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춘의 『미암일기』로 본 전라감사와 ㅣ전라감영
미암 유희춘은 전라도 해남 출신의 대학자로 방대한 분량의 자필 일기 『미암일기』를 남겼다. 이 일기는 미암이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부터 1577년(선조 10) 5월까지 10년간에 걸쳐 쓴 것이다. 여기에 1571년(선조 4) 2월 전라감사에 임용되어 그해 10월 이임할 때까지의 일지가 들어 있다. 지난번에는 유희춘에 대해 알아보았고, 이번에는 『미암일기』에 실린 전라감사에 대해 살펴본다.
▶ 『미암일기』 개관
『미암일기』(11책, 보물)는 조선시대 개인 일기로 가장 방대한 분량이라고 알려져 있다. 본래 14책이었는데 현재는 11책만 전해지고 있다. 10책은 그의 일기이고, 1책은 자신과 부인 송덕봉의 시문을 모은 것이다.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미암일기』는 이이의 『경연일기』ㆍ『석담일기』와 더불어 실록편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일기는 임진왜란 이전 감영의 운영실태만이 아니라 사대부가의 벼슬과 살림 살이, 음식, 재산 증식, 부부 생활, 노후 생활 등 일상 생활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 일상사의 보고이다.
『미암일기』는 『미암집』 목판과 함께 일찍이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어, 미암 후손들의 세거지인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의 미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담양문화원에서 번역하여 출간하였으며, 내용을 풀어서 『홀로 생각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라는 대중서로도 출간되었다.
16세기 『미암일기』 외에 전라감사 일지로 18세기 영조대 이석표의 『호남일기』, 19세기 순조대 이상황의 『호남일기』와 서유구의 『완영일록』 등이 있다. 이 중에 전라감사 업무를 상세하고 풍부하게 기록한 대표적인 일지가 조선전기의 『미암일기』와 조선후기의 『완영일록』이다.
▶전라감사 부임절차
미암은 해남 고향에 내려와 있다가 선조 4년 2월 4일 전라감사 후보 1순위에 올랐다. 2월 11일 전라감영의 영리(아전) 나덕린과 마두(馬頭) 최광수로부터 전라감사에 임용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친지와 지인들의 축하 인사가 쇄도하였으며,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전라감영의 도사, 검률, 심약, 영리들이 나주까지 내려와 영접하였다.
3월 3일 한양에 들어왔으며, 이튿날 입궐하여 승정원에서 임금에게 감사하는 숙배를 올렸다. 다음날, 전라감사 임용에 따라 부ㆍ조ㆍ증조 삼대를 추증하는 교지를 받았으며, 광흥창에서 녹봉으로 쌀 10석, 콩 7석, 명주[紬] 1필, 포 4필을 받았다. 이어 조정 대신들을 찾아가 인사하고 축하객들의 인사를 받았다.
3월 13일에 임금에게 하직을 고하는 숙배를 드리고 교서와 밀부를 받아 곧바로 남대문을 나와 전주 전라감영으로 출발하였다. 출발 전에 전임 전라감사 이우민을 집으로 찾아가 만나고 도내 사정을 들었다.
3월 21일 전라도 관문인 여산에 도착하여 관리들의 영접을 받았다. 태평소를 울리며 여산관아로 나가 앉아 감사로서의 업무를 시작하여 소지와 보장 200~300장을 처결하였다. 이날 공사를 받친 자들이 71인이나 되었다.
22일 아침 일찍 여산향교 문묘에 가서 알성하고 점심 때 삼례역으로 들어와 또 보장을 받아 처결하였다. 이날 전주로 들어와 경기전 태조어진에 숙배한 후 후대청(後大廳, 전주객사)에 들어가 관리들의 공ㆍ사례(公ㆍ私禮)를 받고 차를 마신 다음 종일 공사를 처결하였다. 이튿날 23일에 전주향교 문묘 알성 후 종일토록 공사를 처결하였다.
▶군현을 순력하며 도정 처결
미암은 전라감사로 부임한 3월 21일부터 10월 14일 대사헌에 임용되어 전라도를 떠날 때까지 201일을 재임하였다. 이중 전주 감영에 머문 것은 21일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80일은 전라도 각 군현을 순력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감영제 운영형태는 감사들이 감영에 머물지 않고 각 군현을 순력하며 통치하는 행영제(行營制)였다. 감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일도를 통치하는 유영제(留營制)로 바뀐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선화당을 비롯한 감영건물들은 유영제하에서 건립된 것들이다. 유영제가 되면서 감영 건물들이 필요했다.
미암은 6개월 동안 무려 4차례에 걸쳐 순행을 나갔다. 1차 순행은 3월 26일부터 5월 6일까지 40일 동안 이어졌으며, 21개 고을을 돌아보았다. 행로는 전주→임실→남원→옥과→담양→순천→낙안→흥양→보성→장흥→강진→해남으로 이어졌다. 해남에 머물 때 실록봉안사가 내려온다는 전갈을 받고 일정을 당겨 영암→나주→광주→진원→장성→ 태인→ 금구를 순행하고 전주 전라감영으로 돌아왔다.
2차 순행은 5월 17일부터 7월 5일까지 48일간에 걸쳐 18개 고을을 순행하였다. 3차 순행은 7월 9일부터 9월 5일까지 56일 동안 27개 고을을 순행하였다. 4차 순행은 9월 16일 출발하여 10월 14일 무장에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29일간 13개 고을을 순행하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순행을 하였지만 전라도 56개 군현 중에 제주도 3개 군현은 제외하고 42개의 군현을 순행하고 12개 군현에는 가보지 못하였다.
▶도정 처결 실태와 사적 생활
미암은 전라감사로서 순행하면서 각 군현의 관아에서 좌기(坐起)하여 도정을 살피고 공사를 처결하였다. 좌기란 관청에 나와 서무를 논하여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순행시 고을에 들어가면 먼저 향교 문묘에 들러 공자 신위에 참배하였다.
예컨대 3월 26일 전주 감영을 출발하여 오원역에서 점심을 먹고 임실로 들어가서 향교 문묘에 알성을 한 뒤 관아에 들어와 공사를 처결하였다. 이날 보첩(報牒)과 소장(訴狀)이 비 오듯 하여 초경(7~9시)에야 끝이 났다. 공사가 많으면 등불을 밝히고 처결하기도 하였다. 27일 남원에 순행했을 때는 보장과 소장이 너무 많아서 당일 끝마치지 못하였다.
미암은 순행하면서 그 지역의 일가친지를 만나고 집안 제사를 지내는 등 개인적인 일도 보았다. 남원 가는 길에 친척 오산의 한매(韓妹) 집을 방문하고, 종이ㆍ부채ㆍ먹ㆍ붓 등을 선사하였으며, 점심때는 양사형을 만났다. 이런 일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미암은 감사로서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사적인 일도 보고, 빈객도 맞이하였다.
▶전라감사의 선물 정치
『미암일기』에서 주목되는 것의 또 하나는 선물 정치이다. 거기에는 공적인 선물도 있고 사적인 선물들도 많다. 미암은 공적인 일 말고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수시로 선물을 내렸다. 선물을 내려 주는 것은 거의 매일 있다시피 한 일상적인 일이었다.
예컨대 전라감사로 부임한 다음 달 4월 3일 친척과 친구들이 찾아오자 부채ㆍ종이ㆍ붓ㆍ먹 등을 선물로 주었다. 6일에는 같은 해에 진사에 합격한 오웅 일행이 찾아오자 쌀ㆍ콩 각 1석을 주고 유석(油席)ㆍ부채ㆍ종이ㆍ갈모를 주었다. 또 전(前) 현감 조숙관이 아들을 보내 사례 하자 붓ㆍ먹ㆍ부채를 주었다.
11일에 낙안에 가서는 유생 10여 인과 생원 유지와 허사증에게 먹과 붓을 주었다. 12일에는 어사 유도(柳濤)에게 갈모와 부채를 보내고 장흥에서 만나자고 청했다. 13일에는 사포의 첨리와 만호 및 현의 군관들을 시험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둔 4인에게 갈모를 주었다.
선물은 일상적인 지방통치의 한 방편이었다. 전라도 지역성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은 종이의 고장답게 종이류와 부채, 갈모 등이 선물로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갈모는 비가 올 때 갓 위에 쓰는 것으로 기름종이로 만든다.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전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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