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7> 풍산김씨 세전서화첩(豊山金氏 世傳書畵帖)... 전라감사 김양진'풍산김씨 세전서화첩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7> 풍산김씨 세전서화첩(豊山金氏 世傳書畵帖)... 전라감사 김양진
'풍산김씨 세전서화첩(豊山金氏 世傳書畵帖)'은 조상을 중심으로 한 고사와 행적을 30 여 종의 그림과 그림을 설명한 글로 이루어진  자료이다.
이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에서 오백여 년 간 세거해온 풍산김씨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서화첩이다. 이 서화첩은 10세손인 진산 김휘손(1438-1509)으로부터 10대에 걸친 19명의 인물들에 대해  문장, 도덕, 충철, 효의 등 귀감이 되는 행적을 수록하고 이에 따르는 일화를 그림의 뒷장에 소개했다. 이 서화첩은 1860년 초에 완성됐다.
풍산김씨 허백당 문중은 고려 고종 때 판상사로 풍산백에 봉해진 김문적이 시조다.  풍산김씨가 안동시 오미동에서 터를 잡은 것은 8세(世) 김자순 대에 와서이다. 
이후 김자순의 차남 김종석과 김휘손을 거쳐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 1467-1535)에 이르러 선조의 묘소와 별장이 있는 오미동에 드나들었다.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마을 이름을 오릉동에서 오묘동으로 바꾸고 은거했다. 
김의정의 손자  김대현(1553-1602)은  성혼의 제자로 1582년  생원시에 합격해 산음현감으로 관직에 나아가게 됐다. 지금의 오미동 종택을 이건·중수해 터전을 다졌고. 그의 아들 8형제 모두 소과에 급제
하고 5명이 대과에 급제했다.
인조는 이를 듣고 풍산김씨 집안을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 여덟 송이의 연꽃과 다섯 그루의 계수나무)'라고 칭찬했다. 연꽃은 문과 소과를, 계수나무는 대과의 합격자를 일컫는 말이다.
1629년에 나라에서 김양진에게 사제(賜祭)해 일약 명문세족으로서의 기반을 이루게 됐고, 이를 불천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오릉(五陵)’이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오미(五美)’로 고쳐졌으며, 이들 8형제를 가리켜 ‘팔련오계(八蓮五桂)’라 불리워지게 됐다. 인조는 마을 이름도 오미리로 바꿔 부르게 했다.
이 중 '완영민읍수도(完營民泣隨圖)'는 허백당이 전라감사로서 선정을 베푼 이야기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고을사람들이 전송하러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따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김양진은 청백리로 이름 높다.
이는 1520년  전라감사 시절에 선정을 베푼 내용과 이를 마치고 돌아올 때 청백리로서의 행적이 동한(東漢) 말기 사람인 시묘(時苗)에 얽힌 고사 ‘수춘의 송아지’에 비견해 ‘허백당의 망아지’로 치환해그렸다. 
이 그림 뒤 기록에 따르면 ‘허백당이 전라감사로 근무하던 시절은 연산군 시절의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에 행정과 세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온 나라의 민심이 흉흉했다. 
김양진은 부임한 즉시 폐단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일일이 듣고 해결해주는가 하면, 허위로 작성된 세금문서를 발견하면 자신의 급료를 반납하여 채워 넣었다.  매달 초하루가 되면 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쌀과 고기 등을 나누어주고, 젊은이들을 모아서 소학과 심경 등을 강론했다. 
그런 다음 그들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거나 효심이 지극한 이가 있으면 조정에 추천하기도 했다. 비록 신분이 미천한 사람일지라도 효심과 우애를 갖춘 경우에는 술과 고기 등을 상으로 내리거나 신역(身役)을 면제해주고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마치 부모와 같이 섬기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림 화면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가  김양진이 전라감사를 마치고 완영(전주감영)을 나서는 장면으로 허백당이 남여(藍輿, 의자와 비슷하고 뚜껑이 없는 작은 가마로 승지나 참의 이상의 벼슬아치가 탔다)에 높이 앉아 있고 앞뒤로는 수행하는 인물들이 따르고 그림의 하단에는 노소의 사대부 복장을 한 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훔치며 아쉬워하는 장면이다. 
멀리 화면의 상단에는 고졸하게 산수를 표현했다. 
이 장면을 기록으로 보면 ‘김양진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고을 사람들이 전송하러 나왔는데, 수레와 말이 수십리에 이르렀고 눈물을 흘리면서 따르는 이들이 무려 만 명에 달했다. 이에 김양진이 겨우 설득해 되돌려 보냈지만, 30여 명의 사람들은 막무가내 따라와서 하인으로 삼아줄 것을 간청하였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두 번째 장면은 완영(전라감영) 앞의 버드나무에 메인 망아지의 그림이다.
‘김양진이 전라감영에서 돌아오던 날 망아지 한 마리가 뒤따르는 것을 보고 하인에게 “내가 처음 이곳에 올 때는 망아지가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보이는구나. 이곳에서 태어난 것인가?”하고 물으니 “예, 그렇습니다”하고 답했다. 그러자 “그렇다면, 이는 전라감영의 재산인데, 내가 어찌 갖고 갈 수 있겠느냐! 빨리 끌고 가서 나무에 매어 놓고 오너라”하고 지시하니, 하인이 망아지를 끌고 가서 동문 바깥의 버드나무에 매어놓았다. 당시 사람들은 망아지를 중국 수춘(壽春)의 송아지(삼국시대 위나라 시묘가 수춘령(壽春令)이 되었을 때 타고 갔던 암소가 낳은 송아지를 수춘에서 낳았다고 해서 그곳에 두고 왔다는 고사)에 비유했고, 전주의 백성들은 망아지가 묶여있던 곳에 김양진의 생사당(生祠堂)을 세운 것으로 전한다’
이는 김양진이 전라감사로서 베푼 선정을 잊지 못해 전송 당시의 모습을 지역민이 그림으로 그려서 본가로 보내주었다.
만암 이상진(1614-1690)의 생가터는 한옥마을 내 고하문예관 바로 앞, 완산구 교동 244-1(향교길 25)에 자리하고 있다. 정승목인 이 회화나무 한 그루는 4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청렴과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불사조처럼 가지를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이들이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전주는 그 은혜가 아직도 남아 있어 내 몸 혈관에 흐르고 있지는 않을까. 청백리들의 선정(善政)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39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