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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21> 부안 우반동과 허균의 홍길동전을 쓴 정사암



'부안현(扶安縣) 해안에 변산(邊山)이 있고 변산 남쪽에 계곡이 있는데 우반(愚磻)이라 한다. 그 고을 출신 부사(府使) 김공 청(金公淸)이 그 빼어난 곳을 택하여 암자를 짓고 '정사(靜思)'라 이름지어, 노년에 즐겨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나는 일찍이 사명을 받들어 호남을 왕래하였는데, 그 경치에 대해 소문은 많이 들었으되, 미처 보진 못했었다. 나는 본시 영예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매양 '상자평(尙子平)의 뜻을 지녔으나, 그 소원을 아직도 이루지 못했었다. 금년에 공주에서 파직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서 장차 소위 우반이란 곳에 집 짓고 살 결심을 하였다. 김공의 아들 진사(進士) 등(登)이란 이가, "우리 선군(先君)의 폐려(弊廬)가 있으나 저는 지킬 수가 없으니, 공이 수리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고군 달부(高君達夫) 및 두 이씨(李氏)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보았다.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서 골짜기에 들어서니 시내가 있어 그 물 소리가 옥 부딪는 듯하여 졸졸 수풀 속으로 흘러 나왔다. 시내를 따라 몇 리 안 가서 산이 열리고 육지가 트였는데, 좌우의 가파른 봉우리는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나는 듯 높이를 헤아리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 셋이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돌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허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대해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金水島)가 그 가운데 있으며,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란 데에 이르니, 암자는 방이 겨우 네 칸이며 바위 언덕에다 지어 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우리가 높이 마주 서 있었다. 나는 폭포가 푸른 절벽에 쏟아져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산발(散髮)하고 옷을 풀어헤친 채 못 가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살짝 피고 단풍은 반쯤 붉었는데, 석양이 산봉우리에 비치고 하늘 그림자는 물에 거꾸로 비친다. 굽어보고 쳐다보며 시를 읊조리니, 금새 티끌 세상을 벗어난 느낌이어서 마치 *안기생(安期生)ㆍ선문자(羨門子)와 함께 삼도(三島)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행히 건강할 때 관직을 사퇴함으로써, 오랜 계획을 성취하고 또한 은둔처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고을원인 심군 덕현(沈君德顯)이 암자가 피폐하되 보호하는 이가 없음을 보고, 승려 세 사람을 모집하여 쌀과 소금 약간 섬을 더해 주고 목재를 베어 수리하게 한 뒤 관역(官役)을 바꾸어 거기에 머물러 지킬 것을 책임지웠다. 암자는 이로 말미암아 복구되었다 한다.

상자평(尙子平)의 뜻 : 자평(子平)은 상장(尙長)의 자로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이다. 도술(道術)을 지닌 사람으로 고을의 벼슬을 역임하다가 버리고 입산(入山)했다. 은거(隱居)의 뜻이다.

안기생(安期生) …… 삼도(三島) : 신선이 선경(仙景)에서 노니는 것. 안기생은 진(秦) 나라 때 하상장인(河上丈人)에게 수학(受學)한 선인(仙人)이고, 선문자(羨門子)도 진 나라 때의 선인이다. 삼도는 봉래(蓬萊)ㆍ영주(瀛州)ㆍ방장(方丈)의 삼신산(三神山)이다.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6권에
'정사암(靜思庵) 중수기(重修記)​'가 소개된다

'정사암지(靜思庵址)'는 조선 시대에 창건한 절로 알려진 정사암이라는 암자 터이다. 절터에는 조선 시대 기와편이 산재되어 있으며, 주춧돌 등이 확인된다.
기와편, 백자편, 옹기편 등이 수습되는데 기와편의 등 문양은 청해파문(靑海波紋)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정사암의 조성 시기는 15~1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영전-곰소 간 국도 30호선 변에 위치한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우신마을에서 바드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중턱에서 남대봉으로 오르는 산길로 300m 정도 가면 선계사지(仙溪寺址)가 자리하고 있다.

선계사지 남단에는 기암절벽을 이룬 선계 폭포가 있으며 이곳 암반을 따라 동쪽으로 40m 정도 올라가면 절벽을 이룬 편평한 암반이 자리하는데 정사암지는 이 암반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정사암지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절터 뒤편은 암벽으로 둘러져 있다. 암벽은 건물의 지붕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암벽 아래에는 우물이 자리하고 남쪽 끝부분에는 축대가 쌓여 있다.

정사암지는 현재 약초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규모는 동서 27m, 남북 18m 내외이다. 절터 내에는 편평하게 다듬어진 2매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다.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누나
(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

마음 쓸쓸한 석양녘이면 문득 문득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리곤 하는 매창의 시다.
학창 시절에 한 번쯤 읊조렸을 법한 시 ‘이화우’를 남긴 이가 바로 매창이다.

세상에 연시(戀詩)는 넘쳐나지만 나그네에게 이보다 더 애절한 연시는 다시 없을 것이다. 어째서 연시들은 이별한 뒤에야 비로소 절창이 되는 걸까. 사랑이 한참 불타오를 때는 서로를 탐닉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애절한 시 따위는 쓸 틈도 없다는 것일까.

'이화우 흩날릴 제'는 1586년 부안의 관기로 있던 매창(부안현 아전 이탕종과 관비인 어미 사이에서 태어난 매창의 본명은 계생이다)이 유희경(1545∼1636)을 만나 사랑을 나누다 이별한 뒤 쓴 시조다.

처음 만날 당시 매창은 14세, 유희경은 42세였다(후일 유희경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한 공로로 면천이 된 뒤 종2품 가의대부에까지 이른다). 이별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어느 쓸쓸한 가을 저녁쯤 매창은 문득 유희경이 그리워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으니 매창은 결코 한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거쳐 갔고 그녀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쾌락을 위해 그녀의 몸과 기예만을 탐한 남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희경은 그녀의 몸과 정신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 중 하나였다. 유희경의 문집인 '촌은집'엔 매창을 위해 쓴 시가 7편이나 전한다.

서른여덟 해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매창의 전반기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유희경이었다면 후반기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단연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이었다.

1601년 스물아홉의 매창은 세곡선을 감독하는 전운 판관이란 관리 신분으로 부안에 내려왔던 허균과 첫 만남을 가졌고 이내 마음이 통해 이후 10년 동안 신분을 초월한 벗으로 지낸다.

처음 허균과 만나 종일토록 시를 주고받았던 매창은 그날 잠자리에 기생이었던 조카딸을 들여보낸다. 천하의 바람둥이 허균이 매창을 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거문고와 시를 쓰는 능력이 탁월한 매창을 오래오래 친구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날 만남을 시작으로 둘의 우정은 매창이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1608년 공주목사로 재직하다 파직 당한 허균은 아주 눌러 살 생각으로 부안 변산의 '우반골'에 정사암이란 집을 짓고 들어가 칩거한다. 물론 그 기간은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허균의 부안에 대한 사랑은 깊을 대로 깊었던가 보다. 이때도 매창과 교유하며 수많은 시를 주고받았음은 물론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것은 매창이 간 지 2년 뒤인 광해군 4년(1612), 그의 나이 45세 되던 해 12월에 부안 선계골 정사암에 은거할 때로 추정된다.

그는 정사암을 ‘누실(陋室)’이라고 부르며, 부조리한 세상을 한탄하고 분노하며 민중을 위한 소설, 불우한 인재를 위한 소설 '홍길동전'을 썼다.

내변산에 속한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우반골 선계폭포 옆, 지금은 집터의 흔적도 사라진 정사암이 당시 허균이 은거하며 국문학사에 빛나는 '홍길동전'을 집필한 역사적 산실이라는 것이 시인이며 향토사학자였던 고 김민성씨의 말이다.

또 '홍길동전'의 이상국인 율도국(栗島國)이 부안의 섬 위도다.

줄포만 뒤편으로는 다소 생경한 여행지들이 많다. 주로 허균, 이매창, 유형원 등 역사적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는 곳들이다. 우동리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허균과 ‘반계수록’을 쓴 유형원이 반세기 시차를 두고 살았던 곳이다.

선계폭포가 볼만하다. 비가 올 때만 드러나는 폭포다. 우동저수지 위에 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머물며 수도했다 해서 ‘성계폭포’라고도 불린다. 실제 내비게이션에선 ‘성계폭포’로 입력해야 나온다.

선계폭포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세워진 정사암에선 허균이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에서 허균이 묘사한 것처럼 ‘선계폭포 아래로 시냇물이 바다로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은 그대로다.

'홍길동전'을 집필한 곳이 이곳 정사암으로 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도적들’이나 ‘율도국’의 실체가 부안 지역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부안의 변산은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적 특징 때문에 공권력을 피해야 하는 도적들의 소굴이 되었고, 그들을 토벌하기 어렵다는 것이 실록에 등장할 정도로 변산 도적은 서울에까지 이미 알려져 있었다.

홍길동이 ‘도적들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화소는 변산 지역의 설화 '긴다리 군관 전설', '변산의 군도와 허생원 이야기(박지원)'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다.

허균은 변산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먹고살 길이 없어 유랑하다가 도적이 된 당시의 변산 도둑들에 대한 생활상을 직접 듣고 이것을 소설을 통해 우회적으로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홍길동전'에서 ‘산에 도적이 없는(山無盜賊)' 사회를 ‘율도국’이라는 이상 사회로 그리고 있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한편, '홍길동전'에 드러난 이상 국가 ‘율도국’이 부안군 ‘위도’에 비정되기도 한다.

매창이 자신의 시와 노래를 좋아해 교분을 나누던 허균과 훗날 재회한 곳도 정사암이다. 매창은 황진이에 비견될 만큼 명기였다고 한다.

736번 도로도 이 일대에 있다. 놓치면 후회한다고 할 만큼 풍경을 매달고 가는 길이다. 부안 읍내에서 내변산의 산간지대를 지나 외변산 해안지대까지 잇는 지방도로다.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숲길과 만날 수 있다.

우반골은 1653년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 1673)이 은거하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김성환 군산대 교수 같은 이는 허균이 부안 우반골에 거주하며 '홍길동전'을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반동(현 보안면 우동리) 반계서당은 반계는 산중턱에 자립잡고 있다.
이곳에서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집대성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지금 건물은 1981년 복원된 것으로 건물 안과 밖에 반계가 팠다는 우물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앞이 탁 트여 우반동(인근에 선계폭포와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정사암이 있음)의 너른 들녁과 멀리 줄포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초빈이 나온다. 1673년 3월 운명하자 5월에 임시안장하고 장사를 지냈으나 10월에 반계의 유명에 따라 경기도 죽산(현 용인시 백암면)의 부친 묘소 아래로 옮겨 모셨다. 이곳 임시 안장터는 근래에 봉분을 만들고 안내문을 세웠다.

한말(韓末)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 선생의 자취가 담긴 계양서원을 거쳐 부안동 정사암에 도착했다.

공주목사에서 파직당한 허균은 이곳에 칩거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이자 사회소설인 '홍길동전'을 완성했다. 차별 없는 율도국을 꿈꿨던 허균의 좌절된 이상은 작품으로 남아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실학의 태두이자 토지균분제를 주장했던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 20년 동안 만 권의 장서를 읽으며 집필에 전념했던 반계서당의 길목엔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비문이 세워져 있다. 반계는 이곳에서 26권 13책으로 구성된 대저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완성했다.

이어 한참 내려가 반계의 집터를 방문했다. 길가에 반계가 팠다는 우물이 있고 안내비가 세워져 있다. 이 우물을 지나면 반계집터라고 하여 공원이 조성돼 있다. 하지만 본래 집터는 이곳이 아니라 그 앞 논자리라고 한다. 이 논 가운데 돌기둥이 서 있는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는 곳이다.

반계집터는 경지정리로 후원의 대나무 밭까지 밀어버려 지금은 100여 평만 남아있다. 

또 반계서당에서 8km 떨어진 상서면에는 반계를 배향했던 동림서원지가 있으나 1868년 훼철돼 지금은 유허비와 주초돌만 남았다.

이밖에 동진과 상서에 반계농장이 있었다고 하며 광주 풍양정에 반계의 유일한 글씨가 편액으로 남아 있다.

보물같은 문화자원을 제대로 보존·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