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33> '삼강행실도' 속 전북 인물
"이름을 '삼강행실'(三綱行實)이라 하고, 인쇄해 서울과 외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를 선택해 항상 가르치고 지도해 일깨워 주며…." (세종실록 1434년 4월 27일 기사)
1434년 조선의 4번째 임금인 세종(재위 1418∼1450)은 명을 내렸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가 지켜야 할 도리를 정리한 책을 펴내 백성들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를 정리한 조선시대판 '도덕 교과서'였다.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애민 사상과 민본정치 사상을 돌아보는 자료다.
세종대에 편찬한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충신, 효자, 열녀 110명씩 330명을 뽑아 이들의 행적을 정리하고 그림으로 설명한 서적이다.
군위신강(君爲臣綱·임금은 신하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부위자강(父爲子綱·아버지는 자식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부위부강(夫爲婦綱·남편은 아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등 삼강(三綱)을 실천한 사례를 모았다.
조선 500년 동안 가장 많이 출판된 책 중의 하나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다. 유난히 책을 좋아한 세종이 두고두고 모범이 될 만한 효자 충신 열녀의 행실을 그림과 글로 펴낸 책이다. 묘한 건 책이 삼강행실'록(錄)'도, 삼강행실'기(記)'도 아닌 삼강행실'도(圖)'란 사실. 글자를 못 읽는 우매한 일반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림을 중심에 둔 거다. 백성을 긍휼히 여긴 통치자의 배려일까?
삼강행실도가 나오게 된 배경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세종 10년(1428) 진주 살던 김화라는 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존립기반을 송두리째 흔드는 존속살해사건에 맞닥뜨린 통치자는 백성 교화를 위한 책의 간행을 결심한다. 그래서 나온 게 삼강행실도.
중종은 한번에 2,940질의 삼강행실도를 간행했는데, 한번에 4,705책을 인쇄한 규정전운에 이은 대규모 물량공세다. 이후에도 속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 동안 조금씩 내용을 고쳐가면서 '삼강'은 조선시대를 풍미했다.
삼강행실도에서 엽기적인 효의 사례들은 '단지(斷指)'와 '할고(割股)'.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는 일이다. 며느리가 병든 시어머니를 위해 다리 살을 베고, 아들이 아버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일은 삼강행실도에서 흔하디 흔한 사례다.
그나마 초기 삼강행실도에는 가림막이라도 있었다. 병든 아비를 위해 살을 베고 손가락을 자르는 모습과 누워있는 아비 사이엔 가림막이 있었다. 효자로서 마땅히 할 일이라도 차마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이 아비에겐 불편한 진실이기에 가림막이 존재하는 것.
그런데 삼강행실도 후속작이라 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선 가림막마저 치워졌다. 병든 아비와 지아비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권 씨는 정확히 지아비의 눈앞에서 그 일을 치르고 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최소한의 균형감마저 사라지고 희생의 당위만 남아있다.
'삼강행실도'에는 폭력적 서사가 많다.
모범적 사례로 제시된 충신, 효자, 열녀들의 이야기는 철저한 유교적 위계질서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아버지, 군주, 남편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헌신을 강조하였다. 게다가 국가에서는 충신, 효자, 열녀들에게 세금이나 용역을 면제해주고 정려문을 세워주는 등의 포상을 해주면서 장려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충, 효, 열이라는 유교 윤리를 지키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거나[단지(斷指)] 허벅지를 베어내는[할고(割股)] 등의 자해를 서슴지 않았다. 열녀는 남편을 따라 죽는 자살[순절(殉節)]을 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열녀가 남편을 따라 자살하고 이에 대해 국가에서 정려하는 세태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자살을 의(義)에 합당하지 않는 죽음으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정약용도 겁탈에 맞서거나 강압적인 재혼을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는 죽음을 맞는 것은 의로운 행위로 평가했다.
전북 지역 효자들이 가장 많이 행한 효행이 단지주혈(斷指注血)과 시묘살이이다.
단지주혈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부모에게 주는 것인데, 지금의 응급 처치법과 같은 것으로 고농축의 영양분을 제공하여 목숨을 연장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시묘살이는 보통 부모의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부모가 아이를 낳아 3년 동안 애지중지하며 키워 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노심초사하며 헌신적으로 예를 올린다. 그 밖에도 허벅다리 살을 베어 국을 끓여 드리는 경우도 있고, 병이 낫지 않으면 변을 맛보거나 하늘에 축원하며 백방으로 약을 구해 탕약을 끓이는 경우도 있다. 효행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 중에는 이적(異跡)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들이 많다. 병환 중인 부모가 한겨울에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꽁꽁 언 호수의 얼음판으로 달려가면 물고기가 얼음을 뚫고 나오기도 하고, 겨울에는 구하기 어려운 죽순이나 딸기, 감 등을 우여곡절 끝에 얻어서 부모님께 드린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전통시대 효자들이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거나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해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조악한 느낌이 들 정도로 볼품이 없어 보이지만, 이 책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또 조선 사람들의 위계적 윤리의 실천지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책이다. 즉 지배층이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은 한국 역사상 이 책이 최초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양반 체제는 한글로 된 책을 다양하게 인쇄해 백성들에게 공급하거나, 원하는 백성이면 모두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양반들은 되도록이면 백성을 무식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통치에 필요한 만큼 적은 지식만을 주입하면 그만이었다. 어떤 교육 내용을 어디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은 백성에게 묻지 않았다. 백성들 역시 일방적 교육에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낼 길이 없었다.
완주 고산 석진단지
석진이 손가락을 잘라 약을 만들어 아버지를 살린 고사를 담은 '석진단지'(石珍斷指, 대전시립박물관 소장)는 완주 고산현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석진은 조선 고산현의 아전이다. 그의 아버지는 몹쓸 병에 걸려 날마다 발작하다가 기절했는데, 차마 그 광경을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유석진은 밤낮으로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면서 약을 구하였다. 그러던 중 어떤 이가 “산 사람의 뼈를 피에 섞어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하여 유석진이 즉시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말대로 하였더니, 그 병이 곧바로 나았다.
삼강행실도는 세종대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효의 의미를 백성 전체에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출판됐다. 최근 심심치 않게 엽기적이고 잔혹한 패륜 소식을 접하곤 한다. 또한 힘없는 아이들에게까지 저지른 만행을 접하며 자효(子孝)는 어디에 있고, 부자(父慈)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유석진의 행동을 보며 ‘효’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으로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가 고민이 깊어진다.
작가 미상, '석진단지(石珍斷指, 종이에 채색, 21.7×14.7㎝, 삼성미술관 리움)'
오른쪽 위의 긴 네모 칸 안에 '석진단지(石珍斷指)'로 제목이 있고 '본조(本朝)'라고 가로로 적어 놓았다.
"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다"는 내용을 그린 것이고, 본조는 '우리 왕조' 곧 조선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뜻이다. 효자효녀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부모의 병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한국인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석진은 실존인물이고 이 이야기는 실화다.
기계 유씨 유석진은 고산현 아전이었다. 아버지가 매일 발작을 일으키고 기절하는 병에 걸려 4년 동안 밤낮으로 간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악질(惡疾)이 낫지 않았다. 한 스님이 "산 사람의 뼈를 갈아 피에 타서 먹이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유석진이 왼손 무명지(無名指)를 잘라 그대로 했더니 아버지의 병이 다 나았다.
고산현 향교의 한 생도가 현감에게 이 효행을 알렸고, 현감은 전라도관찰사에게, 관찰사는 조정에 보고했다. 세종이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고, 그 사람의 이역(吏役)을 면제하게 하라"는 포상을 내려 이 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10월 18일자에 나온다.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정려비각의 석비에 "유명 조선국 효자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사헌부 지평 유석진지려(有明朝鮮國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司憲府持平兪石珎之閭)"로 새겨져 있어 600여 년 전의 이 일을 증거하고 있다.
이로부터 14년 후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친족 살인사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간행한다. 부위자강, 군위신강, 부위부강을 실천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모범적인 행실을 모아 알림으로서 충효열(忠孝烈)을 보편적 가치로 전파하려 했다. 여기에 유석진의 사적(事蹟)이 들어갔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삽화를 곁들였다.
세종을 모범으로 삼았던 정조는 '삼강행실도'와 중종 때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중국 사례를 모아 간행한 '이륜행실도'를 합본하고 재편집한 종합 수정판인 '오륜행실도'를 펴냈다.
석진단지도 다시 실렸다. 1797년(정조 21) 간행한 '오륜행실도'의 세련된 체제와 편집을 보면 정조시대의 출판문화 능력이 대단하고, 새로 제작한 150점의 삽화를 보면 도화서 화원들이 이야기와 이미지를 격조 있게 결합해 시각화한 실력이 실감난다.
'석진단지'는 '오륜행실도'의 목판화와 그림 내용은 같지만 붓으로 그린 채색화다. 제목과 그림을 보면 어떤 교화를 전달하려는지 금방 이해된다. 그러면서도 특정 내용을 재현하는 보조적 수단에 그치지 않는 회화 자체의 조형언어로서의 감상 가치 또한 넉넉하다(이인숙)
장수 순의리 백씨(殉義吏 白氏)
장수 타루공원엔 순의리(殉義吏) 백(白)씨의 충절을 기리는 타루비(墮淚碑)가 있다.
논개, 정경손 그리고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순의리를 '장수3절(長水三節)'의 하나다.
1726년 장수현감 정주석이 이들 세 사람을 '삼강행실도'에 추천하는 장계를 올려 그 때부터 '장수3절'로 추앙되고 있다.
장수군 천천면 장판리에는 눈물을 흘린다는 비석 타루비(墮淚碑, 전라북도기념물 제83호) 가 있다. 이는 순의리(殉義吏) 백(白)씨의 충절을 기리는 비로, 많은 사연을 담고 있으며 이후 조성된 여러 비석과 현판, 조각상들이 타루공원을 이루고 있다.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했는데, 일설에는 나라에 위기가 닥치거나 애환이 있을 때 비석에서 눈물이 흘린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숙종 4년(1678) 당시 장수현감 조종면이 전라감영에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천천면 장척마을 앞 바위 비탈을 지나갔다. 길가 숲 속에서 졸고 있던 꿩이 요란한 말발굽소리에 놀라는 바람에 무심코 지나가던 조현감의 말이 놀라 한쪽발을 실족, 절벽 아래의 배리소에 빠져 급류에 휩쓸려 현감이 목숨을 잃게 됐다.
주인을 잃은 백씨는 자기가 잘못하여 현감이 죽었다고 통곡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원한의 꿩과 말, 그리고 타루 두자를 바위 벽에 그려 놓고 자기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한다. 그 후 1802년 장수현감 최수형이 주인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현지에 비를 세우고 타루비라 하였다.
'순의리는 현감 조종면(趙宗冕)을 배행하다가 현감이 장척애에서 죽자 따라서 순절한 장수현의 통인(通引)이었다.
120년이 지난 후에 세워진 비석에는 순의리의 성명이 기재되지 않아 영영 성명을 찾을 길이 없다.
비를 세우자 세상 사람들은 또 다시 기적을 발견했다.
어느 시기가 되면 비각속에 들어있는 비석에서 물방울이 흘러 내린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비석이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비석이 눈물을 흘림은 필경 순의리의 영혼이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순의리백씨타루추모비(殉義吏白氏墮淚追慕碑)의 내용이다.
완주 구이 '득룡폐부(得容蔽父)'
완주군 구이면 두방리 유경식 집안에는 1615년 효자도록 유전되고 있다. 유경식 집안에서 이 책이 유전되기 있는 것은 유득용에 대한 기록이 이 책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동국효자도록 '득룡폐부(得容蔽父)'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幼學 柳得容 全州人 壬辰倭亂 父年八十 不能運步 敵至欲害其父 得容以身翼敵 請
代死 俱被害 今上朝旌門)
유학 유득용은 전주 사람이다.(전주유씨 라는 의미다) 임진왜란에 아비의 여든이라 능히 운신하여 걷지 못 하더니 도적이 이르러 그 아비를 헤치고자 하거늘, 득용이 몸으로 가리고 대신 죽음을 청하다가 둘 다 해를 입게 됐다. 이에 왕이 정문(旌門)을 하사했다.
전주유씨 지파 족보 초간본(1628년) 30에 유득용에 대한 기록은, '정유왜란 봉친입산 공피적해 이효정표(丁酉倭亂 奉親入山 共被賊害 以孝旌表)' 즉 정유왜란 때 득용이 아버지를 모시고 산에 들어가다가 적들로부터 함께 피해를 입어 그 효를 기리기 위해 정문을 내렸다는 기록이다. 정유재란은 1597년 8월 27일 ~ 1598년 12월 16일까지의 일이다.
당시 일본군들은 1597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 남원에서 전투를 벌였고, 1597년 9월 29일(음력 8월 19일) 전주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바로 이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유득용의 사건이 일어난 것도 1597년 9월의 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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