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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20> 변산 소나무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20> 변산 소나무

'함열(咸悅)의 고을됨이 외떨어져 호남의 바닷가에 있다. 땅은 사방이 모두 20리가 채 못되고, 백성은 가난하여 저축이 없으며, 또한 큰 산이 없어 편남(楩枏)과 예장(豫章) 같은 좋은 재목이 없다. 그러므로 관사가 낮고 비좁으며 민가는 대개 띠로써 지었다. 또한 정유년(1597, 선조30) 난리를 겪으면서, 왜적이 몹시 잔인하여 노비는 죽거나 도망친 자가 반이 넘고, 논밭은 황폐한 채 버려진 것이 십중 칠팔이다. 이 고을에 부임한 자들은 모두 무사 안일하여 스스로 제 몸 구완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어서, 관사와 창고가 모두 중건된 바 없었다. 이것이 비록 수고스럽고 귀찮은 일이지만, 그러나 수령된 자로서 그 죄를 또한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근년에 홍후 우(洪侯遇)가 겨우 관사의 동쪽 곁채를 짓고 사신을 맞아 머물게 하였으나,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목패(木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궐례(闕禮)를 행하는 곳을 짓기에는 미처 겨를을 얻지 못했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한후(韓侯)가 현감(縣監)으로 와서, 조심히 법을 받들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검약으로써 몸가짐을 하고 은혜로써 백성을 기르니, 백성들이 이미 화락하여 도망하고 이사갔던 자들이 모두 모였으며, 물이 괴고 잡초가 무성했던 토지가 모두 개간되었으니, 가위 다스려졌다 할 만하다. 씀씀이를 절약하여 부유해지매, 관력(官力)이 갖추어져 황폐해서 버려진 땅을 들어다 관사를 창건하여 옛 모습을 복구하고 대청(大廳)을 만들고 싶어했다. 마침내 예를 행하는 곳이 법으로 보아 응당 먼저 지어져야 하므로, 공문을 수령들에게 보내어 배로 변산(邊山)에서 나무를 베어 오게 했으며 봉상(捧上)의 나머지를 털어 일꾼들을 먹이니, 몇 개월 안 되어 목수들이 끝났음을 아뢰었는데, 훤하니 옛 모습보다 나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관에서 큰 역사(役事)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온 경내의 노소(老少) 군민 남녀들이 모두 그 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우리 원님 인자하고 재주있네. 어디에서 이런 분을 얻겠는가?”
나는 죄로써 이곳에 유배를 왔는데, 후(侯)의 보호를 받아 그의 정사(政事)를 익히 알므로, 그 고을의 노인들에게,
“대체로 요즘 수령이 되는 자 중에서 가장 낫다는 자도 겉치레만 일삼으며 고분고분 어리석은 백성에게 아첨이나 하며, 감사나 병사의 격문을 극력 막는 데 힘쓰면서 관의 사무가 제멋대로 타락되고 지체됨을 돌보지 않으며, 경솔히 이전의 법규를 바꾸어 좋은 평판을 취하기가 일쑤이며, 조금만 견디지 못하게 되면 문득 버리고 떠나니 그들은 다스렸다는 이름은 얻겠지만 고을은 이로 말미암아 버려지는 것이오. 그 다음은 수완을 닦는 데 힘써 제 능력을 자랑하고, 방탕하고 사치하기를 급히 하여 폐단이 불어남을 돌보지 않으며 다만 남의 이목만을 즐겁게 할 뿐이고, 피로하고 쇠약한 이로 하여금 역역(力役)으로 곤욕을 치르게 하여 근심하고 탄식하게 만들지요. 최하자(最下者)는 그 직분을 수행하지도 않고 그 백성을 위로하지도 않으면서 한갓 백성의 살갗과 골수를 벗겨먹을 뿐이니, 이는 노약자로 하여금 날로 흩어지게 하고 제 주머니는 날로 풍부해지며, 이익이 제 몸을 살찌게 하는 것을 일삼는 자에게 돌아가게 하니, 대개는 다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 원님은 그대 백성들을 인애(仁愛)하고 그대 고을의 황폐한 것을 일으켜서 그대들로 하여금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을에서 배를 두드리게 하며 순식간에 크고 넓은 집을 으리으리하게 지었으되, 그대들은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자며 나무 하나 끌어오지 않고 ‘야호, 야호.’ 소리도 듣지 못하였으며, 또 능히 그대의 청백한 가풍을 지킬 수 있었으며, 세금 외에 달리 거두어가는 일이 없어 그대들의 일정한 재산을 넉넉하게 하였으니 원님의 치적이 저 삼자와 비할 때 어떠하며, 그 덕이 금석에 새겨둘 만하니, 여러분 노인들은 그 어찌 잊을 수 있겠소?”
하였다. 그랬더니 여러 노인들이,
“그렇습니다. 대부(大夫)께서 그 사실을 글에 실어 후세까지 썩지 않도록 해주시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청이 몹시 간곡하므로 내가 비록 죄를 얻은 폐인이나 역시 고금의 어진 사대부의 올바른 행실을 자못 이야기할 줄 알며, 나의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서 아첨할 줄은 모르는데 감히 원님의 정사를 매몰시켜 노인들의 뜻을 저버리겠는가? 드디어 책임을 피하지 않고 즐겨 대신하여 말하는 것이다.
원님의 이름은 회일(會一)이며, 상당(上黨 청주의 옛 이름으로 한명회의 봉지(封地)임)의 거족(巨族)이다. 부친 상서공(尙書公)은 당시에 크게 유명하였으며, 후(侯)는 삼가 정훈(庭訓)을 받들어 바야흐로 젊은 나이에 관리의 업무를 알고 익숙함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군자는 더욱 어렵게 여겼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제7권 / 문부(文部) 4 ○기(記)'엔 '함열현(咸悅縣) 객사 대청(客舍大廳) 중건기(重建記)'가 전해온다.

 공문을 수령들에게 보내어 배로 변산(邊山)에서 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니 소나무일 것이다.

부안 하서면 석불산엔 아주 멋스러운 반송 한 그루가 있다.

효충사 옆에 서있는 이 소나무는 1624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영국운조공신인 고희장군의 아들인 고흥건 장군을 석불산에 예장할 당시 예관으로 왔던 예조좌랑 이휘진이 묘목을 가지고 와 직접 심은 유서 깊은 나무다.

반송은 고목이라 해도 보편적으로 높이가 5m이내인데 반해 이 반송은 15m에 이른다는 점이 인상적이며 웅장함을 더해준다.

 십승지지(十勝之地)는 풍수지리설에서 지칭하는 피란(避亂)과 보신(保身)에 적합한 열 곳을 의미하며 십승지(十勝地)라고도 한다. 이른 바 '삼재팔난(三災八難​)'을 피하기 좋은 곳을 말한다.

주로 『정감록(鄭鑑錄)』·『징비록(懲毖錄)』·『유산록(遊山錄)』·『운기귀책(運奇龜責)』·『삼한 산림 비기(三韓山林秘記)』·『남사고 비결(南師古秘訣)』·『도선 비결(道詵秘訣)』·『토정 가장결(土亭家藏訣)』·『남조선 신앙(南朝鮮信仰)』·『택리지(擇里志)』 등에서 거론되고 있다. 바로 이같은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열 곳은  무주 지역의 무풍(茂豊), 충남 공주(公州) 지역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충북 보은(報恩) 지역의 속리산, 전북 부안(扶安) 지역의 변산(邊山), 경북 성주(星州) 지역의 만수동(萬壽洞), 경북 봉화(奉化) 지역의 춘양(春陽), 경북 예천(醴川) 지역의 금당곡(金唐谷), 강원도 영월(寧越) 지역의 정동 상류(正東上流), 전북 운봉(雲峰) 지역의 두류산(頭流山), 경상북도 풍기(豊基) 지역의 금계촌(金鷄村) 등이다. 하지만 한 곳을 빼고 고창 아산 반암을 넣는 경우도 있다.

호남고속도로 익산 인터체인지 일대에는 진천송씨 선산이 있다. 

이곳엔 아름답게 자란 오래된 육송들이 빽빽하게 서있다. 이 소나무들은 300-400여년 전에 심었다고 한다. 완주 봉동읍 제내리에는 진천송씨 종중의 재실인 우산정사가 있다.

 제내리(堤內里). ‘방죽 제(堤)’ 자에 ‘안 내(內)’ 자를 쓰고 있는 만큼 ‘방죽 안’이다. 마을의 이름이 된 방죽은 지금도 있다. 여름이면 방죽에는 지금 초록의 백련 잎으로 가득하다.

 우산정사에서는 두 그루의 소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한 그루는 재실 마당에 있고 다른 한 그루는 방죽을 낀 산자락에 있다. 우선, 재실 마당에서 자라는 300년 된 용솔이 있다.

 용이 여의주를 삼킨 형상이어서 용솔이라 부른다. 가지를 우산살처럼 옆으로 뻗어내 자라는 모습에서 우리는 영락없이 용을 떠올리게 된다. 소나무 둘레만 18m, 높이는 무려 14.5m에 달한다. 이 소나무는 재실을 향해 절하듯 키를 낮춰 자란다고 해서 ‘효자솔’이라고도 부른다. 그 이름대로 소나무는 키가 용마루 높이를 넘지 않는다.
 진천송씨의 선산 소나무들은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1555∼1620년)의 며느리 가운데 남원의 삭녕최씨 집에서 시집온 며느리로부터 연유된다. 남원의 삭녕 최씨라면 훈민정음을 언해하고 용비어천가를 주해한 최항(崔恒, 1409∼1474)의 후손들을 지칭한다. 송씨 집으로 시집갈 때 친정아버지인 최상중(崔尙重)이 딸에게 물었다. “시집갈 때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딸은 “변산 솔씨 서말만 주세요”라고 했다. 

표옹(瓢翁) 송영구에게 며느리가 새로 들어왔는데, 그 친정 역시 변산(邊山)의 내노라하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조용헌박사의 말을 빌리면, 며느리 친정에서는 딸 셋에게 각기 유산을 물려 주었다고 한다. 큰딸에게는 엽전 한 말을 주었고, 둘째 딸에게는 중국의 명품 벼루 단계연(端溪硯)을, 셋째딸에게는 변산의 소나무에서 채취한 솔씨 서 말을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주었다.

 엽전 1말을 원한 큰 딸은  임실군 삼계면의 경주 김씨 집안 며느리로, 이 큰 딸의 후손들 중에는 큰 부자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둘째 딸은 대사헌을 지낸 노진(1518~1578)의 손자며느리로 이후 가문이 더욱 번성했다. 이때 상으로 받은 벼루는 가보가 되어 노진을 모신 남원의 창주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변산 솔씨 서말을 원했던 셋째 딸은 익산 진천송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부군은 단성 현감을 지낸 송흥시(1586~1649)라고 전한다. 이 송흥시의 아버지는 ‘표주박 늙은’이란 호를 가진 표옹(瓢翁) 송영구였다.
 이 최씨 며느리는 ‘백자(百子)편’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모습의 떡도 만들었다고 한다.

부안의 변산반도는 고려 적부터 울창한 숲으로 주가를 올리던 곳이다. 소나무숲이 얼마나 울창했던지, 몽고가 고려에 침입했을 때, 일본 정벌용 배를 건조하기 위해 변산(진서리 구진마을)에 조선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때 벌목사(작목사)로 변산에 부임한 고려 문신 이규보는 ‘변산은 우리나라 재목의 보고’라고 했다.

'예전에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었던 자리로 지금도 마을에 오래된 배의 널판이 남아있다'

고려시대 김방경(金方慶)을 총감독관으로 임명해 목수와 인부 250 여 명을 모집해 부안 변산과 장흥 천관산 등 2곳에 조선소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당시 원(元)나라는 오로지 일본 정벌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어떠한 희생도 생각하지 않고 강행했다. 고려는 조선(造船)공사를 맡아서 그 괴로움과 부담이 컸다. 6개월을 들여 300척의 건조를 마친 후 김해(金海)로 수송했다는 변산면지의 기록이다. 

그 뒤 변산은 원의 일본정벌이란 자극과 영향을 받아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침략이 심해 200여 년 동안 계속된 바 인적, 물적 피해가 컸다고 하며, 당시에 구진조선소가 자리했다.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 조선시대 지리서에도 변산의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숲’과 ‘첩첩한 바위골짜기들’이 언급돼 있다.

 <격암유록>을 쓴 풍수가 남사고는 변산을 ‘십승지지’(전란을 피해 살 만한 곳)의 한곳으로 꼽았다. 변산반도는 고려 적부터 울창한 숲으로 주가를 올리던 곳이다.

 소나무숲이 얼마나 울창했던지, 몽고가 고려에 침입했을 때, 일본 정벌용 배를 건조하기 위해 변산(진서리 구진마을)에 조선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때 벌목사(작목사)로 변산에 부임한 고려 문신 이규보는 “변산은 우리나라 재목의 보고”라고 기록했다.

진서면(鎭西面) 구진(舊鎭)마을은 어찌 보면 순서가 바꿔었다. 고려시대 이래로 서해를 지키던 수군이 있던 터였던 검모포진(黔毛浦鎭)이 있던 곳이 구진마을이다. 

그러다가 1812년 진영이 지금은 없어진 진서초등학교가 있는 터로 옮기면서 진의 서쪽이란 뜻의 진서가 생긴 것이다. 옛 동헌(東軒)이 있었다는 터에 올라보면 바닷가와 선을 같이하는 일자형의 마을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진서면 곰소항의 동쪽 구진마을에는 고려때부터 검모포진영이란 관청과 수군부대가 있었다. 옛날엔 곰소의 앞바다를 검모라 했다고 한다. 

이곳은 서해바다의 군사적 요충지로 1274년(고려 충선왕 1년)에 여몽(麗夢)동정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 그 수송선과 영이 있었던 마을이었다.

 ‘신유[辛酉]에 대장군 나유를 원에 파견하여 중서성에 글을 보내기를, “금년 정월 3일에 귀국 조정의 지시를 받고 즉시 큰 배 300척을 만들도록 조치를 취하고 추밀원 부사 허공(許珙)을 전주도 변산(邊山)에, 좌복야 홍녹주(洪祿?)를 나주도 천관산(天冠山)에 파견하여 재목을 준비하게 했다. 또 시중 김방경(金方慶)을 도독사로 임명하고 그 관할 하의 관원, 장령들도 모두 우수한 인재들로 뽑았으며 또 필요한 인부, 장인들과 자재들도 모두 국내 각지에서 사람을 파견했다. 그 후 정월 15일에 모두 한 곳에 모으고 16일에 역사를 시작해 5월 그믐에 공사를 끝내니, 큰 배와 작은 배 900척을 완공했으며, 사용해야 할 물건도 또한 모두 원만히 구비되었기에 3품관 중에서 유능한 사람들에게 분공하여 뱃머리를 돌려 이미 김주(金州)로 향해 떠나게 했다. 여러 재상들은 황제에게 잘 보고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고려사』 권28, 충렬왕 원년 6월 신유)

충렬왕 18년(1292)의 기록이지만, 중국 강남 지역에서 건조하는 전함이 단단하지 않아 쉽게 파괴된다는 언급이 주목된다. 변산 등 고려에서 배를 건조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이유를 알려준다. 그만큼 고려 배의 성능이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그로 인한 고통을 부안 지역이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강남(江南)의 전선은 크기는 하나 무엇에 부딪치면 쉽게 파괴되기 때문에 먼저 번에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고려로 하여금 전선을 만들게 하여 다시 정벌한다면 일본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30, 충렬왕 18년 8월 정미) 선박 건조는 충렬왕 20년(1294) 정월에 쿠빌라이가 사망하면서 중단됐다. ‘당시 임금이 입조해 일본 정벌의 불합리성을 설명했으며, 또한 갑술년과 신사년 두 번에 걸친 원정으로 바닷가의 재목을 거의 벌목해 버려 전함의 건조가 사실상 곤란하므로 기한이라도 연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마침 황제가 죽었으므로 홍군상이 승상 올제이(完澤)에게 건의해 마침내 일본 정벌이 중지되었던 것이다.(『고려사』 권8, 충렬왕 20년 정월 계유)’

이로 인해 더 이상의 전함 건조가 중단되었고 부안 군민들도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됐다. 수 차례에 걸쳐 이뤄진 선박 건조는 변산 등의 산림을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함 건조에 동원된 부안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매우 큰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로부터 변산은 해풍이 불어와 질 좋은 소나무 산지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벌목사(작목사)로 변산에 부임한 고려 문신 이규보는 “변산은 우리나라 재목의 보고”라고 기록했다. 고려 때 여몽 연합군이 일본에 원정을 가려고 선박을 만들 때도 변산의 소나무를 벌목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변산의 소나무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황장목이었다. 황장목은 전선을 만들거나 궁궐을 짓는 귀한 소나무였다. 조선시대엔 변산면 격포리 격상마을 앞 산쪽으론 행궁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행궁은 관찰사 원두표가 1580년, 격포를 행궁이 들어설 적절한 위치로 보아 상소를 올렸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이 변산을 유람하고 두 편의 산문을 그의 유고집 '표암유고(豹菴遺稿)'에 남겼다. 

변산 유람은 둘째 아들 강흔(1739~1775)이 1769년 부안현감으로 부임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그는 1770년 5월, 채석강과 격포진을 유람한 후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와 '유격포기(遊格浦記)'를 지었으며, ‘우금암도(禹金巖圖)’를 남겼다. 때마침 정읍의 수령으로 있던 친구 임성여(任聖與)가 부안으로 찾아와 함께 격포를 유람하게 됐다. 

강흔은 읍지를 만들고 후선루(候仙樓)를 새로 세우고 낙성식을 열었다. 관아의 후선루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왔다. 그래서 이름을 하설루(賀雪樓)로 바꾸었음을 '하설루기(賀雪樓記)'를 지었다. '부안 격포의 행궁(格浦行宮記)'엔 젊은 지방관으로서 구축한 요새가 부실한 정도를 넘어 완전히 무너져 있음에 한숨을 쉬었다고 적었다.

 방죽을 끼고 있는 마을 어귀 산자락엔 ‘삼정승 소나무’가 있다. 

일본 사람들이  진천송씨들의 이 소나무를 많이 베어 가 버렸지만 300-400년 전 최씨 할머니 당대에 심은 35m 높이로, 아직도 살아 있다. 

삼정승 소나무 줄기에 깊은 상처가 남아 있는데, 일제 강점기 전쟁 중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송진까지도 공출해 간 흔적이다. 나라에 힘이 없으니 소나무까지도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하나의 굵은 둥치에서 곧게 뻗은 세 개의 가지가 늘씬하게 하늘로 치솟았다고 해서 삼정승 소나무라고 부른다. 나무의 기세가 얼마나 당당하면 붉은 기운의 세 개의 굵은 가지에서 정승을 떠올렸을까.여느 노거수처럼 풍만하지도 기이하지도 않지만, 여윈 듯 단아한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조선의 선비가 연상된다. 

기품 넘치는 강직한 선비 말이다. 3, 4세대 손자 소나무들은 지금도 1만여 그루나 자라고 있다. 변산 소나무 씨앗 세 말을 갖고 출가해 자손 대대로 길렀다는 스토리가 잊혀지지 않음은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