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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9> 최북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9> 최북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빈산에 사람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널리 알려진 화가는 아니다.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 화가 최북(崔北. 1712~1786) 얘기다. 중인 출신의 직업 화가였는데, 중인으로서는 드물게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다.

새 소리는 청아하고 대지는 맑다. 텅 빈 정자가 사람들을 기다린다. 호생관(毫生館) 최북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같은 풍경이다.

그는 정선, 심사정과 어깨를 나란히 한 화가로 ‘공산무인도’ ‘풍설야귀인’ 등 걸작 산수화를 남겼다.

뛰어난 재주와 더불어 기행, 주벽으로도 유명했다. 

한 관리가 그림 그려주기를 강하게 요구하며 위협하자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 애꾸가 됐다는 사건과 기타 몇몇 일화 탓에 흔히 기인, 광인 화가로 알려졌지만, 그림에 대한 신념이 매우 강한 천재 화가였다.

여러 가지 호를 사용했는데 '호생관'(毫生館)과 '칠칠'(七七)이 대표적이다. 

'호생관'은 '붓으로 먹고 산다'는 호를 쓸 만큼 강인한 정신력을 갖춘 말이며,  '칠칠'은 이름의 '북'(北)을 둘로 분리한 말이다.

본관은 무주(茂朱).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월성(月城)·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基齋)·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

 그는 49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고만 전해져 있다. 
1747년에서 1748년 사이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가 무주출신이라고해서 최북미술관이 무주에 있다.

그는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점철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에 관해 남공철(南公轍)의 '금릉집(金陵集)'과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의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즐거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울다 웃다 하면서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치고는 투신하였던 일이라든가, 어떤 귀인이 그에게 그림을 요청하였다가 얻지 못하여 협박하려 하자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고 하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해 버린 이야기 등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광생(狂生)이라고까지 지목했다.

후배였던 조희룡은 그 사연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어떤 높은 벼슬아치가 최북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구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위협하려고 했다. 그러자 최북이 노하여,“남이 나를 저버리는 게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하면서 곧바로 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늙은 뒤에는 돋보기 안경을 한쪽만 끼었다. 나이 마흔아홉에 죽으니, 사람들이 칠칠(七七)의 참(讒)이라고 하였다.

네덜란드의 화가 고흐가 그림을 제대로 그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기 귀를 칼로 잘라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화가가 가장 아껴야 할 눈을 스스로 찔렀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높은 벼슬아치가 하늘에 나는 새는 떨어뜨릴 수 있지만, 그려지지 않는 그림을 억지로 그리게 할 수는 없었다. 화가가 흥이 나야 그릴 게 아닌가. 그러나 그는 최북에게 흥이 나게 못하고, 위협을 했다.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최북은 자기 눈을 찔렀다. 밖으로 향할 수 없는 분노를 안으로 터뜨린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그에게 더 이상 그림을 그려내라고 강요할 벼슬아치는 없었을 것이다.

호산거사 조희룡은 위의 이야기를 기록한 뒤에, 다음과 같이 최북의 전기를 끝맺었다.

호산거사는 이렇게 평한다.

“북풍이 매섭기도 하구나. 왕문(王門)의 광대가 되지 않은 것으로도 만족하건만, 어찌 그다지도 스스로를 괴롭혔단 말인가?”

호산거사는 조희룡 자신의 호이다. 사마천이 ‘사기’ 열전을 지으면서 “태사공왈(太史公曰)” 하는 인물평으로 마무리한 것을 본받아, 조희룡도 중인들의 전기 끝에 인물평을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 경우에는 덕담을 많이 남겼지만, 최북의 경우는 “광대가 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라”고 권했다. 

중인 화가는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으로 임명되어 왕실의 수요에 따라 그림을 공급하며 생활을 보장받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최북은 화원 자리조차 거부하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왕실의 광대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눈까지 찔러 ‘스스로를 괴롭히자´ “북풍이 매섭기도 하다.”고 혀를 찼다. 조선후기 신분사회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신의 예술혼을 지키려면 스스로 괴롭히며 매섭게 항거할 수밖에 없었음을 조희룡 자신도 알았던 것이다

그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연도 미상)를 본다.

수묵담채로 그린 문인화풍 그림이다. 물기 머금은 언덕에는 청색으로 옅게 칠한 후 붓으로 미점을 찍어 변화를 주었다. 

두 그루의 나뭇가지에는 새싹이 움트고 맑은 청색은 생기가 감돈다. 사람들이 쉬었을 정자는 텅 비었다. 바로 옆 계곡에는 물소리에 살이 올랐다. 

제멋대로 자란 두 그루의 고목 그늘 아래 초가 정자가 살포시 자리를 잡았다. 인기척이 끊어진 공허한 산촌, 산새마저 낮잠에 들었는지 호젓하고 고요하다. 요란한 폭포소리가 정적을 깰 법도한데 웬일인지 더 깊어지는 듯하다.

'공산무인도'가 담고 있는 풍정(風情)이다. 붓 가는대로 갈겨 쓴 화재도 그렇다. 빈산에 사람이 없는데 물 흐르고 꽃이 핀단다(空山無人 水流花開).

글씨 못지않게 그림도 서툴러 보인다. 꾸밈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당대 최고 화가의 겸손 탓인지 어리숙하게 보일 정도다.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란 말이 이를 두고 한 것일 게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등성이와 모정, 수풀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전부다. 눈길을 잡는 것은 낙관의 위치다. 

물론 낙관이 작품의 일부라고 하지만 그림 중간에 찍은 것은 개성일 수도 있으나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굳이 그림 한 가운데를 고집한 것은 천재의 자만이 아닐까. 화가의 삶이 그렇듯 경계를 거침없이 허문 탓일 것이다.

화면 왼쪽에 '빈산엔 사람이 없으나 물은 흐르고 꽃이 피네(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화제(畵題)가 둥실 떠 있다. 중앙에는 최북의 호가 꽃처럼 붉다.

제목 그대로 사람이 없다. 텅 빈 산 속에 삘기로 엮은 소박한 정자만이 덩그러니 보인다. 주변의 자연도 특별할 게 없다.

그림 위쪽에 시가 적혀 있으며, 이 시로부터 그림의 제목이 만들어졌다.

'공산무인, 수류화개' (空山無人, 水流花開), '빈산에 사람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어려운 한자가 하나도 없는 여덟 글자는 당송팔대가의 한 명인 송나라 문인 소동파의 시로 알려져 있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의 겸손을 노래한 시다. 동양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라 할 만하다.

자연은 한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발길이나 손길과 관계없이 늘 그 자리에서 스스로 이치에 따라 '운행'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읊은 도가사상을 연상시킨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태도를 말한다. 존재의 역사를 둘러봐도 인간의 역사는 자연에 비해 짧기 그지없다.

최북은 공산무인도에서 중국 문인의 시를 인용했지만, 자연의 모습은 중국이 아닌 우리 산천을 그렸다. 

그도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며 진경산수화의 사고를 이어받았다.

유곽에서, 떠돌이 생활 중 남의 집에서, 여러 날 굶다 그림 한 점 판 돈으로 술을 사 마시고 집에 돌아오다 눈 구덩에 빠져서 죽었다는 등 굴곡진 인생만큼이나 저승길도 설이 여러 가지다.

 굶기를 밥 먹듯 했지만 정신만은 꼿꼿했다. 열흘을 굶고도 그림 그려 동전 한 닢 생기면 술집을 찾아 폭음하고 취해 기행을 일삼고 풍류를 즐기던 시대의 음유시인이자 풍운아였다. 호생관의 꽂꽂한 정신과 자존심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본받아야할 자세다.

그의 그림에 관한 일화도 전해져 온다. 어떤 사람이 최북에게 산수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최북은 산만 그리고 물을 그리지 않았다. 어떤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종이 밖은 모두 물이 아닌가?"라고 답하였다고 하며 또한, 어떤 사람이 그림값을 지불할때 그림값이 적다고 생각이 들면 마구 욕을 하고는 그림을 찢어 버렸으며, 그림값이 자기의 생각 보다 많으면 그사람을 문밖으로 밀어내며 돈을 도로 주며 "그림값도 모른다"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소동파의 시를 읽고 최북의 그림을 다시 본다.

거칠고 불분명한 먹의 흔적만 보이는가? 적막함을 초월하는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가?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몇 년도 아닌 단 몇 초전으로 '백 투 더 퓨처'할 수 있다면 나는 꽃나무에 물을 주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