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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0> 유재 송기면 선생과 관선당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9> 유재 송기면 선생과 관선당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의 수제자였던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선생이 어릴 때 그에게 학문을 청하기 위해 지은 ‘관선당(觀善堂)' 강사(講舍) 한 채를 마련했다.

유재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며,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13세가 되던 해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강사(講舍)를 마련하고 실학자 석정을 첫 번째 스승으로 맞이했다.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 1910년)과 더불어 근대 계몽기 ‘호남삼걸’로 알려진 석정 이정직은 식견이 넓고 시문과 시화 및 의학, 역학 등에 밝았다. 

'난을 치는[寫사]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일이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글을 아는 자가 아니라면 난을 충분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난을 그린다[畵蘭화란]고 말하지 않고 난을 친다[寫蘭사란]고 말하는 것이다.(이정직 '석정집(石亭集)'에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사군자 四君子], 괴이한 바위[괴석 怪石] 등을 주로 그렸다. 붓을 쓰는 문인들은 필력의 깊은 멋이 학습량과 내공에서 우러나온다고 보았기 때문에, 형상이 닮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글씨를 썼던 붓과 먹의 느낌이 그대로 그림으로 이어지니, 이러한 경지를 '서화일치(書畵一致)'라고 불렀다.

석정은 전북 문인화의 출발점이자 선비 서화가의 본보기였다. 옛사람의 글씨를 익히고 전수하기 위해 법첩(法帖) 등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수없이 임서(臨書)하게 했다. 

유재 역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했다. 

10여 년 동안 석정을 스승으로 모시며 서화를 비롯해 시문, 천문, 역산(曆算) 등 학문을 쌓으며 경륜(徑輪)에 뜻을 두게 됐다. 1906년, 유재의 나이 25세에 조정에서 박사과(博士科)를 실시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당시 시험장이 문란하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시험을 포기한다. 이후 1910년 석정이 타계하고 한일합병이 되자 경륜의 꿈을 버리고 석정의 뒤를 이어 후학을 지도한다.

1920년을 전후하여 부안 계화도에 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의 문하에게 나아가게 된다. 

간재는 율곡(栗谷)에서 우암(尤庵)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를 계승한 유학자로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성리학의 학맥을 지키고자 했다. 간재는 평생을 성리학 이념을 지키며 살았는데 일제는 물론이고 서양의 문물까지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유재는 이러한 전우의 학풍을 계승,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자신의 본래 심성을 잃지 않으면서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음 두 작품은 유재가 추구하는 도의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한다.

'못난 듯 사노라니 마음에 누(累)가 없고 / 번거로운 일 줄이니 꿈자리도 편하구나. / 한가하게 때로 홀로 걸으니 / 산수가 옷자락에 비쳐오네(‘偶題’)'

'하나도 가슴속에 누된바 없어 / 사람과 하늘 이치 본래 하나임을 알겠네. / 항상 맑은 기운 이 몸에 머무르니 / 내 마음 절로 담담하여 허공과 같네(‘詠歸亭’ 일부)'

그는 심성이기(心性理氣)와 본말존비(本末尊卑) 문제에 관해 잠심(潛心)했고, 고향인 김제에 요교정사(蓼橋精舍)를 짓고 후학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념한다.

 요교정사는 전북의 서예문화와 선비정신이 담긴 상징적 공간으로 최근들어 김제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한편 유재 송기면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사람이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년) 선생이다. 

강암의 4남으로 태어나 전북지사를 지낸 사람이 취석 송하진(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이사장)이다. 강암은 복순, 하경, 하철, 하춘, 하진, 현숙씨 등 4남 2녀를 두었다.

송기면은 1916년 '관선당에서(題觀善堂)'란 시를 지었다.

'오늘처럼 문풍(文風)이 떨어진 적도 없는데 여기 찾은 젊은 학도 고맙기만 하다. 성인 떠난 지 오래라 슬픈 지 오래인데 문득 글소리 들으니 감동이 크네 산봉오리 달 솟으니 때로 홀로 서성이고 오경(五夜)에 불  밝히고 혼자서 읊조린다 태평성대 그 날이 끝내는 있을 터 수절(守絶)의 마음 변치 않게 서로 보살피오 

후원 송죽은 길이 푸른 빛 간직하고 무릎 안고 신음하는 자재(自在)한 몸 천리 멀리 명사를 맞이하고 여기에 적힌 인물 일생 기억하리라 용산(龍山)의 밝은 달 가을 들어 둥글고 학동(鶴洞)의 푸른 연기 비 갠 뒤 새롭다 이 관선당을 버려두고 세상 어디에 속진(風塵)이 적을까'

'관선(觀善)'이란 '예기(禮記)'의 '학기(學記)'편에 나오는 말로, '벗끼리 서로 살펴서 상대의 선행을 본받는다.(相觀而善之)'라는 말에서 따왔다.

이는 '상관이선(相觀而善)'의 줄임말로, 친구들끼리 서로 좋은 점 을 보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학기(學記)'에 “대학의 교육 방법은 좋지 않은 생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예(豫)라 하고, 적절한 시기에 가르치는 것을 시(時)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서 가르치는 것을 손(孫)이라 하고,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도록 하 는 것을 마(摩)라고 한다. 이 네 가지가 교육이 흥한 이유이다.(大學之法, 禁於未發之謂豫, 當其可之謂時, 不陵節而施之謂孫, 相觀而善之謂 摩, 此四者敎之所由興也)”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후창(後滄) 김택술(金澤述,1884∼1954)의 후창집(後滄集) 9권에 '방옥경 관에게 답함 기축년(答房玉慶琯 己丑(1949))'에도 '관선(觀善)'이 나온다.

'옛날 간재선생을 모시고 그대의 병사(丙舍,곁채)에 머물러 공부 할 적에 그대는 총각이었고, 나는 약관(弱冠)이었습니다. 약관 과 동자는 비록 다르지만 나이는 실로 견수(肩隨,예를 갖추다)인지라, 나의 생각에 피차 나이가 넉넉하고 거처하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거의 해마다 상종하여 종신토록 서로 힘쓰게 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이별은 많고 모임은 적어 ㅎ홀로 산 것이 오래되어 '관선(觀善친구들끼리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움)'이 드물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근자에 길이 막혀 그대를 만나지 못한 것이 이전에 비해 더욱 심합니 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 아이가 남쪽으로 가서 그대를 알현하게 되어 근년에 안부를 갖추어 알게 되었고, 또 그대의 편지까지 받들고 와서 나에게 묻는 안부가 주밀하고 진지하여 정의(情誼)가 많이 넘치는 것을 보게 되니, 여러 번 완미하고 송독함에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싫증나지 않습니다.

충남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간재 전우의 문인록인 '관선록(觀善錄)'도 있다. 그의 문인들이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강학하던 시기에는 전북 7개 고을에서 27명, 전남 2개 고을에서 2명 도합 9개 고을에서 29명의 간재 문인이 배출됐다. 이 시기 간재의 전라도 문인 배출은 주로 그가 종유했던 각 지역 인물들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가 종유한 인물이 제일 많은 부안에서 가장 많은 문인이 배출됐다. 

간재가 전라도를 중심으로 강학하던 시기에는 전북 11개 고을에서 87명, 전남 6개 고을에서 20명, 전라도 통틀어 17개 고을에서 107명의 문인이 배출됐다. 이 시기 간재의 전라도 문인 배출은 주로 그의 강학활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의 강학활동이 활발히 전개된 정읍, 부안, 전주, 고창 등의 고을에서 많은 문인이 배출됐다.

간재가 해도(海島)에서 강학하던 시기에는 전북 14개 고을에서 249명, 전남 19개 고을에서 304명, 전라도 통틀어 33개 고을에서 553명의 문인이 배출됐다. 

간재가 그 이전과 달리 해도에서만 강학을 했는데도 이 시기에 와서 그의 문인 배출이 전라도 거의 전역으로 확대됐다. 또한 간재가 강학활동을 거의 전개하지 않고, 그가 종유한 인물의 수가 전북의 3분의 1도 안 되는 전남에서 전북보다 55명이나 더 많은 문인이 배출됐다. 아울러 1916년부터 전라도에서 배출된 그의 문인 수가 2배 넘게 늘었다. 

이는 간재가 해도에서 강학하던 시기에 독자적인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을 완성, 신망이 갈수록 높아진 점, 1910년 의병운동이 좌절된 뒤 보수 유학자 대부분이 간재와 같이 은거하여 후학을 양성하게 된 점, 전라도에서 문인집단을 형성한 다른 학파의 주된 인물들이 1916년 이전에 거의 다 세상을 떠난 점 등의 이유로 1916년부터 보수 유학자들이 전라도 전역에서 간재의 문하로 대거 몰려왔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연산 12년(1506년)에는 "전라도 부안(扶安) 땅에 있는 관선불어전(觀善佛魚箭)과 골어전(骨魚箭)을 숙화(叔華)에게 내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부안은 관세음보살과 무관하지 않은 지역인 것 같다.

두 개의 어전(魚箭)을 받은 숙화(叔華)는 흥청(興淸)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연산군 시절 팔도에서 뽑아온 여인들 중에서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여자를 흥청(興淸)이라 했다. 당시 1만 명 가량의 여인들이 궁궐에 모였다는 이야기는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흥청 때문에 망했다는 말이 흥청망청(興淸亡淸)으로 쓰이고 있다.

흥청으로 출세한 여인은 TV 드라마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장녹수였다. 부안현 몫으로 된 어전(魚箭)이 1개였던 시절에 궁궐에서 춤 잘추는 흥청(숙화)에게 어전 두 개를 주었다는 연산군. 부안현 어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없었다.

'경술관선계(庚戌觀善稧)'는 선비들이 서로 선행을 권면하기 위해 만든 모임의 기록부이다. 

‘관선(觀善)’을 혹은 ‘보인(輔仁)’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말은 '논어(論語)' 안연편의 “벗으로써 서로 어진 성품을 돕는다.(以友輔仁)”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군자는 학문으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君子는 以文會友하고 以友輔仁하라)

•以文會友(이문회우)
학문을 통하여 벗을 모은다는 뜻으로, 세속의 이익이나 재화를 바탕으로 한 이해관계가 아닌 학문이라는 매계를 통해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진정한 벗을 만들고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의미

•以友輔仁(이우보인)

벗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한 어짊을 보탠다는 뜻으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영위하는 바탕에는 타인과의 건설적인 관계 속에서 긍정적인 자신의 삶이 축적되는 것이고, 훌륭한 인격과 덕성 역시 올바른 벗과 같이 타인과의 바른 관계로부터 형성될 수 있다는 의미

관선계나 보인계는 존경스러운 위인이나 스승의 인덕을 배우고 서로 권면하자는 목적에서 결성됐다.

관선계나 보인계의 경우 글자를 ‘계(稧)’ 혹은 ‘계(禊)’라고 써서 일반적인 ‘계(契)’와 구분한다. 그 까닭은 보통의 계가 친목과 이익을 목적으로 것과 달리, 관선계나 보인계는 수신(修身)과 학문을 위한 순수한 선비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이 관선계는 안동권씨 이우당종택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학문과 수신을 위해 결성됐다. 좌목에는 이우당종택 자손들의 성명이 열거되어 있다.

김제 관선당이 원형을 잃어 아쉽다. 서당 등 과거 교육장이 사라져가는 지금,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친구들끼리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말자. 벗들이 서로 선으로 충고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