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28>한국 '낙화(烙畵)'의 창시자 전북 출신 박창규
'낙화(烙畵)'는 '지질 낙'(烙)과 '그림 화'(畵)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인두를 달궈 한지나 나무, 가죽 등 표면을 지지는 방식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19세기 중엽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낙화가가 출현하기에 이른다. 바로 박창규(朴昌珪, 1796-1861)는 밀양 박씨 가문의 양반출신으로, 벼슬은 말단인 참봉을 지냈다. 자는 성민(聖玟)이고 호는 김석준의 시에 보듯 낭간(琅玕)이다. 수산(垂山) 혹은 화화도인(火畵道人)라고도 불린다. 본관은 함양이고, 전주, 임실 등 주로 전북에서 살았다.
안동 장씨를 비롯한 초창기 낙화를 그린 작가들이 양반출신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사대부나 사대부가문에서 시작한 낙화는 19세기 말에 점차 확산되면서 서민의 그림인 민화로 저변화된 것이다.
국가무형문화재 낙화는 나무나 종이를 인두로 지져서 그리는 전통 회화로, 조선 시대 서화 사전 '근역서화징'에 17세기 안동 장씨 부인이 낙화에 능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추사 김정희 또한 조선 낙화의 중흥조 박창규에게 ‘화화도인’이라는 호를 지어 주며 예술성을 칭송했다.
그는 낙화를 중국에서 배웠다.
밀양박씨호계공파보(密陽朴氏虎溪公波譜)를 보면, 1822년(족보에 적힌 생년인 1796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27세)에 동지상사(冬至上使)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들어가 관광을 하던 차에 마음속으로 낙화의 이치에 통달했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837년 참봉을 제수 받으면서 그만의 독특한 화화법인 종이에 낙을 놓는 낙화법을 창시했다.
그는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과 중국을 갔고 김정희의 제자이자 중국어 역관인 김석준과 친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중국으로부터 낙화를 배워왔다는 기록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당시 중국의 어떤 낙화가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좀 더 파고들어가야 밝혀질 문제다.
낙화에 대한 그의 명성은 중국까지 자자했다.
당시 그의 작품에 대한 글 가운데 김석준(1831~1915)이 지은 시집 '홍약루속회이시록(紅藥樓續懷人詩錄)'에 실린 ‘박창규를 생각하며(懷朴琅玕)’가 눈길을 끈다.
불로 지지니 붓과 먹은 필요 없고 / 拭拂忘筆墨
쇠를 달구어 참된 모습 그려 낸다. / 煉金繪形眞
섬세하고 치밀한 솜씨 어찌 그리 지극한가 / 纖密工何極
낙관까지 더욱 묘하고 새롭구나. / 款識益尖新
나무부처가 불을 건너왔으니 / 木佛能渡火
비로소 깨달은 도인을 보겠구나 / 始見悟道人
김석준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말년에 가장 아꼈다는 제자로, 중국어 역관을 지낸 인물이다.
시구로 풀어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평은 “쇠를 달구어 참된 모습을 그려낸다.
섬세하고 치밀한 솜씨 어찌 그리 지극한가”라는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 붓도 아닌 쇠를 달구어 그렸지만 대상의 진수를 파악했고, 그것을 표현하는 테크닉이 섬세하고 치밀한 것이다.
그리고 결론으로 “깨달은 도인”이라고 평가했다. 김석준이 본 이 작품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대상의 진수를 깨달은 그림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낙관까지 더욱 묘하고 새롭구나”라는 말의 의미는 '고목에 깃든 매(枯木棲鷹,간송미술관 소장)'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의 낙관을 도장으로 찍은 것이 아니라 인두로 지져서 표현했다.
'내가 임진년(1832)에 선친을 따라 호남(湖南)을 살펴봤는데, 호남의 인사들이 입을 모아 남원(南原)의 박군(朴君)을 칭찬하며 앞 다투어 추천했다. 함께 지내다보니 정이 날로 친밀해졌고, 날마다 그의 재주를 보니 기이한 선비인데 기능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었다. 박군은 사람됨이 겉으론 문약했지만 내실 있고 똑똑하여 스스로 깨우친 게 많았으며 원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성품이 대나무를 아주 좋아했고, 대나무에 그림 새기는 데 병적인 취미가 있었다. 호남은 본래 대나무 산지라 모든 그릇과 가구를 자르고 깎아서 만든게 모두 대나무였는데, 박군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의 동생 김상희가 박창규를 처음 만난 것은 1832년이다. 그는 박창규를 위해 '화화도인전(火畵道人傳)'을 지었다.
박창규와 그의 사촌동생 박복규(朴復珪,1819〜1859)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 낙죽으로 유명한 박창규는 낙죽으로 용을 휘감은 무늬를 베픈 담뱃대를 헌종에게 바쳤다. 헌종이 이 담뱃대를 빨면 용의 비늘이 오므라들고, 뱉으면 비늘이 퍼지는 듯하여 신기하게 여겼다. 헌종이 이것이 너의 솜씨냐고 묻자, 그것은 자신의 사촌동생 박복규가 만든 것이라고 대답했다. 1846년 다시 박창규가 박이규와 함께 입궐을 했다. 헌종이 박복규를 보고 기뻐하여 ‘홍두상사(紅豆相思☆’라는 어필을 내려주었다. 박복규는 감격해 이 비단을 손목에 감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1847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는데, 1855년 진도군수가 되었으나 4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러한 일화는 낙화 혹은 낙죽이 임금까지 관심을 가질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것은 박창규가 낙화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창규는 조선시대 낙화를 새롭게 변화시킨 작가다.
낙화장에 관한 기록은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낙화변중설(烙畵辨證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순조 말에 박창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낙화를 잘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원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가 살았던 곳은 현재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라고 했다.
우리나라 제1의 ‘낙화(烙畵)’ 고장은 전북이었다. 박창규(朴昌珪, 1796-1861)의 낙화는 그의 종제와 후손을 중심으로 150여 년 동안 전통과 기법을 전승시켜 왔다.
박창규의 직계로 둘째 아들 남계(南溪) 박진욱(朴鎭郁, 1833~?)와 증손인 석천(石川) 박상필(朴相珌, 1895~?)이 있다. 송암(松庵) 박이규(朴履珪, 1819~?)와 운초(雲樵) 박훈규(朴勛珪, 1836~?)를 비롯, 죽파(竹坡)박진호(朴鎭灝, 1842~?), 월산(月山)박계담(朴桂淡, 1869~1948), 소산(小山) 박상전(朴相典, 1901~1959), 옥천(玉川)박상근(朴相根, 1907~?) 등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손자인 초산(蕉山, 小蕉) 박병수(朴秉洙, 1858~?)의 행방이 묘연했는데,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행적이 소상헤게 드러났다.
진안에 살던 그가 박창규의 손자 박병수가 진안현감 김승집(1826~?)의 눈에 든 일에서 비롯됐다. 그는 김승집의 동생이자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에게 소개됐고, 김홍집에 의해 일본에 알려지게 됐다.
그는 1918년에는 당시 백작이었던 이완용의 권유로 경성에 올라와 젊은이들에게 낙화를 가르쳤다. 이 일은 ‘매일신보’에서 자세히 전할 정도로 유명했다.
이에 따르면 진안에 거주한 박병수씨는 이완용 백작의 초청을 받았으며, 공진회때 히트를 쳤다는 사실이 나온다.
또, 박창규의 아들이 이를 배웠으나 손자 병수씨가 훨씬 뛰어났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그는 김승집 진안현감이 알아줌은 물론 일본까지도 알려졌다. 이때 그의 나이가 60이었으니 그는 1858년생이다. 그의 낙화(烙畵)는 인두그림과 달리, 종이를 살짝 태우듯이 그리는 그림도 있었던 모양이다. 기사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대목은, 대나무가 아니라 종이에 그리는 낙화기술은 중국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박창규가 스스로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라고 본 점이다. 나무나 대를 인두로 지지는 기술을 비교적 쉽지만, 종이에다 종이가 상하지 않게 그림을 그린 것은 ‘특별한 묘득(妙得)’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기술로, 조선에서 다른 나라에 자랑할 만한 것이라 했다.
기사의 소제목을 “‘조선에서 발명되어 조선에서 발달한 것’이라고 달았는데, 이러한 인식이 일제강점기 때 널리 퍼졌다. 당시 구미 각국으로부터 낙화의 주문이 온다고 했으니, ‘낙화의 세계화’의 시동을 건 시기가 일제강점기인 셈이었다”는 정병모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교수의 설명이다.
박병수는 박창규가 정립한 남종화풍의 낙화 기법을 근본으로 삼았다. 박병수의 제자로 백남철(白南哲)이 소개됐으며, 그는 전주군에서 살았으며, 20세였다.
박병수의 제자 운포(雲浦) 백학기(白鶴起)는 전주출신으로 유명세를 이어갔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화회(火畵會)’ 혹은 ‘낙화회(烙畵會)’라 해서 낙화 기술을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이벤트를 벌였다.
‘인두로 지져서 산수화나 화조화 같은 그림을 그리는 기술과 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지칭’하는 낙화장(烙畵匠)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 김영조씨가 그 보유자로 인정됐다.
그로 말미암아 낙화가 세간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그림으로 격상했고, 그 명성에 힘입어 낙화작가의 계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한국회화사에서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낙화를 격조 있는 남종화풍의 예술로 업그레이드시켰다는 점에 있다.
'도인’이라는 호를 지어 주며 예술성을 칭송했다. 당시 대중에게 친숙했던 낙화는 일제강점기에 더욱 흥해 외국에 알려지기도 했으나 한때 맥이 끊어질 위기를 겪는다. 그리기 힘들고 익히기 어렵고, 그리하여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 지난한 까닭이다. 계속 흐르는 시대가 오늘의 유행을 옛일로 옮기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자취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졌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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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8년 11월 5일자와 시대일보 1924년 9월 7일자 기사에 소개된 낙화
<매일신보> 1918년 11월 5일자에 소개된 박병수
'대정 삼년(대정 4년의 착오, 즉 1915년) 공진회 때에 낙화(烙畵, 인두로 지지는 그림)의 명인으로 찬양을 많이 받았던 전라북도 진안군에 거주하는 박병수옹(朴秉洙翁)은 지난달 31일에 다시 경성에 올라와 송현동(松峴洞) 56번지에 두류하여 있는데 이번에 삼경함은 그 노인의 연령이 금년 육십이라, 후세 청년에게 그리는 법을 전하라는 뜻으로 백작 이완용씨의 상경하라는 권고를 받아 온 것이라는데 이 낙화라는 그림은 원래 다른 그림 모양으로 청국이나 서양에서 전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박씨의 조부 박창규(朴昌珪)라는 이가 스스로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라 하며 외국에도 낙화가 있기는 있으나 혹 나무쪽에나 대나무에다가 그리는 것이요, 조선의 낙화모양으로 종이에 그리는 것은 없는 터이라.
불에 달은 인두를 가지고 나무나 대를 지져서 그림을 그리기는 용이한 일이지만은 얇은 종이에다가 종이는 상하지 않고 그림은 되도록 그리기라는 것은 보기에는 매우 용이할 것 같아도 실지로 하여 보면 특별한 묘득을 얻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인즉 이 낙화 한 가지 조선에서 특히 발달된 그림으로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이 그림이 발명된 뒤로 백년이래에 배운 제자도 적지 아니하건만은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박씨의 부친도 배우기는 하였으나 확실한 성공은 하지 못하였고 박씨는 어려서부터 이 그림에 취미를 얻고 또 재주가 탁월하여 십팔세 되었을 때부터 세상에 그림을 내어놓게 되었는 바 기시에 진안현감으로 있던 김승집씨에게 매우 칭찬을 받고 김홍집씨의 소개로 일본에까지 그림을 보내게 됨에 박씨는 더욱 기뻐하여 큰 성공을 하여볼 작정으로 오늘까지 사십여년이나 그림그리기에 종사하여 지금은 구미 각국에서까지 주문이 오도록 성공을 한 것이더라. 그리고 장래 그 노인의 뒤를 이을 듯한 유망한 제자는 전주군에 사는 백남철(白南哲) 이십세 된 청년인데 서화가 똑똑하여 부지런히 힘쓰면 박옹의 뒤를 이어 낙화의 생명을 유지하겠더라'
<시대일보> 1924년 9월 7일자에 소개된 조선낙화회(朝鮮烙畵會)
'조선낙화(朝鮮烙畵)는 거금(距今) 60년전(年前)에 박초산(朴蕉山)이 발명(發明)하였으나 아직 세상(世上)에 유행(流行)되지 못함을 일반(一般)이 유감(遺憾)으로 생각하는 바 사계(斯界)에 유일(唯一)한 유예(遺詣)가 유(有)한 청년 대화가(靑年 大畵家) 백학기군(白鶴起君)이 당지(當地)에 내도(來到)하여 유지제씨(有志諸氏)의 발기(發起)로서 낙화대회(烙畵大會)를 작(昨) 6일(日)에 상업회의소 누상(商業會議所 樓上)에서 개최(開催)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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