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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주 한계서원과 만암 이상진의 정신을 살려야


전주 한옥마을 교동사무소 인근(향교길23)에 ‘하늘 물고기 아트’ 오픈을 앞둔 명경 최영숙작가는 전국의 화가들을 홍보함은 물론 판매에 주안점을 두고 운영할 계획임을 천명했다. '아트' 바로 옆엔 하늘 물고기를 꿈꾸면서 조선조에 우의정을 지낸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 1614~1690)선생이 심었다는 회화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하늘 물고기'를 테마로 작품을 하고 있는 3인방이 있다. 전주와 함양 등에서 활동하는 최영숙작가는 그림과 나무로, 경주의 김종대작가는 나무로, 전주의 윤재훈작가는 쇠떵어리로 '하늘 물고기'를 만들고 있단다.

'가리장송(可李場宋)'은 전주 금상동 가소(可所)마을로 숙종때 우의정까지 지낸 만암 이상진과 익산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 출신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1555∼1620년)를 의미, 호남의 명문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전주 금상동의 '금상(今上)'의 의미가 '현재 왕위에 있는 임금'으로 원금상마을의 회안대군묘(조선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름 방간)에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가소(可所)마을은 숙종때 우의정까지 지낸 이상진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원사송찬(院祠頌讚, 지은이 오남 이종관)은 전국 135개의 서원과 사우(祠宇)를 주제로 지은 한시가 소개됐다.

 

'전주를 찾아가니 때는 마침 첫 겨울인데 한계서원(漢溪書院)에 저녁 종이 울리는구나. 청백리로 녹선되어 가난을 즐기는 것을 기리고 주린 백성을 구제해 사모함이 거듭되도다. 민씨(명성황후)를 내친 것은 천륜에 어긋난다고 상소함으로써 북청으로 유배를 가다가 부인상을 당해 풀려났도다. 주현(州縣)에 책임자로 있으면서 백성의 사모함이 간절하고 청사에 꽃다운 이름을 만세토록 우러루리로다(한계서원 향 만암 이상진)'

 

 본관이 전의(全義)인 이상진은 당시 8학사(八學士)로 이름이 있었으며, 1646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고지도에 나타나는 전주향교 만화루(萬化樓)가 지금과 달리 홍살문 옆, 전주 천변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운치 있는 위치다. 아마도 홍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긴게 아닌가 한다. 공자와 그 제자 4성의 부친 위패를 모신 계성사(啓聖詞)도 지금과 달리 향교 동편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9년 전라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현 위치(서편)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향교 좌측으로 오목대 아래 오대서원(梧臺書院)이 있고, 우측으로 한벽당 못미쳐 한계서원(寒溪祀)이 자리했다. 그러나 현재엔 그 자취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교동 1가 발산(鉢山) 아래에 세워져 있다가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다. 주벽(主壁)은 금서당(琴書堂) 신중경(申重慶), 배향 인물은 충경공(忠景公)이정란(李廷鸞), 만암 이상진이다.

성당(誠堂) 박인규(朴仁圭, 1909~1976)선생의 ‘구강재(龜岡齋 편액 술암 송재성)’는 ‘거북언덕집’으로 전주향교 위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거북이가 편안하게 알을 낳는 공간'이라는 의미하며 현재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하고 있다. 송하진 전 전라북도 지사도, 전 민주당 신경민 국회의원도 이곳에서 달포 이상을 다녔다고 전해진다. 

 

 바로 앞에 전주전통문화연수원과 전주향교가 보인다. 이곳을 찾으면 좋은 이유는 전주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유명하고, 지금도 저녁에는 멸종 위기동물 삵이 바로 뒷산에 살만큼 환경이 쾌적하다. 최근에 이곳은 여행자들의 쉼터로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는데 집주인(유영래 대표)의 인심이 후해서 그냥 들러도 차 한 잔은 운좋게 얻어 마실수 있는 곳이다. 구강재에 놓인 6개의 주련을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발산봉 아래 한계동 사이에 광무(고종)의 해와 달, 대한제국의 갈 길이구나. 도가 높여지고 물이 흐르니 학문의 도(道)로 연못마다 빛난다'(鉢山峯下 漢溪洞中 光武日月 大韓別區 道尊洙閩, 學遵潭華)

바로 '한계'라는 지명이 보인다. 구강재가 자리한 곳을 의미하는 시다. 

 

 그는 스승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89~1957)이 작고한 후에도 성당은 최규만 등과 함께 서당을 운영했다. 그러나 염수당은 1966년에 폐교했다고 한다.

 

‘발산 아래 몇 채의 초록색 지붕, 담장 밖에는 남천이 밤낮없이 흐르네. 이런저런 인간사 모두 버리고, 다만 성리를 스스로 찾아 좇으려네(박인규의 '구강재에서') ’

 

 그는 금재 사후에 정읍 고부의 구강정사를 뜯어와 선생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옮겨짓고 ‘구강재’라 이름을 붙였다. 구강재를 지은 목적을 분명히 했으니 이곳은 집안의 재산이 아닌, 학문에 뜻이 있는 자들을 위해 강의하는 곳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시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곳에서 친구들과 날을 지새우면서 한문 공부를 하던 지난 날이 새록새록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엔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년) 선생이 쓴 '광제당(光霽堂)' 편액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광제(光霽)'는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로, 훌륭한 인품을 비유의 줄임말이다. 이를 직역을 하면 비가 오고 갠 뒤의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대지는 상쾌하다. 거기에 바람까지 불고 달은 밝게 비춘다면 자연의 아름다움은 더할 나위 없겠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전주 한계서원의 원래 자리를 찾고, 만암 이상진의 청백리정신을 전주정신의 모토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