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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31> 이학여사와 고창자수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31> 이학여사와 고창자수

'자수(刺繡)'는 ‘천에 실과 바늘로 그리는 한 폭의 예술 작품’이라고 일컫는다. 비싼 천에 고운 색실로 온갖 사물을 표현한 자수는 예전에는 민간 착용이 금지된 사치품이었다. 문양과 색채가 화사하면서도 소박하고 질박한 우아함을 풍겨 품격을 잃지 않는다. 한 땀 한 땀 혼이 실린 전통 자수는 그래서 ‘품격의 예술’로도 불린다. 

바늘을 도구 삼아 다채로운 색실로 직물을 장식하는 자수는 인류의 오랜 문화유산 중 하나다. 

2,000 년 역사를 지닌 한국자수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시대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다. 

조선시대 자수는 제작 주체에 따라 크게 도화서 화원(畫員)이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수방(繡房) 소속 궁녀들이 수놓은 궁수(宮繡)와 민간 여성들이 제작한 민수(民繡)로 나뉜다. 

궁수가 정제된 문양의 도안 위에 천연염료로 물들인 색실을 사용하여 고아한 기품을 풍긴다면, 민수는 세련된 맛은 덜하지만 자유분방한 구도와 강렬한 원색대비가 두드러진다.

 자수가 감상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시대 숙종 연간 이후 본격화되었다. 격식을 따져야 하는 복식자수나 실용성이 우선인 생활자수에 비해 자수병풍(繡屛)은 조형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영역으로 산수, 영모화조, 장생, 수복, 감계, 기물 등 다양한 소재를 취했다.

 개항 이후, 전통사회에 존재하지 않던 ‘공예’ 개념이 탄생하면서 자수는 전환기를 맞이한다. 자수는 규방에서 자급자족되는 ‘여기(女技)’에 머물지 않고, 근대적인 문명국가를 가능케하는 기술, 공업, 산업으로 간주 되어 국내외 박람회에 출품되기 시작했다. 

‘자수’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러한 전통자수, 조선시대 여성들이 제작하고 향유한 규방공예 또는 이를 전승한 전통공예로서의 자수로, 근대기 이후에는 마치 자수가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근현대 자수는 낯설다. 

또,  상업문화의 발달로 수병 수요가 증가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평안도 안주(安州) 지역에서 전문적인 남성 자수장인들이 집단 제작한 자수가 급성장한 것도 주목할만하다. 대한제국 황실은 궁수를 대신해 안주수 병풍을 주문하거나 당시 일본에서 제작된 병풍을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이후 자수의 역사, 즉 개항, 근대화=서구화, 식민, 전쟁, 분단, 산업화, 세계화 등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변화한 자수의 흐름은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수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내 자수과가 설치된 것으로, 1980년 자수과가 섬유예술과로 통합되기까지의 과정은 변화하는 자수의 위상을 반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미술은 가장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시각언어로 세계적인 동시대성을 획득했다. 자수도 추상이라는 새로운 조형언어를 적극 수용, 1950년대 중반 자수 분야에서도 반(半)추상 형식이 등장했고, 1960년대 이후 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추상으로까지 나아갔다.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한 이들은 물론 대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는 자수 작가들도 비단 외 다양한 재질의 바탕천과 실, 그리고 의외의 재료를 사용하며 전통적인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추상을 실험했다. 이들의 시도는 계속되었지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자수는 재료와 시간을 낭비하는, 현대화해야 하는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점차 퇴조의 길을 걷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이 다음달 4일까지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을  갖는다.

김인숙, 김혜경, 박을복, 엄정윤, 이신자, 이학, 전명자, 정영양, 최유현, 한상수  등 40 여명의 작품 170여 점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알려지지 않은 자수 작가와 작품을 발굴, 소개하고 미술사에서 주변화되었던 자수 실천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본다. 

관람객은 섬세하고 아름답게 수놓은 듯한 자수의 역사 뒷면에 순수미술과 공예, 회화와 자수, 남성과 여성, 창조와 모방, 전통과 근대, 서양과 동양, 공(公)과 사(私), 구상과 추상, 수공예와 산업(기계)공예,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 등 여러 층의 실들이 엉켜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수의 재료인 바늘과 실은 마치 세상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경계에 의문을 던지듯, 바탕천의 표면을 뚫고 뒷면을 접촉하곤 다시 표면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한국 근현대 자수의 계보와 불연속성을 고찰하는 이번 전시가 자수라는 ‘바깥의 사유’를 통해 순수미술 중심으로 서술되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전시는 19세기~20세기 초 제작된 자수로 시작한다. 

대가인 고 진의종(陳懿鍾, 1921~1995)은  국무총리의 부인 이학(李鶴, 1922~2004)는 연대 미상의 '백두산 천지(비단에 자수, 원광대학교박물관)' 등 
2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으로 20세기 이래로는 신성성이 강조되면서 민족의 정체성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백두산 이미지는 이전까지 안보문제로 북한과 백두산의 전경 사진 등이 통제되다가 해금되어 일제히 대중매체에서 공개된 1985년 이후 널리 알려졌다. 

학창시절부터 서예를 공부해 온 이여사는  1979년 대한주부클럽 연합회에서 수여하는 '신사임당상'을 받은 이후, 클럽 소속의 자수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1984년 한국자수문화협회 발족에 참여해 초대회장으로 선출되며 자수가로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전통자수의 교육 및 보급에 힘썼는데, 화조나 십장생 등 전통적 소재 뿐 아니라 '백두산 천지'와 같이 단군 영정, 여산신도 등 민족적 정서를 고취하는 주체들도 자주 다루었다.

서울 외환은행 본점에서 1984년 6월 12일 열린 한국자수문화협회가 주최한 전시회에 협회의 초대회장인 전통자수의 대가인 이여사가 참관했다.

 진의종은 고창출신이며,  서예가이기도한 이여사는 본관이 함평이다.

1983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주부클럽연합회 자수전에 병풍을 출품했다.
이여사는 지난 1979년 주부클럽의 신사임당상을 수상한 이후 연합회의자수회회장직을 맡아왔다. 이때 열린 회원전에는 이여사의 병풍 작품 등 50여 점이 선보였다.

원광대는 1992년 12월 5일  숭산기념관에서 한국자수협회장과 한소문화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여사에게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여사는 자수작품 십장생등 51점을 원광대에 기증, 5-14일까지 원광대박물관에서 전시했다.

또, 1999년 6월 21일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에게 자수, 서예, 생활용품 등 소장품 345점(10억원 어치)를 기증했다.
한국자수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한국자수문화협의회
를 설립한 이여사의 기증품에뉴저서인 '한수 연구' 200권(원고 및 판권 포함), 사계
병품, 은삼장 노리개, 자수작품, 바느질용품, 서화 등이 포함돼 있
다. 숙명여대는 21일부터 본교 박물관 전시실에서 기증품을 전시했다.

이여사는 2009년 9월 4일 남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공음면에  ‘이학문화예술진흥원’을 설립했다.
딸인 진선희(陳善姬· 전 배화여대 교수)씨가 재단이사장을 맡고 전통자수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9명의 이사진을 구성했다.
이곳에서는 전통자수 분야의 후학을 기르고 자수 기술개발과 보급, 전시활동 등을 추진했다.
이 여사는 15 여 차례의 서예 개인전을 열었고 1984년 자수문화협의회를 결성, 전통자수 공모전을 개최했으며, 수필가로도 활동하면서 지난해 자서전 ‘황진이가 되고 싶었던 여인’을 펴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 제11대 신사임당상을 수상했고 2000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이학문화예술상은 1993년 제1대 수상을 시작으로 이여사의 뜻에 따라 후학 양성과 전통의 개발 및 보급활동을 위해 제정됐다.
2023년까지 30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학자가 들어가서인지 십장생중 유난히 학을 소재로한 작품이 많다.

이여사의 작품 '난중일기'처럼 우리고유의 문헌이나 그림·고전 등을 수실로 형상화한것도 많다.
이여사는 정치활동과 공직생활등으로 바쁜 남편의 뒷바라지에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나아가 예술세계라는 나름대로의 자기세계를 구축한 드문 여성 중 한사람이다.
눈코뜰새없이 바쁜 남편(진의종국무총리)을 둔 아내로서의 스트레스를 예술세계에 몰두함으로써 스스로 해결하는 지혜를 터득했다.

"총리는 총리고 이학은 이학이다" 어떤 모임,어떤 장소에서나 이렇게 분명히 말할 정도로 한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확연히 세워놓고 있기도하다.

"전라도 양반집의 막내딸로태어난 덕분에 아버님으로부터 옛날여자치고는 획기적인대접을 받았습니다. 사랑방에 불려다니며 란을 치는 법을 배우고 서예를 익혔으며심지어는 마짱까지 가르쳐주셨죠"

자신이 배운 마짱을 아들과 며느리들에게도 가르쳐줬는데 아들들은 잘 배우나 며느리들은 왠지 익히지 못하더라며 개방적인 일면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꾸밈없이 털어놓는 모습은 명사라기보다 이웃집 아주머니 처럼 다정하게만 느껴졌던 인물이다.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수폭에 옮겨놓기위한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을 마친 이여사는 또다시 수틀 앞에 명상하듯 자리를 잡았다.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빙모인 이여사는 2004년 8월 18일 새벽 1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유족으로 장남 영호(고창 학원농장 대표) 차남 영삼(한국코카콜라) 장녀 진숙(화가) 차녀 선희(배화여대 교수)와 사위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등이 있다.
장례는 현대아산병원(서울 송파구)에서 치르고 발인일은 20일 오전이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진 전 총리와 합장됐다.

장남 영호(학원농장 대표)씨는 "어머니는 아버지 뒷바라지와 자식 교육에 헌신한 것은 물론 자신의 예술세계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계획하고 이루고자 노력했던 분"이라고 했다.

한편 고창 공음 '학원(鶴園)농장'은 이학 여사의 이름 ‘학’자에, 들을 뜻하는 한자어 ‘원’을 붙여 '학의 들'이란 뜻을 갖고 있다. 1960년대 초 야산을 개간,  설립한 농장이다. ‘학이 날아드는 곳’이라 이같이 이름 붙였다. 
도깨비가 동산의 주인 행세를 하며 사람까지 놀래키고 두렵게하자 이곳에 정착해 학원농장을 처음으로 일군 이여사와 주민들이 종학사를 세워 도깨비를 대숲으로 쫓아내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사천왕상을 그 앞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여사가 국무총리를 지낸 남편 진의종씨를 기념해 만든 종각이 있다. 종각 아래는 종학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의 부속시설이다.
하지만 종학사는 없어지고 종각만 남아있다. 종각 건립 후 10년 이상 매일 아침 6시에 종을 쳐 선동리 사람들이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전한다.

선동리는 풍수지리상 마을의 형태가 부채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부채울’ 또는 ‘선동(扇洞)’이라 하였다. 1950년대는 마을 앞에 큰 샘이 있어 ‘대정(大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부모님들이 살고 있는 해정마을은 바닷물이 마을까지 들어와 바다의 게가 기어올라오고 웅덩이나 못에 박혀 살고 있었다고 해서 해정(蟹井)으로 불렀다.

하지만 게 해자가 쓰기 불편하다고 해서 바다 해자를 써서 해정(海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해정마을 입구에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리는 우물이 있었다.

한편 고창엔  전통 자수의 길을 걸어온 박미애 씨가무형유산 ‘자수장’(민수, 전통자수) 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
고창자수는 기법이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전통적인 민수를 꼰사, 푼사, 금은사를 사용해 수를 놓는다.  실 꼬는 방법과 바늘땀으로 원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며 섬세하고 화려하고 우아한 장식 기법이 돋보인다. 

고창자수는 조선시대 민수를 중심으로 여성 생활 문화의 한 맥을 이어왔다.

 

이학(李鶴, 1922-2004)


전라남도 평성에서 태어났다.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1939)하고 도쿄로 건너가 와우서원(臥牛書院_에서 서예를 공부했다(1940-1942). 
귀국해 경기여고·배화여고 등에서 서예를 가르쳤고, 1950년대~1980년대 서울·광주·대구 등지에서 서예 개인전 10여 회 개최했다. 1979년 대한주부클럽연합회에서 주관하는 신사임당상을 수상했다. 이후 전통 자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학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후손에게 이어준다”는 취지에서 1984년 한국자수문화협의회를 발족(1984)하고, 『한수문화韓繡文化』(1986), 『한수연구韓繡硏究』(1990) 등을 출간하는 등 전통자수 제작, 보급, 교육에 공을 쏟았다. 1992년 원광대학교박물 관에 작품을 기증하고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