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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21> 잉골드와 전주 딸기농촌진흥청은 고온기에도 맛 좋고 항산화물질이 풍부한 국산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21> 전주 딸기

농촌진흥청은  고온기에도 맛 좋고 항산화물질이 풍부한 국산 여름딸기를 개발·보급하고 있다며,  이달에 6품종을 소개했다.

국내산 딸기는 대부분 9월에 정식한 뒤 11월 말에 첫 수확(촉성작형)해 겨울과 봄철에 집중적으로 출하하고,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생산을 중단한다.

하지만 사계성 품종은 여름철 고온장일(高溫長日, 일조시간이 12시간 이상) 조건에서도 꽃대가 나와 여름철에도 생딸기를 맛볼 수 있다.

농진청 고령지농업연구소는 2002년부터 ‘장하’, ‘미하’, ‘고슬’ 등 사계성 여름딸기 품종을 개발, 보급하고 있다. 

현재 전북특별자치도 무주, 경남 합천, 강원특별자치도 평창 등에서 재배한다. 생산 물량은 대부분은 계약재배 한 제과업체 등에서 수매하고 있다.

연구진이 여름딸기 6품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당도와 당산비가 가장 높은 품종은 ‘장하’였다.

 ‘장하’는 당도(9.7브릭스)와 당산비(15.9)가 겨울딸기 ‘설향’(당도 8.7브릭스, 당산비 15.0)보다 높았다. 단단함은 ‘미하’가 우수했다.

 ‘미하’는 경도(33.3g·mm-2)가 매우 높아 여름철 고온기에도 과육이 단단하게 유지됐다.

항산화 작용을 촉진하고 염증을 줄이는 데 유익한 페놀 함량은 6품종 평균이 성인 하루 권장 섭취량(남자 1,172mg, 여자 1,031mg)을 웃돌았다. 

 ‘고하’(1,607mg)에 가장 많았고 ‘미하’(1,544mg)와 ‘고슬’(1,478mg)이 뒤를 이었다. ‘미하’는 딸기의 붉은색을 나타내는 생(生) 안토시아닌 함량도 457mg으로 가장 많았다.

최근 두 사람은 직접 딸기 따는 체험을 할 수 있는 딸기 농장에 놀러 가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데이트 날짜가 다가올수록 남자의 일이 바빠졌고, 결국 약속한 날짜에 맞춰 휴가를 낼 수 없게 됐다.

안타까운 소식에 시무룩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남자의 여자친구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기회로 더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을 만들기로 했다.

여자는 예정된 데이트 날에 퇴근한 남자 집에 놀러 가 집게 달린 건조대를 커텐봉에 걸었다. 그리고 미리 사 온 딸기를 집게로 하나씩 집은 다음 "자, 이제 딸기를 따보자!"하고 외쳤다

아쉬운 대로 딸기 농장에 간듯한 기분을 내보려고 했다.
여자친구의 다정한 행동에 남자는 뭉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여자친구의 사진을 공개하며 미안해하면서 동시에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오늘 수확한 딸기를 네가 보았으면 했는데. 테이트(마티 잉골드)씨가 거의 5갤런이나 되는 딸기를 수확해서 내가 어린 여학생들을 딸기잔치에 초대했다.(중략) 딸기는 이곳에서 나는 토종식물은 아니지만 아주 잘 자란다.

테이트 부인이 약 2년 전에 (딸기 모종) 50개를 주문했었고, 우리 선교부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전 선교사들에게 딸기를 공급해 오고 있다.(미국 장로교 선교사 랭킨의 편지(1907년 5월26일 일기 중)

딸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보급된 시점은 1900년대 초로 추정되고 있다.

농촌진흥청에서 발간한 '농업기술길잡이-딸기' 등 문서 자료를 살펴보면 '딸기 도입 시점은 20세기 초이고, 일본에서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정도만 기술돼 있다.

한참 일본에서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니 딸기 모종도 일본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지만, '추정'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쉬운 것은 역사 기록에는 일본의 누가, 언제, 어떻게 딸기를 한반도에 들여왔는지 정확하게 명시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전주 중화산동 선너머 딸기밭이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았다.

딸기 철이나 포도가 익을 때 사람들로 넘쳐나던 만남의 장소였다. 아마 지금 50대 후반 이상 전주 사람들에게 단순한 딸기밭이 아닌 셈이다.

빨간 딸기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국내로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감자처럼 딸기도 남미가 원산지 인데, 이것이 유럽에 전래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다. 

그 역할을 한 것은 마티 잉골드(Mattie Ingold, 1867-1962) 선교사다.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남장로회 파송으로 1897년 9월 제물포에 도착한 그녀는 바로 전주로 내려가 11월 3일 전주 성문밖에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해 진료소를 차렸다.

이것이 전주 예수병원의 시작이었다. 전주예수병원은 세브란스병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국내 서양 병원으로, 1940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원됐다 재개원했다. 1950~60년대 전국적인 기생충 박멸운동과 국내 최초의 암 등록 사업을 시작했을 정도로 전주예수병원은 선진 진료체계를 갖춘 병원으로 유명했다. 
잉골드 선교사가 딸기를 들여온 것은 1905년으로 전해진다.

한 해 전, 미국에 안식년 차 들어갔다가 오는 길에 딸기 종자를 들여와 화산동에 심었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와 관련해 기전여학교 설립자인 랭킨(M. B. Rankin, 1879-1911) 선교사는 “딸기는 조선에 자라는 토종이 아니며, 잉골드가 들여와 확산 보급했다”고 기록했다.

랭킨 선교사(전주기전여중고 2대 교장)의 기록에 따르면 1907년 5월 27일 잉골드 선교사가 수확한 딸기를 가지고 잔치를 벌였는데, 당시 학생들이 즐거워했다고 한다. 

잉골드는 자신의 텃밭에 딸기를 비롯, 토마토, 고추 등을 심어 기르는 전원생활을 좋아했다고 한다. 

잉골드 선교사에겐 슬픈 일도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아기가 사산된 것이다. 지금도 전주 선교사 묘지에는 잉골드와 테이트 선교사 부부의 딸의 작은 묘지가 있다. 출생일과 사망일이 1910년 9월15일로 같다. 결혼 5년만에 얻은 딸이 죽은 채로 태어났다. 물론 아기를 출산할 당시 잉골드 선교사의 나이 마흔셋이었으니 쉽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풍토병 등 스트레스가 많았다는 것도 짐작 가능하다. 그날의 슬픔에 대해 잉골드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9월 15일 여자아이를 사산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마음 아프고 비통하며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원했던 작은 생명을 잃어버렸다”

대한민국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딸기가 잉골드 선교사의 이런 수고와 땀, 슬픔의 결실이었다. 

역사 기록으로써 명확하게 딸기가 국내에 들어온 것이 1905년 9월이라는 점을 기억하고자 함이다.

미국에서부터 잉골드 선교사의 노력으로 우리는 110여 년간 겨울부터 봄까지 제철 딸기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딸기의 등장은 한반도에서 꽤 환영을 받았던 모양이다.

잉골드와 랭킨 선교사의 기록에는 종종 딸기를 수확해 제자인 여학생들과 딸기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기야 빨간색 빛깔이 매력적이고, 달콤한 맛에 씨알 굵은 딸기는 특별히 요리하지 않아도 맛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