿈속에서나 볼수 있는 활홀경이라 한다. 지초지, 언덕강 가을 달을 이름이다. 수천리 마을 뒷산 산 날망에 지초가 많았다는 증언이다.

◎죽림청풍(竹林淸風)

현재는 죽림이 무성하지 않다. 예전에는 무성한 숲을 이루고 여름에 이곳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노래한 것이다.

◎등령낙조(燈嶺落照)

수천리의 서쪽 위치한 호롱 모양의 산봉으로 서쪽하늘을 황혼으로 수 봏은다한다. 낙조가 이루는 황혼은 마치 불가에서 말하는 서방정토를 연상케 할만큼 황홀하다고 한다. 이 등령은 고개이다. 등령을 넘으면 사기소 마을로 통한다. 예전에는 이 등령을 넘어 사기소를 통하여 불고개를 넘었다고 전한다.

◎도봉관수(棹峰觀水)

도봉은 수천리의 북서 방향에 속해있는 봉우리로 옛날에 비가오지 않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도자는 노를 젓다라는 뜻의 한자로 이곳 봉우리에오르면 구비구비 흘러가는 물줄기가 선경을 이룬다는 것인데 예부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선유8경

'선유8경'은 명사십리(明沙十里), 평사낙안(平沙落雁),
망주폭포(望主瀑布),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 삼도귀범(三島歸帆), 선유낙조(仙遊落照), 장자어화 (壯子漁火), 월영단풍(月影丹楓) 등이다.

'명사십리'는 선유도 해수욕장의 투명하고 유리알처럼 고운 백사장을 일컫는 말이다.

충남 태안의 만리포 해수욕장을 능가할 정도로 넓은 백사장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만리포보다 인적이 드물어 해수욕하기에 좋다. 또 선유도 해수욕장은 해변의 경사가 얕아서 아이들과 함께 해수욕하기에 안성맞춤. 100여 m를 들어가도 어른 키를 넘지 않기 때문. 일몰과 일출 포인트로도 그만이다.

'평사낙안'은 선유도 마을 뒷산에서 망주봉을 바라보게 되면 시야에 들어오는 은빛의 모래톱 가운데 수령 500년 된 팽나무의 형상을 가리킨다. 낮은 팽나무이지만 4개의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모래 위에 앉은 모습이 기러기가 비상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평사낙안'이라 한다. 썰물이면 물이 빠져 모래톱이 지척으로 드러나지만 갯벌이 약해 걸어 들어 갈 수는 없다.

제3경 '망주폭포'는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산 망주봉에 큰비가 내릴 때 7∼8개의 물줄기가 폭포가 되어 흘러내리는데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애절하고 한편으로는 화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산십이봉'은 고군산의 방벽 역할을 하는 방축도와 말도 등 12개 섬의 산봉우리가 마치 투구를 쓴 병사들이 도열하여 있는 모습이라 해서 무산십이봉이라 한다.

'삼도귀범'은 선유도 북쪽의 무인도 3곳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데 돛배 3척이 만선이 되어 깃발을 휘날리고 돌아 온다하여 삼도귀범이라 한다.

'선유낙조'는 선유8경 중에서도 최고로 꼽는다.

점점이 떠 있는 조그만 섬과 섬 사이의 수평선으로 해가 질 때면 선유도의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불바다를 이뤄 황홀감을 연출한다.

'장자어화'는 고군산도민의 자랑이었다. 바로 황금어장을 뜻하는 것으로 조기잡이 어선이 밤바다를 수놓았던 과거를 말한다.

'월영단풍'은 신시도의 해발 199m 월영봉 단풍을 가리킨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곳의 월영단풍에 반해 바다를 건너와 잠시 머물었다고 해서 유명해졌다

완주 용진10경

동포귀범(東浦歸帆: 초포(동포)다리 부근이 범선)
서방낙조(西方落照: 서방산에서 보는 낙조 풍경)
봉서모종(鳳棲暮鍾: 진묵조사가 살았던 봉서사의 저녁 종소리)
종남토월(終南吐月: 종남산에 뜨는 달 모습)
봉소포란(鳳巢抱卵: 조선 8대 명당의 하나인 정부인 박씨 묘소)
회포습지(回浦濕地: 회포에 있는 가시연꽃과 습지)
간중천렵(澗中川獵: 간중리 맑은 물에서 하는 천렵)
구억명창(九億名唱: 구억리 소릿굴의 권삼득 명창 묘소)
용진독서(龍津讀書: 용진서원의 글 읽는 소리)
신지감천(甘泉: 신지리의 맛있는 물이 전국에 알려짐)

*진묵대사와 천렵

진묵대사가 간중천에 이르니 어린아이들이 천렵을 하여 물고기를 끓이고 있었다. 
스님께서 끓는 솥을 들여다보고 

“발랄한 고기들이 죄 없이 삶아지는구나” 
탄식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며 말했다.

 “스님께서도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주면 잘 먹지” ​“그럼 저 한 솥을 스님께 맡기겠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스님께서는 입을 솥 가에 대고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다. 이에 소년들이 모두 놀라 이상히 여기면서 말했다. ​
“부처님은 살생을 금지하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고깃국을 마시고도 스님이라 할 수 있습니까?”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살려주기는 내가 하겠다”
하고 마침내 옷을 벗고 물가에 등을 돌려 설사하니 무수한 물고기들이 항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봄물을 타고 금빛을 번쩍거리며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스님이 이야기 했다. ​

“너희들은 이제부터 저 강가로 가서 다시는 미끼에 걸려 가마솥에 삶아지는 고통을 격지 말아라” ​

이에 모든 소년들은 탄식하고 그물을 거두어 가지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