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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13> 고창 선운사는 '동불암(東佛庵)'이 아니고 '동불암(銅佛庵)'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13> 고창 선운사는 '동불암(東佛庵)'이 아니고 '동불암(銅佛庵)'

장마에 문화재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누각이 풍우로 무너진 때는 1648년(인조 26)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고창 도솔암 마애불’로 더 많이 불리는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1200호)은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이 있는 칠송대라는 암봉의 남벽 단애에 조각된 거대한 마애불상으로, 한때 미륵불이라고 불렀다.

마애불의 크기는 대략 50척 15미터 가량 된다. 아마도 우리나라 마애불 중에서 가장 큰 것 같다. 한국의 3대 마애불로는 안동의 제비원 마애불, 경기도 파주의 용미리 마애불 그리고 선운사의 도솔암 마애불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도솔암 마애불이 가장 크고 위엄을 갖추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가슴의 복장에서 동학농민전쟁 때의 비밀기록을 발견한 사실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이는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이 있는 칠송대라는 암봉의 남벽 단애에 조각된 거대한 마애불상으로, 한때 미륵불이라고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해 암벽에 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銅佛庵)'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했다고 한다. 비결록을 부장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하지만 근거가 안보인다.

마애불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다.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의 흔적이다. 누각이 풍우로 무너진 때는 1648년(인조 26)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고창 선운사 동불암(東佛庵)은 동불암(銅佛庵)이었다. 고창학연구회는 선운사 마애불로 잘 알려져 있는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의 東을 銅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했다. 연구회는 구리 면상 흔적을 실측하기 위해 드론으로 정밀 촬영을 해 얼굴 부위에 집중된 구멍 20개를 확인했다. 

이 구멍은 가림막의 나무기둥 구멍에 비해 크기가 작어 구리 주물을 고정시키기 위한 철제를 꽂았던 흔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선주 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는 “고려말 도솔암 두건형 금동지장보살이 조성된 후에 그 영향을 받아 마애불 얼굴 부분에 청동주물을 만들어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안면의 바위 일부는 구리주물의 영향으로 변색된 것으로 보여 정밀조사가 필요하다”면서 “전문 연구자들의 학술세미나 개최 등 정확한 고증을 거쳐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문헌과 자료에 따라 때론 '동불암(東佛庵)'과 때론 '동불암(銅佛庵)'으로 나온다. '송사지(松沙誌)'와 '전선원무장읍지(全鮮元茂長邑誌)'등에 '동불암(銅佛庵)' 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각종 기록을 검토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강후진의 '송사지' 기록

강후진(康侯晉, 1685~1756)의 '송사지(松沙誌)'엔 '동불암(銅佛庵)으로 나온다.

 '동불암재오층전하고록공민왕시시창(銅佛庵在五層展下高麓共愍王時始刱)'으로 나온다. 이를 해석하면, '동불암은 5층전 아래 산기슭에 자리한다. 고려 공민왕때 비로소 처음으로 창건했다'고 나온다. 만든 시기가 처음으로 나오는 자료같다. 

이렇게 본다면 이때부터 동으로 불상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송사지'는 무장현감을 역임한 유희춘, 정권 등이 작성했던 무장읍지를 토대로 강후진이 추가 보완한 조선ㅍ후기 지리지로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무장현은 조선 1417년(태종 17)에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고을이다.

'무장읍지'와 '전선원무장읍지' 기록

마애불 면상에 구리 주물이 덧쓰워져 '동불암(銅佛庵)'이라 불렀던 기록은 1857년 무장읍지에 소개된다.

 '동불암은 도솔암 아래에 있다. 석벽이 우뚝하게 솟아 천백척이나 된다. 여섯길이나 되는 불상(六佛像)을 새겼다. 면상은 구리 주물로 만들어 걸었던 바, 매우 웅장했다. 어느때에 구리를 녹여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순치 무자(順治戊子, 중국 永之, 조선 인조26년 1648)'년, 큰 바람에 땅에 떨어져 조각이 났다. 깨어지는 소리가 수십 리까지 들렸다. 그 위에는 마룻대와 처마를 걸었던 바위 구멍과 새겨진 불상은 지금도 남아 있다.(銅佛庵 在兜率庵下, 石壁屹立千百尺, 刻丈六佛像於石壁 而面像則鑄銅而掛之 極其雄壯, 不知何時鑄成 至順治戊子年 大風時墮地, 片碎聲聞數十里 其上棟宇所架 石穴及刻印佛像 至今猶存).

이를 보면, 불상의 면상은 구리로 만들어 덧씌워져 있었고, 그 위에 누각을 만들어 풍우를 가리도록 돼 있었다고 나온다. 이때 동불암(銅佛庵)이 건재했다.

 하지만 강후진의 '송사지(松沙誌)' 기록을 못본 것 같다. 인조실록을 보면 '인조 26년(1648년) 7월 6일 己巳(기사)의 기록을 보면 '전라도에 태풍이 불고 이상 기후가 심하다'고 기록돼 이로 인해 마애불에 큰 문제가 생겼을 공산이 크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의 홍수 관련 기록을 보면 인조때 64건을 비롯, 세종때 59건, 현종때 54건, 현종때 54건 등 모두 493건이 발생했다.

1904년 '무장읍지'와 1922년 '전선원무장읍지'에도 1857년 '무장읍지'와 같은 내용으로 소개된다. 이렇게 본다면 적어도 이때까지 '동불암(銅佛庵)'이 남아 있었다. 지금도 마애불이 조각된 암벽위에 몇 개의 각진 구멍과 쇠 못, 부러진 목재들이 남아 있어 옛 동불암의 공중누각이 있었다는 흔적이 보인다. 

이는 1995년 부여문화재연구소와 고창군이 발행한 '선운사 동(東)불암 발굴 및 실측조사 보고서(부여문화재연구소 학술연구총서 제12집)'와 2019년 고창군이 펴낸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정밀실측조사보고서'에 이같은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