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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32> 1448년 고창 무장현 염전은 치료 목적의 목욕탕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32> 1448년 고창 무장현 염전은 치료 목적의 목욕탕


1448년 고창 무장현 염전이 치료 목적의 목욕탕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목욕탕, 목욕으로 보는 한국의 생활문화 보고서'를 통해서다.
‘전라도 감사가 아뢰기를, ’무장현(茂長縣)의 염정(鹽井)에 목욕간(沐浴間)을 지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목욕하여 병을 낫게 하기를 청하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全羅道監司啓 茂長縣鹽井 請設浴室 令人沐浴療病 從之. 세종 30년 무진(1448) 2월 12일 무진)
세종 30년(1448) 염정(鹽井)에 목욕간(沐浴間)을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목욕해 병을 낫게 하기를 청하자 이를 들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염전에 치료목적의 목욕탕을 만들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방법들은 아프거나 제사를 앞둔 특정한 시기에 제한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일상적인 목욕으로 더러워진 신체 일부를 닦아내는 부분욕을 행했던 것으로 추측케한다.
조선시대까지는 일부 양반들만, 그것도 명절에나 겨우 큰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전신욕을 할 수 있었다. 처음 목욕탕에 간 조선인들은 온탕 안에 들어가 불린 때를 그 자리에서 바로 미는 행동이 ‘매너 없는’ 행동임을 알지 못했다.
일제시대엔 대중목욕탕에 서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이 나타나기도 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욕탕에 한국인을 들이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목욕중인 사람을 폭행하였다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며, 전주에서는 한국인을 들일 수 없다는 일본인과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1925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 '일본인과 대전편:전주 이리 목욕탕에서 조선인을 모욕했다'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2018년을 기준으로 공중위생법상 목욕업으로 등록된 업소의 수는 전국적으로 6,911개소다. 
이 가운데 전북은 324개소로 전국에서 8번째로 많았으며, 군산 중앙목욕탕이 1963년 6월 1일 개업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다고 소개됐다. 목욕업의 수는 1990년 후반부터 감소하기 시작, 20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3,000여 곳이 문을 닫았다. 앞으로 목욕업의 수는 더욱 가파르게 줄어들 수도 있다. 이같은 현실에서 대중목욕탕의 모습을 그대로 기억해 두는 것도 큰 의의가 있다.
부안 곰소 염전
2017년 기준 전국의 염전은 1,062개다. 이 중 전남에 982개(92.4%)가 몰려있다. 그중 845개가 신안군에 있다. 충남(54개)·경기(19개)·전북(4개)·인천(3개)에도 염전이 있기는 하지만 수도권에선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다. 국산 천일염은 값싼 중국산 천일염 공세에 밀려난 여파다. 염전 면적이 더 급격히 줄어들 것이란 우려마저 나온다.
부안 ‘곰소 천일염업’은 2020년 제10호 국가 중요 어업 유산이 됐다. 국가 중요 어업 유산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고유의 유형·무형 어업 자산을 보전하고 관리하기 위해 해양수산부가 2015년 도입한 제도다. 제주 해녀 어업을 1호로, 보성 뻘배 어업과 남해 죽방렴 어업 등 20여개가 지정됐다.
곰소 천일염업은 신종만 대표의 조부가 1946년 시작해 4대째 가업으로 계승하고 있다.
 남선염업은 곰소 일대에 축구장 70여 개 면적인 57만여㎡ 염전에서 전통 방식으로 천일염을 만든다. 값싼 중국산 소금이 대량으로 유입돼 가격이 폭락하자 국내 염전 3분의 1이 폐업하거나 태양광 발전 등으로 전환하는 상황이지만, 전통 방식을 유지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신종만 남선염업 대표는 “소금 창고에서 1년 정도 간수를 빼면 단맛이 더욱 강해진다”며 “김장철을 앞두고 곰소 천일염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5월 중순 바람을 타고 날아온 송홧가루가 결정지에 내려올 때 만들어진 소금은 곰소의 특산물이다.
곰소 염전은 가장 위쪽 증발지를 가장 아래쪽 결정지보다 1m 정도 높은 곳에 만들어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는 구조다. 소금을 수레에 퍼 나르는 기계를 제외하곤 70여 년 전부터 사용하던 도구를 쓴다. 비가 올 때 잠시 염수를 받아두는 창고인 ‘해주’도 옛 모습 그대로다.
전라북도 부안군은 북서쪽이 서해와 마주하고 있고 남쪽은 깊이 만입된 해안가와 접하고 있어 삼면이 바다와 접경해 있다. 그래서 흔히들 부안군을 ‘반도 중의 반도’라고 하였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골짜기 동네 밖에는 모두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의 집이다. 산 가운데는 좋은 밭과 기름진 두렁이 많아서 주민들은 산에 올라가서는 산채를 뜯고 산을 내려와서는 고기와 소금을 취한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부안은 소나무가 무성한 변산을 뒤로 하고, 어염(魚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갯벌을 앞으로 하는 자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자기(瓷器), 소금, 조기와 같은 물산이 뚜렷하게 발전했다. 
곰소만은 전라북도 부안군과 고창군 사이를 좁고 길게 들어간 모양으로 형성되었다. 곰소(熊淵)는 지형이 곰과 같고 그 앞에 깊은 소(沼)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해안 최대 어장인 칠산 어장을 배후에 두고 있는 곰소만 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넓은 간석지가 발달하여 다양한 어류들의 주요 산란지 및 서식지 역할을 해 왔으며 소금의 주 생산지이자 젓갈 산지로서의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일제 강점기 천일염 생산 단지가 대거 조성되기 전부터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서는 해안 곳곳에서 소금을 만들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고문헌에서 염소(鹽所)[소금 만드는 곳], 염창(鹽倉)[소금 보관 창고], 염분(鹽盆)[소금가마 또는 소금 만드는 곳] 등의 소금 만들기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부안군 제염지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부안현 서쪽에 염소와 염창이 있고, 공사 염간(鹽干)이 모두 1백 13명이다. 봄가을에 바치는 소금이 1천 1백 27석 남짓하다'
 부안현 서쪽은 지금의 부안군 서해안 쪽을 말하는데, 이곳에 소금 만드는 곳과 소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는 뜻이다. 염간은 소금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한다. 
1917년에 측량된 부안 지도에는 모두 9곳의 염전이 표시되어 있으며, 곰소만 제염지는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보안면 신복리, 보안면 유천리 등에 있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염소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소금은 생산 방법에 따라 자염과 천일염으로 나뉜다. 
자염은 바닷물을 농축시켜 이것을 가마솥에서 끓여 내는 방법으로 이를 전오염(煎熬鹽) 또는 자염 제염법(煮鹽製鹽法)이라고도 한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 들여 햇볕과 바람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다. 
한국에서 천일염 제염의 시초는 1907년 인천 주안포에서 시작된다. 그 이후 정부는 단계적으로 천일염 염전을 축조해 나갔다. 제1기에서 제3기까지 축조된 염전지는 경기도와 평안남북도이다. 이 시기까지 전라북도 부안은 천일염보다 자염 생산이 더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57년에 발행한 '부안군지'에는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구진 마을에서는 천일염을 생산하고, 나머지 지역은 토염(土鹽)을 생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곰소 염전은 연평균 1,630t의 천일염을 생산하며 지역 경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주민 20가구가 소금 생산에 참여해 가구당 연평균 1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곰소 천일염으로 젓갈을 담가 판매하는 주민 600여 명이 올리는 매출은 연간 500억원에 달한다. 해수부 지정 전통식품 명인이 제조하는 ‘부안 개암 죽염’도 곰소 염전 천일염을 사용한다. 
곰소지역은 천일염 생산에 최적 조건을 갖췄다. 일조 시간은 연간 2100~2350시간으로, 전국 최고 수준이다. 염전 주변은 해양수산부가 지정한 습지 보호 지역이고, 인근 갯벌은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 주변에 오염원이 없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깨끗한 바닷물이 유입된다. 염전 위생 상태도 전국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선염업 측은 “특수 여과지를 사용해 바닷물에 포함된 미세 플라스틱을 걸러내고 있다”고 밝혔다.
부안군은 천일염업과 관광을 연계하는 ‘6차 산업’ 본고장으로 도약을 꿈꾸고 있다. 1차 산업인 천일염업을 2차 가공산업, 3차 서비스업과 융합해 부가 가치를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곰소 염전엔 연간 4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바둑판 모양의 염전이 변산반도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독특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염전 위로 떨어지는 낙조도 장관을 이룬다. 전통 건축 기법으로 지은 소금창고는 전국 사진작가와 동호인들의 단골 출사지다. 염전 인근 곰소항에는 1960~1970년대 건물이 원형을 유지하며 보존돼 있어 옛 항구 거리의 추억과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
부안군은 104억원을 들여 ‘곰소 소금 테마 거리’를 조성할 예정이다. 바닷물을 퍼올리는 ‘무자위’, 소금을 옮기는 ‘소금 바구니’, 염전틀을 다지는 ‘다대기’, 염도를 측정하는 ‘뽀매’ 등을 전시하는 소금 박물관도 만든다. 권익현 부안군수는 “관광 시설을 보강해 곰소 염전 일대를 체험형 관광지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곰소 염전의 소금은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이는 위생 관리에 만전을 기하기 때문이다. 소금을 만들다 보면 ‘고집 간수’라는 게 나온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얻고 난 뒤 남은 찌꺼기이다. 이 간수를 제때 폐기해야만 품질과 맛이 좋은 소금을 만들 수 있다. 간수를 철저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도 소금에서 쓴맛이 난다. 염부들은 위생적인 식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자염에서 천일염에 이르기까지 부안 곰소의 소금꽃은 지지 않고 쉼 없이 피었다.
고창 삼양염전 
1939년 당시 수당 김연수가 건립한 삼양사 염전은 당시엔 국내 최대 규모 였으나 현재는 염전 산업이 내리막길을 걸으며 일부 염전만 소금을 생산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염전을 따라 길게 늘어선 창고와 건축물은 목조 단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외벽은 비늘판벽으로 마감됐다.
지붕은 목조 트러스 구조에 슬레이트를 얹은 형식. 소금 생산과 유통을 담당한 제염과 사무소는 이전에는 목조 2층이었으나 한국전쟁 와중에 소실되어 1950년대에 신축됐다. 
삼양사의 창업주인 수당 김연수는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당시 부안면 인촌리] 출신으로 1924년 삼수사를 창업, 1927년 줄포에서 처음으로 간척 사업을 시작했다. 
1931년에는 회사 이름을 삼양사로 변경했다. 김연수가 고창군 해리면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6년으로, 해원농사주식회사라는 일본인 회사가 간척 공사권을 따내고도 5년여 동안 방치한 것을 이어받으면서부터였다. 
 1946년 ‘전매 제2호’ 발령으로 민간 염전이 허가되면서 삼양사는 해리염전[삼양염전] 개설 인가를 받았다. 염전 축조 공사는 1947년 3월 시작했으며, 1949년까지 94만 4132.23㎡가 축조되어 그해 처음으로 천일염을 수확하였다. 
현재 존재하는 염전 사무소와 소금 창고는 1939년 김연수가 지은 것으로 당시에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건물 중 일부는 1950년 6·25전쟁 와중에 소실되었으나 이후 신축됐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해리염전은 좌익과 우익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전쟁이 나기 전부터 좌익의 염전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사무소 안에는 청원 경찰이 배치되었다. 1950년 7월부터 인민군 치하에 들어갔다가 9·28 서울 수복으로 삼양사가 다시 운영권을 되찾았으나, 이때부터 1년 동안 염전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접전이 되풀이되는 장소가 되었으며 이 와중에 132명이 사망했다. 
부산에 피난하였던 김연수는 1951년 2월 차남 김상협[전 고려대학교 총장, 국무총리]을 해리 주재이사로 임명, 생산과 염전 확장을 지휘하게 했다. 이때 염전 중앙 수로에 설치한 경비 망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삼양염업사는 1992년부터 삼양염전을 임대 체제로 전환하였는데, 직영 때는 염전 종업원 수가 400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하루 천일염 생산량은 3,000 가마 정도이다. 삼양염전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색상이 순백색이고 알맹이가 굵으며, 6개월 이상 자연 탈수하여 소금 표면에 있는 마그네슘, 수분, 협잡물 등을 없애 품질이 우수하다. 
검당포(黔堂浦)와 검당선사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마을에 있었던 해상 포구 검당포(黔堂浦)는 조선 시대에 농도가 진한 소금물(염탕수)을 큰 솥에 넣고 불을 지펴 다려 만드는 화염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선운사를 창건한 검당선사 또는 화염을 굽는 벌막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검당]와 관련된다는 설이 있다. 
전언에 의하면 1400여 년 전 검당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할 당시 검당포 바닷가에 진흙으로 염정을 만들고 도적들에게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 소금을 구워 살도록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은혜에 보답하여 해마다 선운사에 소금을 바치게 되어, 이를 보은염이라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검당포는 “무장현(茂長縣)의 북쪽 35리에 있다”고 했다. 지금의 심원면 월산리 검당마을의 남서쪽에 에 해당되고[검당포 좌표 N35° 32′ 05.3″, E126° 33′ 07.6″], 부안과 마주하는 곰소만[줄포만]의 남쪽 해변으로 고창군 서쪽 해변에 있으며, 선운사와는 화산마을의 마리재를 넘어 통한다.
일반적으로 염탕수는 힘든 과정을 거쳐 얻게 된다. 소금기를 머금은 갯벌을 수차례 쟁기로 갈아엎어 말린 다음 그 흙을 한곳에 모아 바닷물을 덧 부어 염탕수를 얻는다.
 그러나 검당포에서 염탕수를 얻는 방법은 특별하였다. 검당포에서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연 염정에서 직접 염탕수를 길러다 솥에다 넣고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소금을 굽는 벌막이 여러 곳에 만들어 지고 화염 생산이 번성하게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무장현에 염소(鹽所)가 한곳 있는데, 소금을 굽는 가마[盆]가 30개가 있으며, 무장현의 북쪽 금음당포(今音堂浦)에 있다”고 하였다. 근대 시기 수다동마을의 경우 4개의 가마가 있었던 것에 비하면 검당포는 규모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 기록에 의하면, 검당포 인근 바다에는 염탕수가 천연적으로 나오는 샘[鹽井]이 있었다. 해안에서 2리 정도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었다. 사람들은 바닷물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앞을 다투어 자연 염탕수를 길러다 다려서 소금을 만들었다[鹽井 在黔堂浦入海二里許 其水白而醎 土人俟潮退 用桔槹汲之煮而 爲鹽].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 이익을 얻는 데는 오직 검당포 뿐이라고 했다.
현재 검당마을 남서쪽 바다는 간척되어 ‘샘바다들’이라고 하는 들판이 되었는데 염정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며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수다동마을에서도 전한다. 검당포에서는 꼭지만 틀면 염탕수가 쏟아져 나왔고 그 물로 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선운사의 검당선사가 와서 진흙으로 염탕수가 나오는 구멍을 막아버려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언제부인지 보은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염정에는 해수찜 목욕탕이 지어졌다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기록이 있다. 1448년(세종 30) 전라도 감사의 요청에 의하여 “무장현의 염정에 목욕간(沐浴間)을 지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목욕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 1538년(중종 33)에 계림군(桂林君) 유(瑠)가 무장현의 목욕간으로 목욕하러 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 두 건의 기록과 관련한 내용은 전언에서도 확인된다. 검당포의 남쪽에 있는 월산마을 동남쪽에 욕실촌이 있었고 검당선사가 목욕을 했던 곳이라고 주민들이 전하고 있다. 문헌 기록에 보이는 염정과 목욕간일 가능성이 높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무장현에 약수향(藥水鄕)이라는 향, 소, 부곡이 있었는데 “염정을 약수(藥水)라 칭한다.”고 하여 금당마을이 약수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에 산림보호법의 시행으로 땔감을 구하기가 어렵게 된데다 천일염 제조법이 일반화되면서 경쟁력을 상실하여 폐업되면서 생산이 중단되었다. 따라서 현재 검당포에서는 소금이 생산되지 않으며 주변 바다 또한 간척되어 포구 흔적도 없다.
검당마을은 옛길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 길’로 연결되었다. 전체 길이가 43.7km인 100리길은 제1코스에서 4코스까지 있다. 검당은 4코스로 검당소금전시관에서 선운산관광안내소까지의 12.7km 거리의 '천오백년 화염의 역사가 살아있는 선운산 보은길'이다. 이 길은 전국적으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길이다. 검당소금전시관의 활용대책을 시급히 마련했으면 한다.
 바다와 바람과 햇빛이 빚어낸 하늘이 준 소금은 염부들의 수천, 수만 번의 손길과 땀방울이 아니고서는 피워낼 수 없는 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