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25> 최초로 태산가(泰山歌)'를 지은 정읍선비 이항.... 이항의 태산가와 양사언의 태산가
필자는 '태산가(泰山歌)' 의 원작가가 양사언이 아닐 수 있다. 양사언이 이항의 시를 보고 이를 개작할 수 있다고 본다. 작품 내용이 흡사하며 생존 연대가 이항(李恒, 1499~1576)이 양사언(楊士彦, 1517년 ~ 1584년)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또 이항의 작품은 5언 시로, 양사언의 시는 7언 시로 읊은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태산가의 원조는 이항의 작품이었을 수 있다고 본다. 왜 일까.
필자는 한국학호남진흥원(원장 홍영기)이 지난 4일 오후 1시 30분 정읍시청 대회의실에서 ‘일재(一齋) 이항의 학문과 사상’을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이항과 정읍 남고서원 문화콘텐츠 활용 방안’을 통해 이같이 발표했다.
일재 이항은 호남에서 성리학을 키우고 정립했던 도학자다.
그의 문집 ‘일재집’은 사후 100여년이 지난 1673년 시문집으로 발간된 바 있다. 그는 당대 대학자인 기대승, 김인후 등과 교유하며 후학 양성과 학문발전에 이바지했다
이항은 조선 성리학의 발달과 진왜란 극복에 큰 영향을 끼친 16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대학자였다.
임진왜란 때 온 몸으로 나라의 국난을 극복한 문인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태인 출신 안의, 손홍록은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 태조어진 등을 내장산으로 옮겨 지켰고,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나주 출신 건재 김천일, 웅치전투에 참가한 고부 출신 오봉 김제민, 남원에서 창의한 도탄 변사정, 용인전투에서 전사해 정읍 모충사(慕忠祠)에 배향된 백광언, 양산숙, 김후진, 김복억, 김대립, 소산복, 안창국, 이수일 등 임진왜란에 혁혁한 공을 세운 많은 이들이 그의 문인이라는 점이다.
무성서원에서 직선거리로 7km 남짓 떨어진 정읍시 북면 보림리 일원엔 일재 선생을 제향한 남고서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일재 이항 묘소와 묘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46호), 강학공간이었던 보림정사 터 등 관련 유적이 확인된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대학'을 위주로 공부하기를 권했다.
대학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하면 도의 요체에 접근하고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선생의 학문을 권면하는 정신이 '태산가'와 '시김군영정'에 잘 담겨있다.
先生嘗作歌 講業之暇 使諸生歌之 以爲勤勉與起之資
歌曰
誰云泰山高
自是天下山
登登復登登
自可到上頭
人旣不自登
每言泰山高
선생이 일찍이 노래를 지어 학문을 강습하고 남은 겨를에 틈틈이 제자들에게 학문 의용을 고취시키고 힘써 권장하려는 자료로 이 노래 부르게 했다.
양사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이 ‘태산가’가 일재 이항의 작품이다.
그 근거는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이 1747년에 쓴 '고가신번이십구장(古歌新飜二十九章)'에 한문으로 싣고 일재가 지은 노래로 전해진다.
또, 남고서원(南皐書院) 강수재(講修齋)의 주련(柱聯)에도 이 한시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1759년 추간한 '일재선생집속록(一齋先生集續錄)'의 ‘유사(遺事)’에 이가 실려 전한다고 한다.
이 시의 주제는 ‘학문하는 사람이 수행하여 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라’는 뜻이다.
이항(李恒)선생이 지은 태산가(泰山歌)
수운태산고(誰云泰山高)
자시천하산(自是天下山)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등등부등등(登登復登登)
자가도상두(自可到上頭)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인기불자등(人旣不自登)
매언태산고(每言泰山高)
사람이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楊士彦)의 태산가(泰山歌)
태산수고시역산 (泰山雖高是亦山)
태산이 비록 높다하니 이 또한 산이니
등등불이유하난 (登登不已有何難)
오르고 올라 그치지 아니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으리오
세인불긍노신력 (世人不肯勞身力)
사람이 몸으로 노력하지 아니하고
지도산고불가반 (只道山高不可攀)
다만 산이 높아 오를 수 없다고 말하네
남고서원은 선조10년(1577년)에 창건, 일제 이항선생과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천일(金千鎰) 선생 두 분을 배향하고 있고 조선 숙종 11년(1685년)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그래서 이 서원의 강수재 주련(柱聯)에는 조선 중기 양사언이 썼다고 알려지고 있는 '태산가(泰山歌)'가 적혀 있으나 학계에서는 이 시가 일제 이항의 시일지도 모른다고 점쳐지고 있다.
이항의 유품에 해당하는 벼루가 현재는 없어졌지만 이 벼루에도 '태산가'가 새겨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 근거가 된다.
선생은 똑같은 주제로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었다.
시김군영정(示金君永貞)
욕관홍수수창해(欲觀洪水須滄海)
여견명구상태산(如見名區上泰山)
대장불위폐승흑(大匠不爲廢繩黑)
통명성학량비난(通明聖學諒非難)
홍수를 보고자 하면 모름지기 창해가 필요하고,
이름난 곳을 볼 것 같으면 태산에 올라가야지.
이름난 장인은 먹줄을 놓지 아니하는 법, 성학(聖學)을 통하여 밝히는 일은 진실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네.
선생의 강마소(講磨所)는 태인 분동에 내려 온 일재 이항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했던 장소를 가리기 위해 1881년 그의 후손과 유림이 바위에 ‘문경공일재선생강마소(文敬公一齋先生講磨所)’라 새겼다고 한다.
강마소는 현재 정읍시 북면 보림리 보림사 내에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 말사인 보림사는 864년 통일신라 경문왕때 보조체징선사가 800여 제자중 가장아끼던 청환법사에게 명해 지은 절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보림’이라는 이름은 청환법사가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이라 불리는 전남장흥의 보림사에 주석했던데서 연유하고 있다.
정읍시 북면 보림리 입점마을은 칠보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이다.그러나 수려한 산세를 배경으로 선생을 비롯한 이 지역 선비들의 학문의 도장이었던 남고서원(전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과 천년고찰인 보림사(전통사찰 제96호)가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사설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서원은 사액(賜額)이 되면 면세와 면역은 물론 임금이 현판 글씨와 노비, 전답을 하사하고 서적을 내려 보내기 때문에 당시 서원들은 사액을 받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에 서원이 증가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전북특별치도에 사액 서원 수는 정읍이 가장 많은 4개소이며 무주, 부안, 순창, 장수는 사액서원이 1개소도 존재하지 않은 지역이다.
남고서원은 북쪽으로 흘러 동진강으로 들어가는 보림천의 발원지 석심막골 안쪽 관동마을경로회관을 지나면 있다.
홍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관리사 건물이 있고, 왼쪽에는 최근들너 전통예절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남고학당(南皐學堂)이 있다. 서원의 정문에는 남고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솟을삼문으로 세워진 외삼문이 있다.
현재 건물은 강당 강수재(講修齋)와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사우(祠宇)인 문경사(文敬祠)가 남아있다.
강수재는 잡석의 축대 위에 세워진 전면 4칸, 옆면 3칸의 강당으로 가운데의 2칸은 대청이며, 좌우에는 방을 두었다.
남고서원은 1577년에 창건,168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1871년 폐쇄되었다가 1899년 유림들에 의해 강수재가 설립되고, 1927년 중건했다. 1970년에 서원을 다시 고쳐지었고, 1975년 문화재로 지정되어 1977년에 단청을 입혔다.
남고서원에서는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각각 제사를 드린다. 소병돈씨가 남고서원장을 맡고 있다.
두 마리의 거북이가 문을 지키고 있는 솟을삼문으로 세워진 외삼문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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