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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공향(供香), 향을 바치다

공향供香, 향을 바치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에서 나온 국보 '금동합과 향'은 당시 사용했던 유향(乳香·아라비아반도에서 자생하던 유향목의 수액을 말려 만든 향 )이 남아 있어 가치가 크다. 석탑 내부에서 유향이 나왔다는 것은 당시 불교 의식에서 중요하게 사용됐다는 뜻이다.

익산 미륵사지 출토 '금동향로' 도 모습을 드러낸다.

호림박물관의 서울 강남구 신사분관이 27일부터 1221일까지 갖는 '(), 푸른 연기 피어오르니'는 한국인의 향 사랑을 조망하는 전시다.

향과 관련된 그림, 공예품 등 작품 170여 점을 통해 한국 문화 속 향의 의미와 역사를 살펴본다.

국보 익산 미륵사지석탑 출토 '금동합과 향'과 보물 익산 미륵사지 출토 '금동향로', '순종순명후가례도감의궤', ‘청동은입사향완’, ‘청동사자장식 향로’, ‘종정도10폭병풍’, ‘채제공초상화’, ‘석류 불수문 향낭’, ‘향갑노리개등 고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소개하며 국보 1건과 보물 11건도 포함돼 있다.

이번 전시는 3개의 전시실에서 각각의 주제로 진행되며, 실물 향을 비롯, 향과 관련된 그림과 전적, 도자와 금속 등의 각종 공예품 등 작품 170여 점을 선보인다.

한자 ()’은 좋은 향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 곡식이 그릇에 담겨져 있는 모양에서 나왔다. , 향은 곡식에서 나는 좋은 냄새를 의미한다. 이후 향의 의미는 확대되어 좋은 냄새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사람은 좋은 냄새를 곁에 두고자 주변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물질을 찾고 가공하여 향을 만들었다. 향의 재료가 되는 물질은 대부분 식물이다. 그 대부분은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위해서 사용한 박산향로(博山香爐)가 출토된 사례가 있다. 이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향을 누리는 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됐다. 향은 일부 일상생활에서도 소비되었지만, 불교가 전래되면서 더욱 사용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서 향을 피우기 위한 도구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고대 시기의 향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로는 고구려의 무덤벽화, 백제의 금동대향로와 향, 통일신라시대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는 각종 향로가 있다. 이와 같이 고대시기에 전래된 향 문화는 이후 중세시기에 전개되는 향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을 피우는 문화는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왔다. 특히 불교에서 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와 역할을 하였다. 향을 피우는 행위는 부처님과 보살에게 공양을 드리는 것으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의미가 있다. 아울러 수행자에게는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집중력을 높여주어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불교의 분향(焚香) 의례에서는 거향로(居香爐)현향로(懸香爐)병향로(柄香爐) 등 다양한 형식의 향로가 사용되었다. 이들 향로는 조형과 장식이 뛰어나 우리나라 공예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

유교에서 분향은 중요한 의례 행위로 여러 가지 이유와 의미가 있다. 우선,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고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또한, 향을 피우는 행위는 의식이 행해지는 공간을 정화하고 신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향을 피우는 동안 사람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하게 의식을 진행할 수 있었다. 유교 의례에서 사용한 향로는 불교와 조형에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중국 고대 청동기의 하나인 정()을 바탕으로 제작된 새로운 형식의 향로가 유행하였다. 이러한 향로는 도자, 금속, 돌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단순 간결한 조선 공예미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향을 만드는 재료와 분향 도구를 소개한 '여향, 함께한 향기' 섹션에선 한반도에 향 문화가 정착한 과정을 짚는다. 고구려 무덤벽화에 그려진 향로, 백제시대에 건축된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출토된 향합(향을 담는 뚜껑이 있는 그릇), 통일신라시대 유적에서 확인된 각종 향로를 통해서다.

'공향, 천상의 향기' 섹션에선 향의 종교적 의미를 살핀다. 불교의 분향 의례는 역사가 깊다. 향을 피우는 건 부처님에게 바치는 공양인 동시에 수행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행위다. 분향 의례에 사용된 향로는 조형과 장식이 뛰어나 불교 공예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유교의 분향은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이었다. 유교 의례에 쓰인 향로는 유기, 도자, 돌 등으로 단순 간결하게 만들어 조선 공예미를 보여준다.

'완향, 애호의 향기' 섹션은 향을 즐긴 선조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향낭(香囊·고려시대부터 사용한 향을 넣어 몸에 차는 주머니)을 지니거나 노리개에 향을 넣어 현대인이 향수를 뿌리듯 향을 즐겼다. 또 옷을 향기롭게 하고 옷에 좀이 먹지 않도록 여러 가지 향을 섞은 의향(衣香)을 만들어 옷장에 넣었다.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1720~1799)이 분홍색 관복을 입고 향낭을 든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호림박물관이 꼽는 지나쳐선 안되는 작품이다.

유진현 호림박물관 학예연구부장은 통사적으로 전 시대에 걸쳐 향을 소개하는 것은 호림박물관 이래 처음으로 알고 있다향이 다양한 목적으로 다양한 계층에 사용되고 있음을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와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국보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益山 彌勒寺址 西塔 出土 舍利莊嚴具)는 금제 사리봉영기 1, 금동사리외호 1, 금제 사리내호 1, 청동합 6점 등 모두 9점으로 구성됐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639(무왕 40) 절대연대가 기록된 금제 사리봉영기(金製 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사리외호(金銅舍利外壺), 금제 사리내호(金製 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이다.

금제 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음각되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즉 백제의 왕과 왕비의 장수와 왕조의 영원무궁을 빈 것으로 미륵사는 왕사로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봉영기는 그동안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롭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게 되어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높다. 서체 역시 곡선미와 우아함이 살아있는 초당풍(初唐風) 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백제서예의 수준과 한국서예사 연구에 필요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금동사리외호 및 금제 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서, 이러한 구조는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서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볼륨감과 문양의 다양성과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합 중 하나에 새겨진 백제 2달솔 목근(達率目近)’이라는 명문을 통해 시주자의 신분이 최상층이고 그들이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서 희귀성이 높다. 청동합은 녹로(轆轤)로 성형한 동제 그릇으로서 그 일부는 우리나라 유기(鍮器) 제작 역사의 기원을 밝혀 줄 중요한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의 모습 그대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에 있어서 절대적 사료이자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와 백제 금속공예 기술의 역량을 응집해 탁월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켰으므로 한국공예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유물로서 위상이 높다. 7세기 전반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한편 동아시아 사리공예품의 대외교류를 밝혀주는 자료로서 역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보물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국립익삭박물관 소장)는 통일신라(8세기 중엽8세기 말 경)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출토 경위가 확실하며 완벽한 보존 상태를 지닌 작품인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첫 예가되는 통일신라의 금동 수각형 향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미륵사지 금동향로의 조형에 대해서는 국내의 자료가 전무하여 중국과 일본 수각형 향로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우선 중국 수각형 향로 가운데 미륵사지 향로와 비교되는 당대(唐代)의 작품이 여러 점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6개의 다리와 6수면(獸面)을 지닌 741년의 경산사지(慶山寺址)출토의 향로가 미륵사지 향로의 조형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륵사지 향로는 당대에 만들어진 중국 수각형 향로의 조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고식의 연판 모습과 감은사지 사리감과 유사한 수면(獸面)과 고리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 초에 이루어진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반영하여 한국적으로 수용한 작품으로 보인다.

백제 금동향로와 동일한 금·구리 아말감 도금법을 사용한 점 역시 이 향로의 제작시기를 올려보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와 세밀한 비교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 향로의 제작시기에 관해서는 불교미술과 함께 금속공예에 있어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던 8세기 전반에서 중엽을 넘어서지 않는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미륵사지 발굴조사를 토대로 다른 동반 유물과의 비교를 통해 이 향로가 858년 이전에 매납(埋納)되었다는 견해는 이러한 편년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