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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4> 최치원 유적지가 전국에서 제일 많은 전북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4>  최치원 유적지가 전국에서 제일 많은 전북

‘가여워라, 향기 머금고 푸른 바다 굽어보는데, 누가 붉은 난간 아래 옮겨 심을까? 무릇 초목과는 다른 품격이거늘 나무꾼이 똑같이 볼까 두렵구나’
바위틈 사이로 핀 진달래를 보고 읊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시에는 신라 시대 6두품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 가서 빈공과에 합격했음에도 끝내 골품의 벽을 넘지 못했던 한이 서려 있다. 
그는 886년 태산군(현 정읍 칠보· 태인 일대) 태수로 부임, 자신이 체득한 우수한 문화를 전북에 뿌리내리면서 태산선비문화를 열었다.
1,100여전 서해에서 배를 타고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중국에서 관직생활을 했던 ‘한.중문화의 매개체’로서의 최치원을 기억해야 한다.
전북엔 최치원이 첫 외직(外職)으로 태산군수로 부임받아 지역민의 지극한 숭모의 대상이 된 정읍의 무성서원, 피향정, 최치원의 출생설화와 지역유림의 배향(配享) 활동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군산의 자천대, 현충원, 문창서원, 옥산원 등 이었다.
군산 출생설화가 전해오는 최치원선생의 중국에서의 평가와 연구동향을 확인해보고 통일신라 말 6두품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뛰어 넘어 당나라 최고의 문장가라는 명성을 떨친 문창후 최치원선생의 발자취를 추적해볼 수 있다.
군산지역에는 최치원선생이 군산에서 태어났다는 내초도 금도치굴 설화와 선생이 글을 읽었다는 신시도 월영대, 최치원의 시호인 문창후와 관련된 문창초등학교, 최치원을 모신 문창서원, 오현당, 도지정문화유산 자천대 등 최치원과 관련된 많은 문화유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군산 9곳, 정읍 4곳, 진안 2곳, 임실 1곳 등 16개소에 달한다.
정읍에도 유적들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정읍 무성서원은 태산사, 강당, 현가루, 비각 등 서원 내 은행나무 낙엽과 함께 그 기품을 더해갔고, ‘호남제일의 정자’ 피향정은 최치원이 태산군수 시절에 세웠다고 전하는 정자로 주변 비석군 등이  있다.
정읍 무성서원은 신라후기의 학자 최치원과 조선 중종때 관리 신잠 등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교육 기능과 제사 기능을 모두 갖고 있다.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자리래 무성서원이라고 하며, 최치원과 신잠 등을 모시고 제사지내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1696년에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무성서원이라 하게 됐다.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현가루, 동·서재, 명륜당 등이 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왜 무성서원이라고 하나
문루인 현가루(絃歌樓, 3칸 2층 건물)는 ‘논어’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공자가 무성에 가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 소리를 들었다(子之武城 聞絃假之聲)’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현가루이고, 그래서 무성서원이 된 것이다.
현가루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자문의 ‘현가주연 접배거상(絃歌酒讌 接杯擧觴: 현악기로 노래하고 술로 잔치하고 잔을 잡고 권함)’이란 문장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거문고를 타서 노래하고 술로 잔치하고, 잔을 공손히 쥐고 두 손으로 들어 권한다’ 비파를 타며 노래 부르고 술을 마시는 잔치에서 술잔을 얌전하게 쥐고 두 손으로 들어 올려 권한다.
귀족들은 잔치할 때 당비파를 잡히고 이에 어울려 노래하면서 계속하여 술잔을 주고받았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노나라 무성(武城)의 현감이 되었던 바, 예악(禮樂)으로서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공자가 이 고을을 찾아가니 마침 현가지성(絃歌之聲)이 들려와 탄복했다는 일화와 연관되는 명칭이다. 
다른 서원의 문루가 신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의미를 함축하는 내용인 것과 달리, 현가루는 원시 유학의 현실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구한말 면암 최익현 주도하에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이곳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켜 격문을 열읍에 보내 호응을 촉구하는 무성서원 창의와 일제시대, 6.25를 거치면서 100년 이상의 세월을 지쳐온 까닭에 참으로 대견하다.
군산 신시도 월영대에서 바라다 본 고군산군도와 서해바다는 중국과의 지리적 연관성과 훌륭한 조망권이 더해져 관광 유적지다. 이에 따라 향후 신시도, 선유도 일대의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탐방의 수요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것으로 내다 보인다.
옥구향교 내에 자리한 자천대, 현충원, 문창서원, 옥산원 등은 최치원 유적도 옥구현 옛터와 함께 추모와 선양 공간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2019년 최치원 영정 정읍 귀환
1967년 무성서원(사적 제166호)에서 떠났던 최치원 초상화 1점이 47년 만에 돌아온다. 이는 무성서원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욱 의미 있는 일로 받아 들여 지고 있다.
정읍시는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장기대여 형식으로 대여를 요청하면서 2014년 12월 17일 1831년 제작된 초상화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정읍으로 오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무성서원(원장 이치백)은 “ 최치원 영정 환안(還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무성서원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라며 “47년 만의 환안을 기념하기 위해 무성서원에서 ‘환안고유제’를 거행했다”고 했다.
당초 무성서원에 보관돼 있던 최치원 초상화는 모두 3점으로 1784년 하동 쌍계사에서 이관한 1점(고려시대 제작 추정), 무성서원에서 1831년 경에 제작한 1점, 그리고 1924년 석지 채용신이 모사한 1점(현재 정읍시립박물관에 기탁 보관) 등이다.
세 점 중 두 초상화는(고려시대, 1831년) 문화재 지정과 보존처리를 위해 1967년 문화재 위원 김상기(당시 무성서원 원장)와 최순우에 의해 옮겨졌으나 지정되지 않았으며 이후 1831년 초상화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다른 한 점은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다.
이와 관련 무성서원은 지난 1992년부터 1967년 무성서원을 떠난 초상화를 반환해 줄 것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요청해 왔다
2010년 도내 한 방송을 통해 이러한 문제점이 대대적으로 다루어졌으며 2011년에는 영정반환 촉구 시민 서명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전북에 최치원의 글씨 3점 존재 확인
 최치원의 글씨가 전북에 3점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진안 쌍벽루의 삼계석문, 진안 마령의 쌍계정 쌍계석문, 임실 오수의 삼계석문 등으로 모두 돌로 쓰여진 게 특징이다.
 이는 전북도가 발간한 ‘전라북도의 유적지’에서 확인됐다. 
진안 마령의 쌍벽루(雙碧樓) 누정을 올라가는 입구에 최치원이 썼다고 전하는 ‘삼계석문'(三溪石門)'이란’ 암각서가 있다.  이 암각서는 최치원이 태인에서 태산태수를 했던 그의 유풍이 전북인들에게 남아 있음을 증표하는 것 중의 하나로, 비록 당시에 새기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흠모하고자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의 설명.
특히  삼계석문 암각서 우측에 써진 간지를 보면 만력 18년(1590) 경인년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는 바, 임진왜란 전의 작품으로 중요한 금석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암각서는 비록 쌍계사와 임실 오수의 삼계석문과는 글자의 필획이 틀리지만 특히 문문자에서는 최치원의 자형적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또, 진안 마령의 ‘쌍계정(雙溪亭, 雙磎亭)’의 누정 뒷벽에는 최치원의 쌍계석문(‘雙磎石門)’ 4자를 모방해 새긴 글씨가 있다.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최치원 글씨 쌍계석문(雙磎石門)  4글자를 따다가 새긴 바, 비록 원본은 아닐지라도 그의  필획을 감상할 수  있다.
 임실군 오수면 준덕리 산 46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삼계석문(三溪石門)'은 최치원의 글씨로 평가받고 있다. 470cm x 220cm x 750cm의 규모로 해서로  써 있으며, 한 글자의 크기가 70-80cm다.  필획이 그가 쓴 쌍계사의 진감선사비와 흡사하며, 하동 쌍계사 입구에 최치원이 쓴 '쌍계석문'을 모방했다고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