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3> 태극이 보이는 문화유산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3> 태극이 보이는 문화유산


최근들어 일제강점기 초기에 제작된 사찰의 불화에서 항일·독립 의지를 담아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태극기가 발견됐다. 

남원 선원사 주지 운문 스님은 “최근 선원사 명부전에서 기도하던 중 지장시왕도 괘불 탱화에서 태극기 그림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태극기는 지옥을 관장하는 10명의 왕 가운데 제6대 왕인 변성대왕 관모에 그려져 있다. 태극의 양은 홍색, 음은 뇌록색으로 채색돼 있으며, 양 태극을 백색이 둘러싼 모양새다. 위쪽에 건괘와 이괘, 아래쪽에 곤괘와 감괘를 배치되어 있다.

남원 선원사 명부전 후불탱화(지장시왕도)

남원 선원사 명부전 후불탱화(지장시왕도)에서 태극기 문양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후불탱화는 법당의 불상을 모셔 놓은 뒤쪽에 걸어 놓은 불화로, 탱화 속에 태극기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태극기 문양은 명부전 후불탱화 시왕 관모에 그려져 있다.

왜 이 시왕의 관모에만 태극기가 그려져 있을까? 선원사 주지 운문스님은 “후불탱화가 제작된 것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도로 불교계에도 일제의 압제가 한창 극심했을 때”라며 “당시 탱화 제작을 주관한 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 등과 함께 일본불교에 맞서 임제종 설립을 주도했던 진응스님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대한독립의 의지를 탱화에 새겨 넣어 지장보살님 전에 봉안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나주 복암리 고분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문양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태극 무늬가 그려진 목제품이 2009년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에서 발굴됐다. 이와 함께 국내 최초로 봉함목간(封緘木簡)도 출토됐다. 봉함목간은 관청에서 기밀을 필요로 하는 문서나 물건을 운송할 때 사용한 목간으로 중국, 일본 등에서 봉검(封檢)이라고 불리며 발굴된 바가 있으나 국내에서는 발견된 바가 없었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은 영산강 고대문화권역의 중심지인 곳으로, 주변지역에서 31점의 백제시대 목간이 함께 출토되었다. 백제의 중앙(現 충남, 扶餘)이 아닌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이 목간들은 종류가 다양하고 기록된 내용과 수량이 풍부하여 백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태극문이 그려진 것은 칼(刀) 모양의 독특한 형태를 띤 목제품 한 쌍이었다. 함께 출토된 백제 기와, 토기 등 유물의 연대를 감안했을 이 목제품은 618년경 무왕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태극문양으로 알려져 있던 경주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682년)보다 앞서고, 송나라 주돈이(1017~1073)의 태극도보다도 400여 년 더 앞선 것이다. 그래서 태극 문양은 중국의 태극에 근본을 두었다기보다 한국 고유의 문양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유물은 ‘역(易)’, ‘오행(五行)’ 등 백제의 도교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백제의 사상사 연구에 일조할 것으로 여겨진다.

공민왕릉 등도 태극 문양

고려시대 개성의 공민왕릉에도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하며,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능에도 이것이 있으며, 경주계림로보검(미추왕릉, 경북 경주시 인왕동, 보물 제635호 ) 칼집에 해당되는 부분 위쪽에 납작한 판에는 태극 무늬 같은 둥근 무늬를 넣었다.

대전 동춘당 굴뚝

대전 나들목이 가까워 오니 ‘선비마을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저 선비마을이란 이름이 분명 송촌, 즉 송씨마을을 이름하며, 조선 중기 한 시대를 풍미한 우암 송시열(1607년-1689년)선생과 동춘당 송준길(1606년-1672년)선생 즉, 양송이라 불리우던 두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이들은 서예에도 영향을 미쳐 제일 먼저 양송체와 미수체를 출현시켰다.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은 ‘양송’은 웅대하고 힘차며 장엄하고 정중한 무게를 더하고 있다. 석봉체를 근간으로 도학자 글씨의 전형을 ‘심획(心劃)’으로 실천하며 진경시대 문예부흥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동춘당이 위치한 마을은 윗송촌(상송촌, 원송촌). 송씨들이 많이 살아 송촌이라 하였는데, 이는 상송촌과 아래송촌 가운데 상송촌이 송촌의 중심이 된다 하여 원송촌이라 부르고, 아래송촌은 현재의 중리동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인조 이래 숙종 때까지 충청도 지역 지식인들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일세를 풍미하게 만든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송준길은 송시열과 동종동문이라고 하여 ‘양송’으로 불리며 우암의 그늘에 가려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 당시의 사회적 혼란, 예의 문란, 풍속의 타락, 기강 해이, 사학의 성행 등과 같은 모든 폐단이 주자학이 올바르게 서지 못한 데에서 출발한다고 해석함은 물론 주자학에 기초한 전통적인 정주이학을 올바르게 세우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비로소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 송준길의 말은 오늘날에도 통용된다. 하물며 이곳의 지명이 ‘회덕(懷德)’임에랴. 늘 덕을 품고 살고픈 옛 사람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보물 제209호로 지정된 대전 회덕 동춘당(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은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이다. 늘 봄과 같다(與物同春)’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대청의 앞면, 옆면, 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들어열개문을 달아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차별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

또,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받침은 4각형의 키가 높은 돌을 사용했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격담의 사랑채 뒤안에 있는 태극 문양과 괘를 넣은 (꽃담)굴뚝이 꽤나 인상적이다. 

넓적돌과 백회로 굴뚝을 쌓아 올라가다 살짝 문양을 만들었으리라. 이 굴뚝은 서로 편가르기가 아닌, 상생과 조화를 추구하려는 선비정신 같아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값진 교훈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의 중문을 들어서면 옹색하지 않은 크기의 안마당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내외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담이 처져 있다. 이 격담의 사랑채 뒤안에 있는 태극 문양과 괘를 넣은 굴뚝이 꽤나 인상적이다. 넓적돌과 백회로 굴뚝을 쌓아 올라가다 살짝 문양을 만들었음이 목도된다.

태극은 천지가 개벽하기 이전의 상태로서 우주 만물 구성의 가장 근원이 되는 본체를 일컫는다. 음, 양의 조화를 나타내며, 붉은색은 양, 불, 하늘을 뜻하고 푸른색은 음, 물, 땅을 뜻한다. 때문에 태극의 본질은 서로 파멸이 아닌, 공존공생함에 있다.

이곳의 꽃담은 절제와 균제를 삶의 자세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라고 가르쳐준다. 송준길이 “하늘을 섬기고 신을 섬기는 도리는 제물의 크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볼 뿐이다”고 말한 데에 힌트가 숨어 있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글귀가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다. 

바야흐로, 계족산에 저녁 노을이 물들고 있다. 태양은 항상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 존재를 가끔 잊고 살지만 한순간 한순간 기억을 더듬어보면 ‘태극’이 공존하므로 괴로운 기억보다 즐거운 추억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
남원 선원사 지장시왕도 괘불 탱화
남원 선원사 지장시왕도 괘불 탱화
나주 복암리고분
경주계림로보검
대전 동춘당 굴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