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5> 남원의 달과 김병종미술관의 조선백자전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4> 남원의 달과 김병종미술관의 조선백자전

그림이 그려진 옛 도자기를 보며 글 없는 그림책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연꽃이 가득 핀 연못에서 물장난치는 동자의 모습이 새겨진 고려청자 대접은 한여름의 무성한 싱그러움이 가득한 그림책이 되고, 17세기 철화백자항아리에 그려진 장난스럽고 유머 넘치는 표정의 용에선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가 떠오른다. 

못난 외모로 놀림을 받지만 마침내 세상을 구하는 멋진 용으로 승천하는 상상이다. 분청사기나 백자에 천진하게 그려진 각종 풀과 식물 그림은 어찌나 추상적이고 자유로운지 그림만 떼어내 당장 책으로 엮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도자기를 감상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시대, 재료와 제작 지역, 형태와 쓰임, 장식 기법 등 하나의 작품을 여러 갈래로 톺아볼 수 있어 알아가는 기쁨이 크다. 

역사와 학술, 예술적 접근도 해보지만, 그림책처럼 상상하는 감상법은 우리 도자기와 한결 친숙해지는 비법이다. 만든 이와 소통하는 느낌이라 찬찬히 들여다보며 친해지는 것. 

이런 감상법 덕분에 2023년 2월부터 5월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시를 비롯해 같은 해 가을, 꽃과 식물을 애호했던 조선 사대부의 취향을 담은 도자기를 소개한 호림박물관의 ‘조선양화_꽃과 나무에 빠지다’ 전시 등 도자기에 담긴 다채로운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유독 반갑고 즐거웠다.

지난 25일까지 남원 김병종미술관서 열린 국립중앙박물관 주최 ‘국보순회전 : 모두의 곁으로 ’순백의 아름다움에 빠지다, 조선백자‘'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유물 백자 달항아리가 문화도시 남원에서 처음으로 전시됐다.

남원 시민들에게 백자 달항아리가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광한루 때문이다. 광한루는 달 속에 있다고 전해지는 광한전을 의미하므로, 월궁으로도 불린다. 광한루 안에 완월정(玩月亭)이 자리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 남원은 한국 최대의 달의 도시다. 일본군을 물리친 인월면 인월리(引月里)
그리고 광한루원에서 요천을 건너는 길목인 승월교(昇月橋)에서 승월대(昇月臺)에 솟은 달을 바라보던 풍습도 있지 않았나.

남원은 200여 개가 넘는 달(月)과 관련된 지명을 갖고 있는 도시로 선인들이 천상의 월궁을 본 떠 만들었다는 광한루원에서 시민들의 주요 등산로인 애기봉까지 이어진 달맞이 길이 펼쳐져 있다.

달을 보러 나왔다는 승월대와 이성계 장군과 관련된 인월 달오름 마을 등 달과 연관된 지명과 마을이 10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는 세 가지 이야기를 했다.

첫째, 조선 왕실의 자기였던 백자에 대해 소개하고, 둘째, 조선전기 관요(官窯)와 글자를 새긴 백자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주로 제작된 달항아리를 선보였다.

달항아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무엇인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대로, 달항아리는 동양사상의 핵심인 무(無)나 공(空)이 구현된 것인가. 혹은 한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역의 태극(太極)이 구현된 것인가. 그러나 달항아리와 같은 백자가 철학적 개념을 구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 중인 철화백자매죽문시형 항아리(17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적혀 있다.

 “中虛足容物(속이 비어 있어서 물건을 담을 수 있네)” 

교토 국립박물관이 소장중인 청화백자시명팔각병에는 “宏其量容於物也(용량이 커서 물건을 담네)”라고 적혀 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그보다 더 단순하고 큰 달항아리의 부피는 철학적 상징으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이 담을 수 있는 실용성 때문에 중요하다. 달항아리의 비어 있음은 철학적 비어 있음이 아니라 도구적 비어 있음이다.

도구면 어떤가,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되지!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라는 고유섭은 달항아리에서 “무계획의 계획”을 발견하고, “구수한 맛”을 느끼고, 화가 김환기는 도공의 무심(無心)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형태와 빛깔에 감동했다. 실로 달항아리는 고려청자나 동시대 이웃 나라 자기와 비교해서 계획이 없는 듯하고, 거친 듯하고, 그리하여 구수한 듯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조차도 오늘날의 미감(美感)이다. 

달항아리가 유통되던 시대를 살았던 학자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중국과 일본 자기에 비해 조선 자기가 거칠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그 거친 면모는 조선의 순박한 마음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 거친 마음과 거친 풍속, 거친 일 처리와 관련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달항아리는 아름답지 않단 말인가? 나 역시 옛 달항아리가 실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깊이 있는 백자의 살결”이나 “둥근 맛” 같은 데서만 오지 않는다.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원래 예술품이 아니라 그저 기능에 충실한 일상 용기였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거친 일상 용기가 정교함에 질린 감식가의 눈을 자극하고 말았다는 아이러니에서 온다. 그리하여 결국 무엇을 반드시 담아야 하는 노역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나 쉬게 된 달항아리의 생애에서 온다.

김환기의 달항아리 그림을 볼 때 나는 민족 문화뿐 아니라 일상용품에서 예술품으로 도약한 사례들도 떠올린다. 이를테면 부엌 일상 용기를 그린 네덜란드 정물화를 떠올린다. 꿀이나 기름을 무겁게 안고 있던 달항아리도 이제 정물화 속 용기들처럼 쉬게 된 것이다. 달항아리의 비어 있음은 이제 도구적 비어 있음에서 심미적 비어 있음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하여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볼 때 나는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캔’ 그림이나 에드워드 웨스턴의 ‘변기’ 사진을 떠올린다. 

희고 낡은 달항아리나 낡은 수프캔이나 흰 변기나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의 정수’이기에 아름다움으로의 도약이 가능했다. 

타고난 귀중품들은 이미 아름다울 거라는 기대가 있기에 그런 심미적 도약이 불가능하다. 옥션에서 수십억의 고가에 팔려 나가는 귀중품이 되면서, 달항아리 역시 자기 아름다움의 바탕이던 ‘아무것도 아니었던’ 상태를 빠르게 잃어가는 중이다. 안타까운 것은 달항아리가 단 1점만 선보인 것 때문이다.

1467년 무렵 조선왕실은 궁궐에서 사용할 백자를 만들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 관요 곧 왕실 도자기 가마를 두었다. 

금사리(金沙里)는 1734년부터 1751년까지 운영된 가마이다. 금사리는 유백색 곧 우윳빛의 백자색과 달항아리를 만든 곳으로 유명하다. 금사리 수습 파편을 통해 달항아리 등 금사리에서 만들어진 백자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금사리(金沙里)는 금모래가 깔린 마을이라니 이름부터가 아름답다. 그러나 금사리는 이름 못지않게 18C 전반에 아름다운 백자를 구워낸 가마터들이 산재한 곳이다. 화목을 찾아 10년 단위로 옮겨 다니던 관요 가마터를 최초로 정착시켰던 곳이며 순번제로 운영하던 도공들 또한 붙박이로 고정을 시키는 등 개혁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 못지않게 거의 사라져 버렸던 청화가 다시 살아나는 등 도자의 질 또한 향상되어 가장 한국적인 미감의 백자들을 많이 만들어 낸 의미심장한 명소이기도 하다.

금사리 백자의 특징은 각을 치는 등 기형의 변화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정선된 태토와 눈처럼 흰 설백의 색감이다. 두 점의 백자청화복자명접시편 또한 이런 특징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좌측의 것은 손상이 심한 가운데 각을 친 것이 굽에서 몸체로 이어지고 있으며 접지면은 유약을 훑어낸 채 노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접시 중앙에는 청화로 원 안에 복(福)자를 넣고 있고 외면에도 청화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비교적 원형이 살아 있는 우측의 것 또한 굽의 각이 몸체로 이어지고 있으며 굽에는 굵은 모래받침 흔적이 역력하다. 이 또한 접시 중앙에는 청화로 원 안에 복자가 들어 있는데 좌측의 것처럼 선명치 않고 흐릿한 편이다. 두 점 모두 태토며 유약이며 색감 등이 전형적인 금사리 도자의 특색들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금사리는 이제 이름처럼 아름답기만 한 마을은 아니다. 팔당댐으로 인해 앞강에 물이 차올라 강변의 금모래는 이미 찾아 볼 수 없게 된지 오래다.

달항아리는 18세기, 즉 영조와 정조 임금 시기에 조선 왕실 도자기를 구웠던 관요(官窯)인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와 분원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보름달처럼 둥근 항아리를 일컫는다. 크기에 상관없이 형태와 제작 방식이 같으면 ‘달항아리’로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달항아리 하면 보게 되는 것들은 대체로 높이 40센티미터가 넘는 큰 항아리(大壺)이다. 전시된 달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유물 이름이 그냥 백자호(白磁壺)라고 되어 있지만 높이가 46센티미터이니 정확히는 백자대호(白磁大壺)가 맞다. 우리야 이런 것 저런 것 따질 것 없이 달항아리라 부르면 그만이겠지만.

겉모습만 보면 달항아리는 비대칭이다. 매끈한 균형과 흠잡을 데 없는 좌우 비례를 갖춘 게 아니라 좌우가 엇박자이다. 그래서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조금씩 다 다르다. 천의 얼굴을 지녔다고 해야 할까. 왜 이렇게 됐냐면 달항아리를 한 번에 가마에서 구워낸 게 아니라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 뒤에 둘을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제아무리 노련한 도공도 당시의 기술로는 한 번에 구워낼 수가 없었다.  결과 달항아리의 몸통 가운데 볼록한 부분에 이런저런 흔적이 남는 까닭이다.

달항아리는 독보적인 아름다움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돼 왔다. 전시실에는 달항아리와 영상을 함께 배치해 힐링과 휴식을 제공하는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다.

주목할 유물로 고 이건희 회장 기증 ‘국보 백자천지현황명발’ 4점이 보였다. 

조선 전기 경기도 광주 관요(官窯)에서 생산된 왕실용 백자이며, 바닥면에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천’ ‘지’ ‘현’ ‘황’은 조선시대 초부터 마치 숫자나 알파벳처럼 기호로 쓰였는데,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이러한 표시가 있는 백자는 대부분 왕실에 납품되던 것으로 생각된다. 좋은 발색과 반듯한 생김새는 문화도시 남원과 잘 어울린다.

 도자기가 품은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조선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의 공간과 서정을 탐구하는 이 전시를 통해 그간 살피지 못했던 색다른 도자기를 접할 수 있었다. 

또, 조선 후기 문인들이 심취했던 다채로운 취미생활이 담긴 도자기 그림을 보며 그들의 풍성했던 취향과 시대상을 읽어낼 수 있었다. 화병과 분재 화분, 화려한 무늬의 두루마기와 괴석 등을 백자 접시와 병에 빼곡히 그려 넣은 것을 보며 웃음이 배어 나왔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지난 16일 2024년 연간 관람객 10만 번째 관람객을 맞이하고 축하 행사를 가졌다.

이날 10만 번째로 입장한 관람객은 신예지(대구광역시) 씨로 휴식 차 미술관을 찾았다가 행운의 주인공이 됐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한 해에 1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하게 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아직 8월이라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2024년에는 12만 명 이상의 관람객들이 미술관을 찾아줄 것으로 예상된다.

남원 출신의 유명 화가인 김병종화백이 작품을 남원시에 무상기증하면서 건립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2021~2022년 ‘한국관광 100선’(문체부, 한국관광공사 공동주최)에 선정된 바 있다.

김화백은 이미 2018년에 291점의 작품을 남원시에 완전 무상으로 기증한 바 있는 등 무려 441점을 기증했다.

동양화가 김병종(69)은 1989년 서울대 앞 고시원에서 책을 쓰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됐다. 병원 치료 중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관악산에 갔다가 언 땅에서 꽃 한 송이가 올라오는 것을 봤다. 그 모습이 작고 아름답고 절절해서 화폭에 담았다. 화가의 대표작인 '생명의 노래'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그는 "극한의 육체적 고통과 생명의 위기를 겪고 나서 야산 땅속을 밀고나온 작은 꽃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그 전에는 거대담론과 사회 문제에 주목했는데 사소하고 잔잔한 생명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했다. 

화가의 붓이 향하고 나서야 꽃이 의미를 가졌다는 점에서 김춘수 시 '꽃'이 절로 떠오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그는 "시와 그림이 서로의 들러리가 되지 않고 수평적 관계를 맺는다. 시적인 언어와 회화적 표현은 한 뿌리에서 나오며, 시적 상상력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시의 힘에 기대어 그가 그린 꽃은 붉고 크다. 커다란 한 송이 가운데 검은 점이 두드러진다. 바로 꽃의 눈동자이자 심장이다. 김병종은 "마치 숨쉬는 것 같은 생명력을 표현했다고 했다.

오늘 '꽃'이란 작품에 시선이 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