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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8> 천년만에 다시 새겨지는 ‘오수개’ 형상 ‘오수개’ 형상이 1,000년만에 빗돌에 새겨진다.임실군과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8> 천년만에 다시 새겨지는 
‘오수개’ 형상


 ‘오수개’ 형상이 1,000년만에 빗돌에 새겨진다.
임실군과 오수개연구소는  29일 오수의견테마파크 내에 오수개 기념비를 건립한다.
유엔 FAO 품종 등재 기념 행사가 이날 오후 3시 임실군 오수면 오수반려누리 2층서 열린다.
'오수개'가 한국 고유품종의 국제기구 등재를 계기로 세계적인 반려동물의 성지로 부상하는 오수개의 위상과 그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여러 분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생물학적으로 복원에 성공한 ‘오수개’가 지난 6월 30일 유엔 FAO가 운영하는  오수개, 삽살개, 불개, 풍산개 등 보존·육종해야 할 4품종의 개가 가축다양성정보시스템(DAD-IS)에 등재됐다. DAD-IS는 동물 유전자원의 접근과 이익 공유를 위한 글로벌한 정보공유체계를 갖추고, 동물 유전자원의 보전, 관리 및 활용을 지원하는 국제 시스템이다.현재 199개 나라 39축종(畜種) 1만 5,188계통의 정보가 등재돼 있다.
거창한 오석(烏石)기념비 전면에  개(犬)의 형상이 새겨진다.
새겨지는 이 개는 바로 1,000년 전 호남지역에서 불길 속의 주인을 살리고 죽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의견으로 유명한 ‘오수개’이다.
1911년에 간행된 보통학교 교과서'조선어독본 제18장 의구'와 1973년 국민학교 3학년 어교과서에 오수에 대한 지명 유래가 전해진다. 
오수의견 설화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에 최자가 쓴 '보한집'에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술에 취해 잠든 주인을 불길에서 구하고, 숨을 거둔 충견을 다룬 설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주인인 김개인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개를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지팡이를 개의 무덤 앞에 꽂았는데, 이 지팡이가 실제 나무로 자라게 되어‘개 오(獒)’와‘나무 수(樹)’를 합한 게 지금의 지명‘오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오수는 충견의 상징이자, 의견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에도 동네주민들이 이 개의 죽음을 기리자고 세운 의견비의 전면에 글자 한 자 없이 죽어서 승천하는 개의 형상을 그렸다는 것이다. 
오수원동산의  현 의견비 뒷면에는 대시주 김방질동(大施主 金方叱同), 금물대시주 김여산(金物大施主 金如山) 등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비를 세우는 데 출자한 사람들로 이 정도면 오수 지역민 대부분이 참여했다.
그런데 또, 1,000년만에 새로이 새겨지는 개의 형상을 기념비 전면에 새긴다는 것이 여간 신기한 일이다. 
두 개의 개 형상이 1,000년 전의 승천하는 모양의 개를 제대로 세워놓고 보면, 지금 1,000년 후 복원된 개와 거의 100% 흡사하다는 것이 어찌 우연일까.
 물론 1,000년 전에 세운 기념비 뒷면에는 비 건립에 기여한 시주자 70여명(현재까지 확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1,000년 뒤인 오늘 세우는 비 뒷면에는 30여년 동안 복원 과정에서 애쓰고, 앞으로 더욱 애쓸 50여명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저것이 그 유명한 오수의견비여. 세운 지 족히 천년이 넘었을 것이구만”
지난해 임실문화원에서 열린 보고회에서 어느 한촌(寒村) 촌로(村老)들의 구전돼 온 말이, 드디어 금석문학자 손환일 박사의 탁본에 의해 의견비 건립 연대, 즉 간지(干支)가 확인됐다.
머지않아 종합학술대회가 개최돼 건립 연대가 공인(公認)을 받으면, 이 비야말로 세계 최고(最古)의 비로 세계적인 토픽과 함께 각광을 받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대체 ‘임술년(壬戌年)’은 서기(西記) 몇 년이란 말인가? 
아직은 정확하게 건립의 해를 찍을 수는 없지만, 1977년 정부에서 펴낸 ‘한국문화유적총람’에서 의견(義犬사)건 발생의 해를 973년(전거, 典據 추적중)이라고 적시한

것과 최자의 보한집이 1234년 펴낸 것을 감안할 때, 973년과 1234년 사이의 ‘임술년’일 것은 틀림없을 터. 촌로들의 구전과 함께 사건(973년)이 일어난 5년 후, 개띠해인 1022년의 임술년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느 촌민은 돌(비석)을 현물로 시주했으나, 대부분은 십시일반 건립비에 보탰을 것이다. 그러려면 건립 시기가 그때쯤이라야 맞지 않을까. 물론 1082년이나 그 이후가 아니란 법은 없지만, 그 의견비와 의견묘가 조선초 문인 노석동의 한시로 미뤄 짐작컨대, 그때까지도 현존했다고 볼 수 있다.
 언제 매몰됐을 의견비가 1925년 을축대홍수때 오수천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 천변으로 끌어올려졌고, 1939년 현재의 원동산 자리로 옮긴 역사적 사실들도 당시 언론이 분명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한편 이날 오수개 품종등재기념 심포지엄이 29일 오후 3시, 오수반려누리센터 2층에서 열린다.
축산과학원 김승창 박사가 '오수의 FAO DAD-IS 품종 등재와 자원 주권,
대전대 박승규 교수가 '한국 고대견종과 오수개의 문화적 고찰', 원광대 김옥진 교수가 '오수 반려동물
치유 반려동물로서의 오수개 활용 방안,
채수찬 전북대 혁신센터장(전 KAIST 대외부총장이 오수 반려동물 컨텐츠)를 활용한 세계화전략을 발표한다.
이어 등재 기념식과 등재 기념비 제막식이 열린다.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97296

전북의 의견 설화
주인을 위래 목숨을 바친 개에 관한 의견설화(義犬說話, 의구전설)는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으며, 이에는 어느 정도 사실에 바탕을 둔 것도 있다. 또 독자적인 기원에 의한 것과 다른 민족 사이에 전파된 것도 있다.
한국의 경우, 고려 고종 때 최자가 지은 수필시화집 ‘보한집(補閑集)’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최초의 것으로 보고 있다. 여러 종류의 의견설화는 고려시대부터 전하여 내려온 것이며, 이는 중국의 ‘수신기(搜神記)’와 같은 기록에서 전파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 유형으로는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을 포함, 투호구주형(鬪虎救主型, 호랑이와 같은 맹수를 물리쳐 주인을 구한다는 유형), 방독구주형(防毒救主型, 독약이나 독이 든 물이나 물건을 주인이 먹거나 만지려고 할 때 이를 막아 주인을 구한다는 유형), 명당점지형(明堂點指型, 개가 죽으면서 발복할 명당을 찾아 준다는 유형) 등이 있다.
의견설화의 대표격은 진화구주형형으로, ‘오수형(獒樹型, 전북 임실군 오수면 등)’이라고도 하며, 그 내용은 주인이 잠든 풀밭에 불이 나자 개가 몸에 물을 적셔서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 개는 죽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의 분포는 전국적으로 수십 여 곳에 이른다. 설화에 나타난 개는 인격화되어 지, 덕, 체와 강유(剛柔)를 겸비한 순박하고 정이 많은 한국적 인간상을 상징한다. 이러한 유형의 설화는 하동, 임실 오수 등 여러 곳에 널리 퍼져 있다.
유언호(兪彦鎬, 1730~1796)는 1757년 ‘연석(燕石)’에 의구전(義狗傳)을 썼다. ‘내가 들은 바로는 호남의 남원에도 의구가 있다는 데 아, 어찌 그리도 신령한가. 양응항(楊應恒)의 아내 홍(洪)씨는 사인(士人) 홍재(洪梓)의 딸로 남원에 살고 있었다’
일찍이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허리가 길고 다리는 짧으며 두 귀는 쫑긋하고 뽀죡했는데 고기를 던져 줘도 덥석 물지 않았으니 여늬 개들과 달랐다. 홍씨가 병이 걸려 거의 위태로웠다. “으레 암탉 삶은 국물을 써야 위급한 상황을 넘길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두 아이가 비로소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얼마 전, 개가 물었던 닭을 삼아 그렸더니 병이 마침내 회복됐다. 몇 년이 지난 뒤 홍씨가 사망하자 개가 먹지도 않고 슬피 짖었다. 염을 하고 관에 넣을 때가 되자 개가 문지방에 턱을 괴고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바라보았다. 사신을 안치하자 머리를 부딪치고 슬피 짖는 것을 밤이나 낮이나 그치지 않더니 그만 기운이 대해 죽고 말았다.
이 비는 현재 임실군 삼계면 삼은리 사월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김제시 순동에도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옛날 김제군 옥산리에 김득추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개를 몹시 좋아했다. 어느 날 개를 데리고 친구 집에 놀러갔다. 그는 친구네 집에서 술상을 마주 대하고 서로 정담을 나누었다. 개를 앞세우고 집으로 향하는데 술에 취한 김득추는 나지막한 야산을 지날 때 그만 풀밭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때가 이른 봄이라 따스한 햇살 덕에 김득추는 맥을 못 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산불이 일어났다. 불은 봄바람을 타고 미친 듯이 번져왔기 때문에 개는 김득추를 깨우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한번 술에 곯아떨어진 김득추는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김득추를 깨울 수 없는 것을 깨달은 개는 가까이에 있는 방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온몸에 물을 적셔서 잠이 든 김득추 옆 풀밭 위를 사정없이 나뒹굴었다. 곤한 잠에 들어 꿈속을 헤매던 김득추는 해가 서산에 질 무렵에야 겨우 잠에서 깨었다. 김득추는 개가 잠이 든 자기를 살리려고 불에 타서 이렇게 죽어간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취하도록 술을 마신 일을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득추는 자기 목숨을 구하고 불에 타서 숨진 개를 그 자리에 고이 묻어 주고, 얼마 후 개 무덤 앞에 조그맣게 비석을 세웠다. 지금도 김득추가 세운 의견비 옆에는 조그마한 방죽이 있는데 이 방죽을 ‘개방죽’이라 하며, 개가 몸에 물을 적셔 주인을 살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개에 관한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 의구전설(義狗傳說)이자 의견비 유래담이다. 의견비는 주인을 구하고 대신 죽은 살신성인의 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순동 마을을 가로 지르는 호남선 철로변의 올림픽 기념 숲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높이 58㎝, 너비 40㎝, 두께 15㎝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고, ‘의견비(義犬碑)’라고 음각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의견(義犬)이라는 글자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비(碑)자는 많이 마모된 상태이다. 주변에는 김이제(金伊堤, 개방죽)가 있다. 실명으로 김득추가 등장하고 의견비가 세워진 옆에 실제 방죽이 있는 등 사실성이 좀 더 구체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원동산의 오수나무와 의견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의 개비석,
김제시 김제읍 순동리의 의견비와 개방죽(현재 개방죽은 매립되었음),
정읍시 신태인읍 양괴리 산정마을의 개 무덤과 방죽
정읍시 북면 구룡리 신기부락 매개내의 의오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개비골(狗碑洞, 可碑洞)의 개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