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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27> 운제현(화산, 운주)의 비 피해와 이규보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27> 운제현(화산, 운주)의 비 피해와 이규보

완주군 운주면 엄목마을은 지난 10일 내린 폭우로 장선천이 범람하면서 무너진 제방을 긴급 복구하고 보수공사를 진행중이다.

중촌마을 주민들은 운주면 행정복지센터에 마련된 임시거처에서 잠을 청하고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가 침수된 집기와 가전제품을 거리로 내놓으며 정리중이다.

긴급 투입된 소방과 자원봉사자 등은 거리에 쌓인 흙을 씻어내고 집기를 치우는 등 복구 작업에 동참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집중호우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한 전북 완주군 등 5개 지방자치단체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지자체는 완주군을 비롯해 충북 영동군, 충남 논산시·서천군, 경북 영양군 입암면 등이다.

군은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내린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입어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됐다.

군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서 공공시설 복구비 추가지원을 받게 됐고, 피해 주민들에게 12개 항목이 추가된 모두 30개의 간접지원이 가능하게 됐다. 

간접지원 항목은 건강보험료, 전기료, 통신요금, 도시가스, 지역난방요금, 고용보험료 감면, 예비군 훈련면제 등이다. 

군은 집중호우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과 농업·임업·소상공인 등의 일상회복을 위해 재난지원금도 조기 지급할 계획이다. 또, 재난예비비 31억 원을 긴급 투입해 이재민 구호, 응급복구에 최선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군은 주민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피해조사를 면밀하고도 신속히 진행하면서 특별재난지역으로 포함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완주군에는 평균 180.1㎜의 비가 내렸으며, 중앙재난피해합동조사 결과 피해액은 2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459명의 이재민도 발생했으며, 13일 오후 3시 기준 398명이 귀가하고, 미귀가자는 61명이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고려 때 전주목 사록(司錄)을 하다 떠난 뒤 ‘운제현’에서 홍수가 났다는 말을 듣는다. 

‘운제는 내가 전에 다스리던 완산(完山)의 속군(屬郡)이다. 그 고을이 암곡(巖谷) 사이에 있어 산이 높고 험하기로는 다른 군에 비하여 으뜸이고 또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지도 않았는데, 하루저녁 장맛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소용돌이 쳐서 한 고을이 몽땅 떠내려갔으므로 죽은 이민(吏民)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나무 위에 올라가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이 열에 한둘 정도였다 한다. 완산의 옛 관리가 와서 나를 찾아보고 경위를 자세히 들어 말하고서 ‘이 고을에는 옛적부터 일찍이 이와 같은 피해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이런 일이 있으니, 이 무슨 재변입니까?’ 하므로, 내가 측은하게 감탄하면서 시를 지어 애도했다'

운제현(雲梯縣)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완주군 화산면, 운주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통치구역이다. 

운주면은 옛 운제현의 동쪽이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대에 백제의 지벌지현(只伐只縣)을 바꾼 이름으로 고려시대에 운제현이라 불렸다. 1392년(태조1년)에 고산현에 통합됐다. 그는 칠월 삼일 ‘운제현’ 에 큰물이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었다. 

‘(중략)내가 일찍이 운제를 보니 바로 산 속에 있었네 산은 백 길이나 높았으며 흙탕물이 닿지 않는 곳이요 곁에는 한 가닥 냇물도 없었는데 큰 물이 어디로부터 밀어닥쳤을까 설사 하늘에까지 창일하는 수재가 있을지라도 산에 의지하면 오히려 피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올해의 비는 평지에서도 겨우 한 자 남짓 했음에랴 강 곁의 여러 고을도 떠내려간 집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산 속 고을이 도리어 물고기 집으로 변하였는가 처음 듣고는 미덥지 못하여 혼자 마음으로 그럴 리가 없다 하였는데 오늘 아침 옛 관리 만나서야 자초 경위를 자세히 알았네 물이 산을 덮친 것이 아닌 산이 예측 밖의 물을 토하여 비유컨대 지붕에 물병을 세우고 아래로 쏟는 형세와 같아 중지시키기 어려웠다네. 어찌 가장 높은 봉우리에 나는 새가 앉을 만한 곳이 없었으랴마는 물이 산으로부터 쏟아졌으니 올라갈 길을 어느 겨를에 찾겠는가. 오직 오래된 고목나무 가지가 높아서 자못 믿을 만하여 빠른 사람은 가장 먼저 올라가 원숭이처럼 까마득히 매달려 있고 느린 사람은 올라가지 못한 채 물에 빠져 푸푸거리며 놀란 눈알 희번덕거렸으니 하물며 파리하고 약한 사람이랴 마름같이 떠서 물결따라 떠내려 가다가 돌에 받쳐 으깨어지기도 하고 뗏목따라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기도 하였네 비 그치고 물결 다시 마르니 그 혼란한 상황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그중에 교활한 아전들이야 비록 죽더라도 이치에 당연한 것이 평소에 그 얼마나 침탈하여 백성의 고혈로 제 몸 살찌웠던가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이야 무슨 죄인가 하늘의 뜻 참으로 모르겠네 우 임금 다시 나지 않으니 늙은이 부질없이 눈물만 흘리네’

옛날 신라가 백제를 이기고 이 땅을 점령해 ‘운제현(雲梯縣)’이라 했다. 그는 아전의 ‘행위’가 나빴기 때문에 행장을 숨겨야 했지만 그대로 썼다. 

그는 ‘남행월일기’를 통해서도 운제현 사연을 적었다. 

그는 '산을 감돌아 운제까지 갔고, 운제를 지나 고산까지 가는 데는 길이 좁고 고개가 만 길이나 높이 솟아 있어 말을 타고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옛사람의 격식을 따르지 않고 거침없이 종횡으로 치달려서 그 기세가 끝도 없이 크게 펼쳐졌으며, 당시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려사’ 이규보열전)

고려사에 실린 이규보의 문장에 대한 평가다. 짤막하지만 시와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외교 문서 작성을 도맡은 이에게 걸맞은 찬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규보가 살다 간 시기 고려는 무신 정권과 대몽 항쟁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황이었다.

그의 인생 역시 거침없는 글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찍부터 문재를 드러냈지만 과거에 몇 차례 낙방했다. 23세에 급제한 후 주변의 추천과 자신의 구직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임용되지 못했다. 

32세인 1199년 6월 비로소 전주목 사록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1202년 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병부 녹사 겸 수제원으로 종군해 1204년 3월 개선하는 군대와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 제외됐다. 이후 해마다 첫 번째로 추천을 받고 칭찬하는 이도 많았으나 관직을 얻지 못했다.

1207년 한림이 된 이후에야 중앙 여러 관직을 거치며 오랫동안 국가의 문장을 담당했다. 재상의 반열인 종1품까지 승진해 1237년 70세로 치사했다. 63세에 잠시 부안의 위도로 귀양 간 일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고 할 만하다.

운제현 일대는 이번에도 비 피해를 입은 바 빠른 복구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