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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34> 1926년 익산 함라산 서벽정을 만나다; 이집천의 '서벽정원운(棲碧亭原韻)' 병풍이백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34>  1926년 익산 함라산 서벽정을 만나다; 이집천의 '서벽정원운(棲碧亭原韻)' 병풍

이백

산중문답(山中問答)

왜 산에 사냐고 그대에게 물었더니
대답 없이 웃을 뿐 마음 절로 한가로워
복사꽃 물에 떠서 아득히 흘러가니
여기는 별천지 인간 세상 아닐세

問爾何事棲碧山(문이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을 들라면 보통 이백(李白)을 꼽는다. 

이백의 대표작을 뽑으라면 이 시를 들 수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중국 한시의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구에서는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오’라는 시의 끝부분 ‘왜 사냐건 웃지요’가 떠오른다. 

신선(神仙)이 사는 세상이든 속세든 따져서 뭐하나. 그저 빙그레 웃으며 속마음이 편하고 한가로우면 그곳이 선계(仙界)이거늘. 

시 속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다른 사람이 이 시의 주인공에게 묻거나, 또는 스스로 묻거나 이는 중요치 않다. 

마음 편한(心自閑) 신선세상(非人間)이 중요하다.

그래서 '시 한 편이 보약보다 백배 낫다'

익산에도 멋있는 산, 아니 정자가 있었으니 '서벽정(棲碧亭)'이다.

서벽정은 1920년대 만석거부 이배원의 아들 하당 이집천(1900~1959)이 함라산 자락에 만든 선정 별장이다. 

건물 배치가 자연적 경관과 잘 어울려져 건물 3채와 정자인 육모정이 잘 어울려져 당시 전국에서 손꼽는 별장으로 평가 받았다. 현재는 ‘서벽정’이라 씌여진 비석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집천(李集阡, 1900~1959)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하당(荷堂)이다. 할아버지는 이석순이고, 아버지는 이배원(李培源)이다. 아들은 이화영이다.

이집천은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해  1919년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부를 졸업했다. 1926년 함라산 기슭에 서벽정(棲碧亭)을 건립, 전국의 서화가를 초대해 시회를 개최했다.

 서화가 300여 명의 작품을 엮은 '서벽정시고(棲碧亭詩稿)'를 1929년 10월 7일 발간했다. 

그는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1935년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6년 도립 이리농과대학(현 전북대학교의 전신)의 초대 기성회장으로 활동했다. 

1947년 함열중학원(현 함열고등학교)을 설립하고 이후 국가에 무상 기증하였다. 1949년 전주방직을 인수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여 경영하다가 1959년 사망했다.

그는 서울 개운사, 익산 숭림사, 익산 건덕정 등의 현판을 제자(題字)했다.

전주 미술관 솔이 다음달 14일까지 갖는 특별전 ‘근대서화가 합작전-화중동유(畵中同遊)’에 이집천의 '서벽정원운(棲碧亭原韻)' 8폭 병풍이 전시된다.

 이는 1926년의 작품이다. '병인 국월 하당 이집천(丙寅 菊月 荷堂 李集阡)'으로 쓰여 있다.

'굽이굽이 산골에 터를 먼저 닦아, 작은 정자 앞에 광경이 펼쳐졌네. 허공에 폭포는 빗물 흩뿌리고, 숲넘어 먼 마을 안개에 젖었네. 고요에 잠든 숲은 세속과 단절되고 한적함 속 바둑과 술은 절반 쯤 신선되었네. 객들이여 흥망성쇠를 논하지 말라. 여기오면 나이도 생각나지 않나니'

'서벽당 원운에 답하다'는 백련 지운영, 무정 정만조, 금산 이하영, 불수 윤영구 등의 이름이 보인다.

'옛 사람이 먼저 청산을 차지했으나 뒤에 세운 서벽정,  그보다 훌륭하네. 신령한 경계는 별도의 세계이고, 백리 먼 평야는 안개와 어울렸네. 국화 피는 계절에 술잔 기울이기 알맞을 터. 허공 나는 신선되기를 바라지 않네. 무한의 풍월 잔치 준비해 연 중양절 모임 영원하길 비네.(75세 노옹 백련 지운영)'

'덕을 쌓은 이 복지(福地) 먼저 선점해, 정자 푸른 산 앞에 작은 정자 세웠네. 건강한 몸 파고드는 눈발(흰머리) 물리치고 명예와 이익 눈앞을 지나는 안개로 치부했네. 중년네 왕마힐(王摩詰, 당나라 시인 왕유)처럼 도(道, 도가)를 좋아하고, 노년엔 담백함으로 신선이 되겠네. 이 마음 또한 아름다운 함라(咸羅)에 있어 지난 40년이 꿈 속에 맴도네.(무정 정만조)'

'얇은 술병 마른 바둑판 앞뒤로 놓이며, 수 많은 형상이 누대 앞에 펼쳤네. 가로 지른 큰 강물 가을 달 안고, 휘감은 겹겹 산은 저녁 안개 감쌌네. 강호에 감춘 이름 일사(逸士, 명사)라 일컫고 구름 사이 엮은 집 신선 기다리네. 그대 잘 닦아 놓은 집이 부럽거니,  기구(箕裘, 선대의 업을 계승함)로 장수하길
기원하고 싶네(금산 이하영)'

'묘령의 고운 선비라 들었거늘, 멋진 풍류까지 갖췄네. 3대에 걸친 고관 보첩(譜牒, 족보)이 빛나고, 사계절 산천 자연을 품에 안았네. 오래 머문 복된 터 금마(金馬, 익산 소재 지명)와 가깝거니, 인간계 내려온 신선임을 누가 알랴, 성묘(聖廟, 성균관)에서 돌아와서도 글 가르치며 한 누대에 두 영재 슬하에 둔 채 나이까지 잊고 사네.(불수 운영구)'

함라산(咸羅山) 서벽정(棲碧亭)이 위치한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는 조선 시대 함열현으로 동헌, 객사, 향교가 자리 잡았던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지역이며, 호남지역의 조세확보와 조운을 관장한 지역이었다. 
또, 근대기 함열리에는 전국의 만석꾼이 90여 명 남짓인 시절에 3명의 만석꾼이 한마을에 살 정도로 호남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서벽정은 이와 같은 역사적, 경제적 배경하에서 1926년에 하당 이집천가에서 의해서 건립됐다. 
건립된 서벽정에서는 당시 지역 문인은 물론 전국적으로 유명한 문인들이 모여 시회가 개최되었고, 1929년에는 이를 모아 서벽정시고가 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 문화콘텐츠로서 그 가치가 높은 서벽정은 현재 사라진 채 빈터만 남아 있다. 또한 서벽정 공간에서 이루어진 근대기 누정문화에 관한 자료도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크게 연구된 바가 없다.

 근대기에 호남의 대지주 집안에 의해서 건립된 서벽정과 서벽정 공간에서 이루어진 누정문화에 대한 연구는 근대기 익산지역의 누정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익산의 지역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있어 함라 서벽정이 가진 누정문화는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집천의 '서벽정원운(棲碧亭原韻)' 8폭 병풍 앞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