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32> 전북의 산공부(독공)
'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恨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법이여....'
1993년에 선보인 영화 '서편제'의 한대목이다.
1960년대 초 전라도 보성 소릿재. 동호(김규철 분)는 소릿재 주막 주인의 판소리 한 대목을 들으며 회상에 잠긴다. 소리품을 팔기 위해 어느 마을 대가집 잔치집에 불려온 소리꾼 유봉(김명곤 분)은 그 곳에서 동호의 어미 금산댁(신새길 분)을 만나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양딸 송화(오정혜 분)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동호와 송화는 오누이처럼 친해지지만 아기를 낳던 금산댁은 아기와 함께 죽고 만다. 유봉은 수리품을 파는 틈틈히 송화에게는 소리를,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쳐 둘은 소리꾼과 고수로 한 쌍을 이루며 자란다.
바야흐로 산공부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래저래 답답하기만 한 올 여름. 국악인에게 여름은 평소 부족했던 기량과 공력(功力)을 채우는 이른 바, ‘산공부(독공)’의 적기다. 이들에게 산공부는 ‘평생 먹을 농사를 짓는다’고 할 만큼 중요한 과정이다.
‘산공부’는 판소리 가객들이 득음을 위해 토굴, 또는 폭포 앞에서 하는 발성 수련법이다. 과거에는 학습 10년, ‘독공(獨功)’ 10년, 유람 10년 등 30년을 투자해야 비로소 한 명의 명창으로 성장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공부는 1년 농사를 좌우할 소중한 시간이다.
흔히 말하기를 소리꾼들에게 7~8월의 산공부가 ‘1년 농사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한다. 사실 전문 소리꾼들은 물론 예비 소리꾼들도 속세의 생활 중에는 소리에 전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음껏 소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때문에 판소리계에 일정 기간의 여름 산공부가 필수적인 과정으로 자리잡았다.
산공부를 문화관광자원으로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전국의 소리꾼들이 가장 많이 찾는 지리산 뱀사골과 동편제 발원지로 명창들이 득음한 구룡계곡 소리길, 구룡폭포, 무주 칠연계곡, 순창 비룡폭포, 장군폭포, 강천산 계곡, 예향천리 마실길, 그리고 아름다운 순례길과 연결해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해야 함에도 불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2011년 완주 위봉폭포 일원의 완주군 1호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됐다.
위봉폭포는 위봉산성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2단으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과 폭포 아래의 큰 바위 사이로 물길이 흘러가며 포트홀(Pot hole)의 하천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이 수련했던 곳으로 전해져 역사성 및 장소성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이 위봉폭포의 문화경관적 측면의 뛰어남과 위봉폭포를 향유한 선인들의 삶과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곳임을 인정하고, ‘역사문화적 ·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폭포’인 명승으로 지정했다
위봉폭포의 명승 지정은 완주군 천혜의 자연과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앞으로 보존관리 및 활용방안 강구에 힘쓰고 있다.
남원 구룡폭포는 동편제소리꾼들에게는 성지와 다름없는 곳이라고 한다. 폭포에서 수년간 외로이 독공(獨功)의 노력 끝에 득음을 하여 통달명랑(通達明朗)한 소리를 얻어내는 곳이다. 송만갑, 박초월, 강도근 등 당대의 최고 명창들이 들렀던 곳이다.
익산 심곡사는 19세기말 20세기초 활약한 정정렬(1876~1838) 명창이 ‘떡목’을 극복하기 위해 수년간 독공(獨功)한 사찰이다. 판소리를 할 때 고음부의 음역이 고르지 않아 소리가 거칠게 나오는 떡목의 한계를 심곡사에서 정명창이 극복했다. 정명창은 심곡사는 물론 공주 갑사와 부여 무량사 등에서 소리공부에 매진해 판소리의 최고봉에 올랐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고통받는 조선인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달했다.
전북 도내엔 익산 심곡사, 완주 위봉폭포, 고창 직소폭포, 고창 방장산 계곡, 순창 회문산 계곡 등 '득음(得音)' 명승지가 수두룩하다. 산공부를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소리꾼을 유치, 전북이 판소리의 고장임을 알려야 함에도 노력은 부족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소리꾼들을 지원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고창 신재효판소리공원 판소리 산공부
판소리의 고장 고창군이 여름방학 기간 동안 판소리 산공부 운영을 한다. 올해 두번째로 운영되는 ‘판소리 산공부’는 신재효판소리공원 활용 및 운영을 활성화하고 판소리 전공자들의 고창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지난달 20일 접수가 마감됐다.
신청 자격은 판소리 명창, 지도자 또는 국악대학 판소리 전공자이며 1회 10일 이내 8~15명 정도 참가할 수 있다. 산공부 종료 시 교육 발표 공연을 해야 하며, 참가자에게는 산공부 장소와 숙소가 제공됐다.
산공부 장소인 신재효판소리공원 내 득음실은 전문 소리꾼을 양성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서 명창과 제자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달 27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2팀 30명이 참여한다. 하지만 일정이 서로 다르다.
△제6회 박상주의 김청만류 고법 산공부
‘제6회 박상주의 김청만류 고법 산공부’가 다음달 1일부터 3일까지 2박3일간 정읍 대흥무지개센터에서 열린다.
‘산공부’는 여름과 겨울 또는 공연을 앞 둔 국악인들이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캠프라는 용어 많이 사용한다.
박상주고수는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 김청만 명고에게 2019년에 이수를 했다. 김청만 명고의 수많은 제자 중 처음으로 ‘김청만류 고법’ 완북 발표회를 가졌다. 판소리나 가야금, 대금, 거문고, 피리, 해금 등 기악에서는 류파를 나누어 발표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판소리 고수가 ‘누구 류’를 붙여 발표하기는 처음이었다.
2021년에 ‘강산제 조상현바디 심청가’ 4시간 20분, ‘동초제 심청가’5시간 30분, 2023년에는 동초제 흥보가 4시간 30분을 ‘박상주의 김청만류 고법 완북 발표회’라는 명칭으로 공연을 진행했다. 현재 정읍시립 정읍사국악원 고법반 교수로 재직 중이고, (사)한국국악협회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지부장, (사)한국예총 정읍지회 부지회장, (사)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감사, (사)동초제판소리보존회 이사로 활발하게 활동중이다.
박고수는 “이번 산 공부를 통해서 김청만류 판소리 고법 장단 학습과 실제 연주에서 어떻게 장단을 활용해야하는지에 대해 집중적인 공부가 진행될 예정이다”고 했다. 이어 “매년 이맘때면 소리꾼들은 맑은 공기와 자연 속에서 그 동안 못했던 소리 공부에 열중하며 충전의 시간을 갖는 만큼 정서적으로도 효과가 크다”며 관심을 부탁했다.
이달말까지 20명을 모집중이며, 문의는 010-5611-9990./이종근
http://www.sjbnews.com/news/news.php?code=li_news&number=822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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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녀 명창의 독공
▶ 모든 걸 내 걸어 얻은 지독했던 산공부와 독공의 시간
악착같고도 집념어린 소리 인생, 그 갈증이 조금씩 풀린 곳이 바로 산이었다. 그에게서 산공부는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이력이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건사고와 고초를 겪으며 소리꾼으로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내공이 길러졌기 때문이다.
“산공부라는 것이 내 노력과 책임이 더 크지, 선생님만 의지하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우선 내 재능이 아무리 좋아도 100일간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한다고 하면 여러 경제적인 걸 다 부담해야 돼요. 저는 사업이 안 좋게 되고 부유하지도 않은 시절에 공부를 하다 보니, 집 전세금 빼서 줄이고 줄여가면서 공부 비용을 댔거든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스승에게서 ‘소리를 받는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아무래도 판소리는 ‘도제식(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물려져 온 소리)’으로 계승되어온 터라, 사람과의 관계, 특히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스승의 표정이나 몸짓 하나에도 기민하게 대응하고 읽어내면서, 그 속에서 본인의 것을 취하는 영민함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애증’도 깊었을 터이다.
명창 조소녀는 그가 가진 전 재산을 툴툴 털어 교육비로 썼다. 그래서 스승들을 모시고 산공부를 다니며 판소리 한 바탕씩을 떼고, 그러면서 비로소 진짜 소리꾼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75년인가, 오정숙 선생님을 모시고 이일주 선생님, 민소완, 방성춘씨 등등 나까지 아홉 명 정도가 법우사로 백일공부를 하러 들어갔어요. 소리를 하면 온 몸에 힘이 다 들어가서 그랬는지 배우던 중에 복막염으로 밤에 실려 나와서 수술을 했어요. 그렇게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느라 당시에 춘향가를 다 못 배우고 내려오게 됐어요. 아이고, 시간이 지났으니 말이지, 어떻게 작심하고 들어간 산이었는데…, 그래도 오정숙 선생님이 저를 많이 이뻐해 주셨어요. 저는 밖에서 남들 소리하는 것도 도둑공부 해가면서 욕심도 부리고,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운다고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선생님이 참 영특하다고 해요.”
익살스럽고 천연덕스러운 몸짓을 해가며 관객들을 울리고 웃겼던 오정숙 명창의 발림이나 연기력은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사람들 입에서 회자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무대에 선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우리의 소녀, 조소녀 명창 또한 그를 능가할 만한 시대의 소리꾼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 청출어람이라 할 만한 풍부한 발림과 연기력, 특히 심청가의 비장미를 노래할 때는 조소녀만의 전매특허가 발휘되곤 한다. 안 그래도 슬픈 노래를, 더 슬프게 만들어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그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정숙 명창이 유난히 그를 아꼈던 것은 발림과 연기력이라는 공통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정숙 명창에 이어 그를 숙성시킨 인생 최고의 스승은 이일주 명창이었다. 이 명창과도 산공부에 대한 추억이 많다.
“내가 소리를 제대로 시작한 건 스물아홉 살 때에요. 다른 사람들은 일찍부터 소리를 시작했는데, 저는 좀 늦었잖아요. 그러다보니 욕심은 생기고 내가 저 사람은 따라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산공부 가서 그렇게 열심히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오정숙 선생님이 서울로 가시고 잠시 이일주 선생님을 모시고 산공부를 들어가기도 했어요. 저는 선생님 한 분만 모시고 단독으로 산공부 가는 걸 즐겨했는데, 그건 그 길밖에 도달할 방법이 없어서였기도 했어요. 왜냐면, 여럿이 함께 하면 내 몫이 적어지잖아요. 하루는 우리 이일주 선생님한테 ‘선생님, 나 외상으로 공부 한번만 시켜주지! 평생 살면서 갚아드릴께!’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래, 에구구 나랑 단둘이 한번 가보자’ 이러시더라고요. 그게 1980년인가 그래요.”
그곳이 운암 가는 길목의 남석사였다. 이른바 ‘독공’은 그가 남보다 늦게 시작한 소리공부를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공부는 자신 있었다. 누구보다 재능이 있고, 영리하게 따라잡아 체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외상공부 해달라고 하니까, 흔쾌히 마음을 먹어준 우리 선생님도 참 대단하세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에요. 때마침 그 때, 군산에 사시는 어떤 분이 나한테 500만원을 후원해주신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수업료를 드릴 수가 있었어요. 여기서 심청가를 배웠는데,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소리는 자네가 제일이야!’”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했고,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게으르면서도 근심만 한 짐 얹어놓고 사는 사람들에게, 멧돼지와 같은 저돌적인 돌진이 때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의 삶이 웅변해 주는 것 같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좋은 스승, 좋은 인연을 만난 것 또한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우리 이일주 선생님은 저한테는 돈 욕심 안 내시고 정말 잘해주셨어요. 선생님 제자들이 수없이 많지만 나만치 사랑받은 사람은 없어요. 공부를 하고 난 소리하고 그 전의 소리하고는 천지차이에요. 제가 산공부에 열심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에요.”
▶ 7번의 성대 수술, 목숨을 걸었던 ‘소리 인생’
남보다 늦게 시작한 소리공부였기에, 더 기를 써가며 산공부, 독공에 매진하면서 실력을 쌓아갔다. 그러나 소리꾼으로서의 공력이 깊어질수록 야속하게도 조소녀의 몸은 쇠잔해갔다.<전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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