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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12> 전북의 '호남제일'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12> 전북의 '호남제일'

전남,북을 통틀어 가리키는 명칭으로 ‘호남(湖南)’지방이란 말을 즐겨 쓴다. 말 그대로 라면 호남은 호수의 남쪽이란 뜻으로 금강 이남 지역을 가리킨다. 세종실록에는 그 호수가 김제의 벽골제를 가리킨다고 적혀있고, 또 다른 문헌에는 금강을 옛날에는 호강이라고 불렀는데, 금강을 가리킨다고 적혀 있다. 
‘호남’이란 명칭의 유래는 문헌상 세 갈래(금강, 벽골제, 황등호) 설이 있다. 현대사적인 측면에서 재조명해 볼 때, 호남의 3호(三湖, 즉 김제 벽골제, 정읍 눌제, 익산 황등제) 가운데의 하나인 익산의 황등호라고도 한다. 

'호남(湖南)'은 전라도의 별칭으로 금강하류 남쪽을 뜻한다. 대개 호남의 ‘호(湖)’자를 호수를 뜻하는 것으로 판단해 김제 벽골제 이남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금강의 옛 이름이 호강(湖江)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호남'은 원래 충남의 공주, 부여, 논산, 금산 지역 등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전북에는 유독 '호남 제일'이라는 편액이 많다. 

호남제일루는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요, 호남제일정은 정읍 피향정(보물 제289호)이요, 호남제일성은 풍남문(보물 제308호)이요, 호남평야의 첫 관문인 전주에 세워진 호남제일문도 있으며, 호남제일관(번) 만마관도 자리하고 있다. 한편 제주 관덕정(보물 제322호)은 호남제일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호남제일루 '광한루'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의 전,후면에는 ‘호남제일루’, ‘계관’, ‘광한루’란 현판이 걸려 있다. 

‘호남제일루’는 말 그대로 ‘호남의 제일 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루는 하늘나라 월궁의 궁전 이름이며,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일반적으로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지은 건물을 일컬어 정자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정자의 종류는 정(亭)과, 누(樓), 그리고 대(臺) 등으로 구분이 된다.

정은 단층으로 지어지고 방을 마련하는 건물들을 흔히 말한다. 이와는 달리, 누(樓)란 사방을 시원하게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전면(측면)의 중앙 칸 처마 밑에는 ‘광한루’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배면(북측)의 동측 측칸에는 ‘호남제일루’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1855년(철종 6년) 이상억 남원부사가 누각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호남제일루’라는 현판을 크게 써서 걸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누각에는 ‘호남제일루’ 등 83점의 편액이 있으며, 용성지에 실려 있는 것과 합하면 약 200여 수가 된다.

호남제일성 '풍남문'

'호남제일성'인 전주부성은 언제 처음 쌓여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말 관찰사를 지낸 최유경이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성의 수축은 그 이전이다.

 전주를 상징하고 있는 풍남문(보물 제308호)은 전동에 위치, 2층루의 남면에는 풍남문이란 편액이, 북쪽에는 ‘호남제일성’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호남제일성’이란 편액은 전라관찰사 서기순이 썼다.

원래는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98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전주의 남문은 조선 5백년의 역사 명맥을 잇는 수도 한성부의 상징적인 숭례문인 남대문과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호남제일정 '피향정'

전북에는 전주의 한벽당, 남원의 광한루, 순창의 귀래정 등 유독 이름난 정자가 많다. 정읍 역시 호남 제1의 정자로 평가받는 피향정(보물 제289호)이 있다. 

태인에 피향정이 생기게 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신라시대 최치원선생이 태산태수(현 태인, 칠보면 일대)로 재임할 때 이곳의 연꽃 방죽을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정자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하기 어렵다. 7개 돌계단의 앞면 현판에는 피향정이라 쓰여져 있고, 하연지쪽 뒷면엔 ‘호남제일정’이란 편액이 붙어 있다. 원래는 기둥이 30개가 되어야 하는데, 중앙의 2개를 세우지 않고 28개를 세운 것은 우주의 28숙(별자리)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관덕정(제주 제주시 삼도2동, 보물 제322호) 역시 ‘호남제일정’이다. 

‘관덕(觀德)’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덕정을 중심에 놓고 남북으로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실내 서쪽 위에 ‘탐라형승(耽羅形勝)’, 가운데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입구 위에는 ‘관덕정(觀德亭)’이라고 적힌 액자가 있다.

‘호남제일정’은 제주목사 박선양이 1882년(고종 19년)에 쓴 것이다. ‘호남제일정’은 관덕정이 들어설 무렵, 제주도는 전라도에 속해 있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래서 ‘전라도 제주도 모두 합쳐서 첫 번째 가는 정자다’라는 말을 쓸 수 있었던 셈이다.

호남제일문, 호남의 관문

'호남제일문'이란 이름은 전주가 전라남,북도, 제주도를 통합하는 전라감영의 문, 호남평야의 첫 관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 현판은 단아하면서도 한편 웅장한 듯하면서도 자칫 권위롭기 쉬우나 오히려 따뜻한 필치가 우아함을 드러내는 고 강암 송성용선생의 글씨다. 호남제일문은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호남제일문’은 지난 1977년 5월 기존 4차선 진입로에 건립됐다. 이어 19991년 전국체전 진입로 확장으로 헐렸으며, 1994년 8월 13일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전주 IC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여의도광장에 길이 43미터, 폭 3.5미터. 높이 12.4미터를 갖고 있다.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은 전주가 전라남,북도, 제주도를 통합하는 전라감영의 문, 호남평야의 첫 관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호남제일문 편액은 단아하면서도 한편 웅장한 듯하면서도 자칫 권위롭기 쉬우나 오히려 따뜻한 필치가 우아함을 드러내는 고 강암 송성용선생의 글씨다.

북쪽이 허해 부가 드물다고 해서 지세상 허술한 그 쪽을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전주인터체인지를 벗어나 시내로 들어오다 보면 넓디넓은 8차선도로를 가로질러 서있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 반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호남제일문’은 지난 1977년 5월 기존 4차선 진입로에 건립됐다. 이어 19991년 전국체전 진입로 확장으로 헐렸으며, 1994년 8월 13일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전주 IC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여의도광장에 길이 43미터, 폭 3.5미터. 높이 12.4미터를 갖고 있다.

‘호남제일문’은 전주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소중한 미래유산인 만큼 지속적인 보수·정비를 통해 호남, 더 나아가 전라도 정도 천년의 자긍심을 살리기 바란다.

호남제일관(번) '만마관(萬馬關)'

전라감영을 중심으로 호남제일루(광한루), 호남제일정(피향정), 호남제일성(풍남문), 전라감영문(호남제일문)은 있으나, 호남제일관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만마관지(萬馬關址)는  남원에서 완주군으로 들어가는 호남제일관문(湖南第一關門)으로 조선 후기 순조(純祖) 때 축성된 석성의 터이다.

'만마관'은 일만 마리의 말, 곧 천군만마(千軍萬馬)라도 다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의 관문이다.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완주군 역사적 랜드마크인 ‘호남제일관(만마관)’은 완주 군민과 지역주민의 염원인 만마관 복원으로 전북의 역사적 큰 줄기를 바로 세우고 아픈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북쪽의 ‘호남제일문’에 대응해 남쪽에는 상관의 만마관(萬馬關)을 복원하는 게 합당하다.

만마관은 이미 ‘호남제일관(湖南第一關)’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에 ‘호남제일성’에 걸맞는 ‘호남제일관’의 위용을 찾아주는 것이 옳다.

 만마관은 원래 있던 위치에 원래 규모대로 복원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전주, 남원 국도 일부 구간을 지하화하고 성곽을 복원해야 한다

'관(關)'이라는 글자는 '빗장 관'이다. 

빗장을 걸어 잠그면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 관이므로 군사시 설인 요새를 의미하는 말이다. 만마관이 있는 이곳을 전주의 남쪽에 있는 관이라 하여 남관이라 불렀다.
그리고 남관에 있는 만마관 문이 닫히면 전주에서 나가지 못하고 위쪽에 있는 곳에서 머물러야 했는데 그곳을 상관이라 했다. 이들이 사는 곳을 관촌이라고 한다.

이철수의 '완산승경'에 ‘만마도관(萬馬道關)’이 나옴도 강조했다.

만마관(萬馬關)과 도관(道關)이라는 지명은 모두 상관면 용암리(龍岩里)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