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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익산 다듬재(아리랑고개)와 19세기 여산의 치등(峙登) 주막과 시암(杮岩) 주점과


 

 

춘향전'에서 어사또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내려갈 때 서리와 역졸들에게 '전라도 초입(初入), 여산읍에 가서 기다려라.'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전라도 초입이라고 한 여산읍이 바로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가 있는 오늘의 여산면으로, 충청남도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오는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춘향전의 춘향로(또는 남원길, 한양에서 남원까지)는 자그만치 약 630여 리에 이른다. 숭례문에서 시작, 칠패,팔패-이문동-도제골-쪽다리-청파배다리-돌모루-밥전거리-모래톱-동재기(동작진)-승방들-남태령-인덕원-갈미-사근내-군포내-미륵당-지지대-참나무정이-교구정-팔달문-상류천-하류천-대황교-진겨골-떡전거리(병점)-중밋오밋(중미현)-진위-칠원-소새비들-천안삼거리-김제역-덕정-원터-광정-활원-모로원-새술막-공주금강-경천-노성-은진닥다리-황화정-능기울-여산관-삼례역-고산-전주-남천교-반석(半石)-한벽루-좋은목-만마동-노고바위-임실관-오수참(獒樹站)-남원까지다.

이 가운데 왕궁저수지 쪽 799번 지방도로 접어드니 바로 동용리 용남마을이다. 이곳은 춘향전의 이몽룡이 금의환향하며 쉬어 갔다는 마을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마방집터(능줄 서쪽에 있는 터)와 흥암리의 통시암, 그리고 이몽룡이 역졸을 배치했다는 원수리 새술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금마면(신용리)과 낭산면을 잇는 다듬재(아리랑고개). 삼남대로에 속해 있으며, 이몽룡의 과거길이다.

조선시대에는 9개의 큰 길이 있었다. 작은 길이나 지방과 지방을 잇는 길은 많았지만 이름을 붙여 역이나 관을 설치하던 곳은 모두 9개였던 셈이다.

1로 의주대로, 2로 관북대로, 3로 관동대로, 4로 영남대로, 5로 죽령로, 6로 춘향길, 7로 호서대로, 8로 삼남대로(한양-천안-삼례-제주), 9로 강화대로 등이다. 삼남대로 458 km 가운데 전북은 정읍-태인 16km, 태인-원평-금구현-이서-삼례 38km, 삼례-왕궁-여산군-충남 연무 30km 80km에 이른다.

다듬재는 점령, 뚜디딜재, 다디미재, 아리랑고개로 금마면 신용리에 위치, 구룡(독쟁이)에서 산북리의 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또는 왕궁면 흥암리 신흥에서 광암리 상암으로 가는 고개란다.

다듬잇돌이 많아 생산됐다고 해서 이처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지만 지도상엔 다듬재로 나온다.

먼 옛날 한양으로 통하는 삼남대로(三南大路)였으니 청운의 과거급제의 꿈을 안고 북상했던 선조들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하다.

도로의 폭이 불과 몇십 미터에 불과한 평범한 언덕이지만 아주 길고 자꾸만 꾸불거린다. 아주 먼 옛날에는 사인교가 교행할 수 있었던 아주 큰길이었겠지만 지금은 소형 자동차 두 대가 서로 비켜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 2차선으로 포장된 이 길은 옛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있는 채 마음을 다잡고 넘어야 하는 산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활엽수림 사이로 푸른 하늘이 터져 있어 걷기에 기분마저 상쾌하다. 비록 산신에게 '입산신고'를 하고 여행길의 안전을 비는 성황당은 없지만 옛 사람들의 생각을 반추해본다.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을 떠올리며 내일의 희망을 염원을 하고 있으니.

금마면과 낭산면을 잇는 다듬재 정상. 과거에는 도적이 출몰했을 법한 인적 드문 숲길. 그러나 지금은 평화롭고 아늑하기만 하다. 송림의 끝에는 험한 길을 뚫고 나온 나그네를 반겨주었을 옛 주막촌 등의 모습은 예상대로 보이질 않는다.

 

서행록(西行錄) / 1823(계미) / 419

 

새벽에 출발하여 *노성(魯城) 읍내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황화정(皇華亭)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여산면 '치등(峙登) 주막' 어귀에 이르러 나는 성묘하기 위해 시조의 묘소에 들어갔다. 동행은 먼저 능측(陵側)으로 가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성묘한 뒤 성묘록(省墓錄)에 이름을 쓰고 급히 능측으로 갔다. 동행이 오지 않아서 몹시 기다리던 중에 날이 저어서야 강()과 송() 두 벗이 왔다. 다른 동행은 마병(馬病)으로 오지 못해서, 두 벗과 묵었다. 100리를 갔다

 

'서행록(西行錄)'은 전남 고흥군에 사는 송정악(宋廷岳, 1697~1775), 송지행(宋志行, 1741~1802), 송석년(宋錫年, 1778~1842)이 당대 절의가 있는 벼슬아치와 석학들에게 선조의 묘문(墓文)을 부탁하기 위해 경기도 및 서울 일대를 왕복하면서 기록한 기행 일기이다.

 

'서행(西行)'이란 뜻은 곧 '서울에 간다'는 의미이다.

 

조선후기 3()의 기행일기로, 서행록 속에는 1744년부터 1839년까지 약 100년간 3대의 다양한 여행이 담겨 있으며, 296수에 이르는 많은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고흥 여산송씨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행록'은 기행일기로, 중앙 관료로 출사하기 어려운 18세기 이후에 송간, 송대립, 송심 등 선조들의 충절을 강조함으로써 향반으로서 위상을 드러낼 수 있었다.

 

*'노성(魯城)'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지명이다. 지명 유래는 이산현의 지형이 공자가 탄생한 중국 노나라 이구산(尼丘山)의 지형과 비슷하다 하여 ''()자를 따고 이산(尼山)의 성을 상징하는 ''자를 따서 노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황화정(皇華亭)'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에 해당한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 땅이 아니라 전라도 여산읍(익산의 옛 지명) 소속이었다.

임금으로부터 전라도관찰사로 제수받으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 지역인 여산 황화정에서 신·구 임무교대식인 교귀식(交龜式)을 치르고 전주 조경묘에 숙배(肅拜)하는 것이 순서였다. 때로는 활터로도 이용했으며 현재는 비석만 남아 있다.

 

十九日

 

曉發抵魯城邑內朝飯抵皇華亭午飯至峙登酒幕前, 余則省墓次, 入始祖墓所, 同行則先行約以陵側, 故省墓後, 書名省墓錄, 急往陵側, 則同行不來, 故苦待中, 暮時姜宋兩友來他同行則以馬病不來, 只與兩友留宿行百里

 

서행록(西行錄) / 1821(신사) 121

 

'아침 전에 길을 나서 '치등(峙登) 주막'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은진(恩津) 삼거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다음, 길을 나서 몇 리를 채 못 가서 앞에 큰 내를 만났다. 내를 건널 때에 김노(金奴)가 발을 헛디뎌 등에 짊어졌던 짐이 반이나 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가까스로 천변으로 나와 손으로 젖은 옷을 짜서 볕에 말리고 행낭(行囊)에 있던 남은 바지로 갈아입었으니, 그간의 실상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간신히 연산(連山) 중개태(中開泰)에 이르러서 묵었다. 50리를 갔다.

 

初吉

 

朝前發程, 抵峙登酒幕朝飯抵恩津三巨里中火, 仍爲發行, 未數里前當大川越川之時, 金奴失足, 背上負卜爲水半流艱出川邊, 笮手燎衣, 而換着行橐之留袴, 其間實狀, 不可盡詳艱抵連山 中開泰留宿行五十里

 

한편 '신사년(辛巳,1821) 11

11일 기록을 보면, 익산 부근에 시암(杮岩) 주점이 있었다.

 

'아침을 먹고 새벽에 출발했다. 은진(恩津) 삼거리(三巨里) 주막에 이르러 시내를 건널 때에 대석(臺石)이 얼어 있어 있는 바람에 발이 미끄러져 물에 빠졌는데, 물이 무릎 위까지 차올라 옷이 모두 젖어버렸다. 겨우 냇가로 나왔으나 땅도 얼어 있었다. 이런 혹한에 해도 뜨기 전에 이런 변고를 만났으니, 어찌하여 이번 길에 나와 노복으로 하여금 왕래함에 이처럼 낭패의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간신히 1리를 갔는데, 젖은 옷이 굳어가고 발이 너무 시려서 걸을 수 없기에 버선을 벗으려고 하니 손가락이 굳어 벗을 수가 없었다. 노복을 시켜 간신히 벗고 얼어버린 버선을 새 버선으로 바꾸어 신었으니, 행로의 어려운 실상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시암(杮岩) 주점'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요기를 하고 전주 삼례(參禮)에 이르러 묵었다. 90리를 갔다

 

十一日. 仍朝飯曉發, 抵恩津三巨里酒幕後. 越川之際, 臺石凍滑, 失足立水, 水過膝上, 衣下盡濕. 才出川邊, 卽地旋凍, 當此極寒, 朝前逢此變, 如何此 行使我奴主往來, 致敗至於此境耶?艱行一里, 濕衣堅動, 脚足甚寒, 不能行 步, 故欲脫襪子, 則指直不得脫. 使奴者艱脫, 凍襪換着新襪, 則行路之艱狀, 不可言. 抵杮岩酒店, 暫憩療飢, 抵全州 參禮留宿. 行九十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도 존재했던 가운데, 최후의 주막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삼강주막이었다. 이름 '삼강'처럼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강나루에 1900년경 등장한 삼강주막은 1934년 경술홍수 때 무너져 방 2, 부엌 1, 청마루 1칸에 15평짜리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는 유옥련이었다. 1917년생인 그는 1932년 네 살 위 남편과 혼인하고 1936년 삼강주막의 영업을 이어받았다. 삼강주막은 일제 말기까지 소금배 상인과 보부상이 주요 고객이었고, 소금배가 끊긴 뒤에는 강을 건너 읍내와 서울, 대구 등으로 가려는 주민과 과객들로 붐볐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다리가 놓이고 제방이 생기면서 인적이 끊어졌다. 새마을운동 당시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보수된 집을 이후 황토벽의 초가집으로 재건축해 오늘날 관광지 노릇을 하고 있다.

 

삼강주막이 사라지면서 주막의 맥은 끊겼다. 한편 조선 말기부터 음식점과 주점은 점차 분화되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걸러 낸 술지게미를 다시 우려낸 모주와 비지찌개를 파는 노상주점, 생활이 궁핍한 여염집 아낙네나 과수댁이 손님과 직접 얼굴을 대하지 않고 술상만 내어 주는 내외주점, 목로(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에 안주를 늘어놓고 술을 파는 목로주점, 선 채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 먹는 선술집 등이 생겨났다.

 

한국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국밥 한 뚝배기를 떠올린다. 뜨뜻한 국물과 밥의 조화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렇게 국밥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막도 상기하게 된다. 굳이 사극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국밥=주막'이라는 등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각인되어 있다. 국밥에 모주, 설설 끓어 등과 허리를 지질 수 있는 아랫목까지낭만화된 주막의 정형을 우리는 품고 산다.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나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를 읽다보면 이 땅의 어머니들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강원도 산비탈에서 밭을 일구고, 충청도 천수답에서 모내기를 하고, 노량진 산동네서 두부장수로 나섰던 억척어멈들. 여자이기에 앞서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이길 원했던 그네들의 희생은 눈물겹다. 선창가 목로주점 주모 또한 억척어멈이었을 게다. 순식간에 횟감을 뜨고 솜씨 좋게 매운탕 끓여내는 주모 앞에서 험한 뱃사람들조차 꼼짝하지 못했으리라. 멱살잡이 하던 사내들에게 눈 한 번 부릅뜨면 슬슬 꼬리 감추며 자리 털고 일어났으리라. 너무 예쁜 엄마들이 넘쳐나는 오늘, 문득 억척어멈이 그리워지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주막의 정겨움이 떠오른다. 사람냄새 풀풀 풍기는 사람들이 그립다.

 

익산 아리랑고개(다듬재)

'춘향전'에서 어사또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내려갈 때 서리와 역졸들에게 '전라도 초입(初入), 여산읍에 가서 기다려라.'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전라도 초입이라고 한 여산읍이 바로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가 있는 오늘의 여산면으로, 충청남도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오는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춘향전의 춘향로(또는 남원길, 한양에서 남원까지)는 자그만치 약 6백30여 리에 이른다. 숭례문에서 시작, 칠패,팔패-이문동-도제골-쪽다리-청파배다리-돌모루-밥전거리-모래톱-동재기(동작진)-승방들-남태령-인덕원-갈미-사근내-군포내-미륵당-지지대-참나무정이-교구정-팔달문-상류천-하류천-대황교-진겨골-떡전거리(병점)-중밋오밋(중미현)-진위-칠원-소새비들-천안삼거리-김제역-덕정-원터-광정-활원-모로원-새술막-공주금강-경천-노성-은진닥다리-황화정-능기울-여산관-삼례역-고산-전주-남천교-반석(半石)말-한벽루-좋은목-만마동-노고바위-임실관-오수참(獒樹站)-남원까지다.

 이 가운데 왕궁저수지 쪽 799번 지방도로 접어드니 바로 동용리 용남마을이다. 이곳은 춘향전의 이몽룡이 금의환향하며 쉬어 갔다는 마을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마방집터(능줄 서쪽에 있는 터)와 흥암리의 통시암, 그리고 이몽룡이 역졸을 배치했다는 원수리 새술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금마면(신용리)과 낭산면을 잇는 다듬재(아리랑고개). 삼남대로에 속해 있으며, 이몽룡의 과거길이다.

 조선시대에는 9개의 큰 길이 있었다. 작은 길이나 지방과 지방을 잇는 길은 많았지만 이름을 붙여 역이나 관을 설치하던 곳은 모두 9개였던 셈이다.

 제1로 의주대로, 제2로 관북대로, 제3로 관동대로, 제4로 영남대로, 제5로 죽령로, 제6로 춘향길, 제7로 호서대로, 제8로 삼남대로(한양-천안-삼례-제주), 제9로 강화대로 등이다. 삼남대로 458 km 가운데 전북은 정읍-태인 16km, 태인-원평-금구현-이서-삼례 38km, 삼례-왕궁-여산군-충남 연무 30km 등 80여 km에 이른다.

 
 다듬재는 점령, 뚜디딜재, 다디미재, 아리랑고개로 금마면 신용리에 위치, 구룡(독쟁이)에서 산북리의 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또는 왕궁면 흥암리 신흥에서 광암리 상암으로 가는 고개란다.

 다듬잇돌이 많아 생산됐다고 해서 이처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지만 지도상엔 다듬재로 나온다.

 먼 옛날 한양으로 통하는 삼남대로(三南大路)였으니 청운의 과거급제의 꿈을 안고 북상했던 선조들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하다.

 도로의 폭이 불과 몇십 미터에 불과한 평범한 언덕이지만 아주 길고 자꾸만 꾸불거린다.

 아주 먼 옛날에는 사인교가 교행할 수 있었던 아주 큰길이었겠지만 지금은 소형 자동차 두 대가 서로 비켜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 2차선으로 포장된 이 길은 옛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있는 채 마음을 다잡고 넘어야 하는 산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활엽수림 사이로 푸른 하늘이 터져 있어 걷기에 기분마저 상쾌하다. 비록 산신에게 '입산신고'를 하고 여행길의 안전을 비는 성황당은 없지만 옛 사람들의 생각을 반추해본다.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을 떠올리며 내일의 희망을 염원을 하고 있으니.

 금마면과 낭산면을 잇는 다듬재 정상. 과거에는 도적이 출몰했을 법한 인적 드문 숲길. 그러나 지금은 평화롭고 아늑하기만 하다. 송림의 끝에는 험한 길을 뚫고 나온 나그네를 반겨주었을 옛 주막촌 등의 모습은 예상대로 보이질 않는다.

  이윽고 수원백씨세천(水原白氏世阡)이라 음각한 비석이 보인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 '조수보호구역'이었다.

 이 지역은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조수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으로, 보호구명칭은 서식지구보호구, 구역은 금마면 신용리 산 124-1 외 82 필 3백30ha, 존속 기간은 1998년 1월 1일부터 2007년 12월 31일로 야생동물을 잡거나 번식기에 무단침입한 때에는 관계 법령에 의하여 처벌된다는 문구를 보지 않았던가.

 또 하나, 미륵산 휴식년제 실시 안내 현수막도 본 적이 있다. 2004년 3월부터 2006년 2월까지 2년 동안 미륵산 탐방은 정비사업 실시로 휴식년제(교원연수원 3km-정상, 심곡사 0.6km-정상)를 실시하므로 등산을 삼가달라는 내용이 적혔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륵산(4백30.2m)은 익산 중심지 부근에 가까이 있는 터에 평일 하루 평균 2천여 명, 주말과 휴일 5천여 명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다 보니 곳곳에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나고 사람들의 발에 채여 심하게 침식되어 있는데다가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더욱 깊게 패이게 되는 등 문제가 발생, 응급처지를 받는 운명에 처해지게 됐다.

 미륵산과 용화산, 그리고 군산훈련장 바로 옆에 마한의 기준(箕準)이 쌓았다는 기준성(익산산성) 등이 보호를 받고 있는 까닭이다.

 특히 미륵산은 풍수적 입장에서 보면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쥐가 풍요로운 대지를 향해 만찬을 즐기는 형국을 취하면서, 바로 그 아래 명당 터에 미륵사지(미륵사지 뒤편)를 낳게 했다.

  남쪽 아래 에 있는 사적 제150호 미륵사지는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당간지주(보물 제236호) 등이 보존, 석가모니가 입적 후 56억7천만년 후에 환생하여 모든 세상을 극락정토로 만든다는 믿음 때문에 지금도 많은 불신자들에게는 기다림(희망)의 땅으로 알려지면서 찾는 이들의 발길이 계속되고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해체조사가 시작돼 이미 1층만 남기고 모두 해체된 상태로, 조사가 완료되면 이를 바탕으로 보수 및 복원 계획을 수립하게 될 운명이다.

  다듬재에 올라보면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얘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세 번의 설법을 통하여 모든 중생을 고통과 슬픔이 없는 낙원세계(龍華世界)으로 인도한다고 한다는 굳은 믿음. 미륵이 하생(下生)할 곳은 땅이 사금(砂金)으로 덮혀 있다고 하니 바로 그곳이 금마(金馬)가 아닐까.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오금산(五金山)에서 마를 캐면서 쌓아두었다는 금은 바로 이것과 관련한다고 볼 수 있다는 상상이다.

 나그네의 어린 시절, 회심(悔心)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이 여름밤 아스란히 들려오던 다듬이 소리는 지금도 내 맘에 또닥또닥, 작은 공명(共鳴)이 되어 언제나 포근하고도 정겨운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미니박스: 다듬재 일대의 다른 사연들

 금마면 신룡리 구룡 마을의 뒷산에 뜬 바위(浮石)가 있다. 옛날에 어떤 힘센 장수가 이곳을 지내가다가 근처의 바위를 발견하고 그걸 집어다가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아래쪽 바위와 위쪽 바위가 딱 붙게 올려놓은 것이 아니고 사이가 좀 뜨게 놓아졌기 때문에 뜬 바위라고 부른다. 평소에는 위의 바위와 아래 바위가 딱 닿아 있지만, 섣달 그믐날이 오면 사이가 떠서 동네 사람이 실을 양쪽에서 팽팽히 쥐고 위아래 사이에 끼어 넣고 잡아 당겨보면 실이 전혀 걸리지 않고 빠져나오는 걸 본다는 것이다.

 이 부근엔 익산 백제토기 도요지(전라북도 기념물 제14호)도 있다. 백제 시대 질그릇을 만들던 가마터가 만아 있다고 알려져 왔는데, 1987년 봄 전주 시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함으로써 그 구조와 가마의 성격이 밝혀졌다. 수습된 유물로 입큰단지, 세발토기, 독 등 질그릇뿐이었지만 가마는 6세기경의 가마터인 스에무라 가마의 구조와 유사성이 많아 백제 토기 제작 기술이 일본에 전파된 일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