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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14> 전주 서산서원(서산사)은 어디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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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14> 전주 서산서원(서산사)은 어디에 있었나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354년에 창건되어 1603년에 교동으로 이건한 전주향교가 있다. 서원으로는 효자동에 황강서원, 동서학동에 반곡서원, 중인동에 청하서원(淸河書院)이 있다.

이밖에 1578년에 설립, 1658년에 사액된 화산서원, 1649년에 설립된 여봉서원, 1669년에 설립된 한계서원, 1646년 설립된 서산서원(西山書院) 등이 있었으나 모두 철폐되었다. 희현당(希顯堂) · 오대사(梧臺祠) · 인봉사 · 예산사(禮山祠) 등도 역시 고종 5년(1868년)에 철폐됐다.

만약 철폐와 소실을 동시에 가정한다면 양사재의 개건(1875년)보다 약간 앞서는 하한이 될 수 있다.

서산사(西山祠) 즉 서산서원(西山書院)은
조선 인조(仁祖) 때  전주에 건립한 사우(祠宇)로, 만육(萬六) 최양(崔瀁, 1352~1424), 존양(存養) 최덕지(崔德之, 1384~1445), 묵암(墨巖) 이계맹(李繼孟, 1458~1523), 표옹(瓢翁)송영구(宋英耉, 1556~160), 서귀(西歸) 이기발(李起浡, 1602~1662)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 1600~1673) 등을 배향했다.

'서행록(西行錄)'은 전남 고흥군에 사는 송정악(宋廷岳, 1697~1775), 송지행(宋志行, 1741~1802), 송석년(宋錫年, 1778~1842)이 당대 절의가 있는 벼슬아치와 석학들에게 선조의 묘문(墓文)을 부탁하기 위해 경기도 및 서울 일대를 왕복하면서 기록한 기행 일기이다.

'서행(西行)'이란 뜻은 곧 '서울에 간다'는 의미이다. 조선후기 3대(代)의 기행일기로, 서행록 속에는 1744년부터 1839년까지 약 100년간 3대의 다양한 여행이 담겨 있으며, 296수에 이르는 많은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서행록의 '신사년(辛巳,1821년) 11월
11일 기록이다.

'아침을 먹고 새벽에 출발했다. 은진(恩津) 삼거리(三巨里) 주막에 이르러 시내를 건널 때에 대석(臺石)이 얼어 있어 있는 바람에 발이 미끄러져 물에 빠졌는데, 물이 무릎 위까지 차올라 옷이 모두 젖어버렸다. 겨우 냇가로 나왔으나 땅도 얼어 있었다. 이런 혹한에 해도 뜨기 전에 이런 변고를 만났으니, 어찌하여 이번 길에 나와 노복으로 하여금 왕래함에 이처럼 낭패의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간신히 1리를 갔는데, 젖은 옷이 굳어가고 발이 너무 시려서 걸을 수 없기에 버선을 벗으려고 하니 손가락이 굳어 벗을 수가 없었다. 노복을 시켜 간신히 벗고 얼어버린 버선을 새 버선으로 바꾸어 신었으니, 행로의 어려운 실상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시암(杮岩) 주점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요기를 하고 전주 삼례(參禮)에 이르러 묵었다. 90리를 갔다'

다음은 12일의 기록이다.

'새벽에 출발하여 용산교(龍山橋)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부내(府內) 의 장영손(張永孫) 집에 도착하였다. 잠시 쉰 뒤에 '서산서원(西山書院)'에 가서 최수일(崔洙一)을 만났다.
대개 오촌(鰲村)에서 서로 작별할 때, 내려가는 길에 찾아가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니, 그 기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주인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에 주인을 데리고 가서 이 찰방을 만났더니, 사또(使道)가 감기에 걸린 데다 온갖 업무로 복잡하여 뵐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번에 두고 간 책자를 사또께 드렸더니 사또가 한 편을 다 열람하시고는, “일찍이 '장릉지(莊陵誌)'를 교정(校正)한 적이 있다”했다고 했다. '서재실기(西齋實記)'를 두고 전에 남겨 둔 책자(冊子 '서재행록(西齋行錄)'을 말함)는 가지고 나와 주인집에서 묵었다'
당시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최수일(崔洙一)이 살았다.

'서산서원'이 전주 어디에 있었을까.

19세기 전반 조선 후기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의 '전주목(全州牧)'지도는 회화식 전국 군현지도로 각 도별 지도 및 군현별 지도, 군사 요충지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주요 산과 고개로는 가련산, 건지산, 고달산, 곤지산, 다가산, 대둔산, 모악산(母岳山), 발산(鉢山), 정각산(淨角山), 천둔산(千芚山), 귀신치, 기린봉, 대화치, 오도치(五道峙), 웅치(熊峙)가 있다.

또, 창고로는 동지산창(東之山倉), 봉산창(峯山倉), 옥야창(沃野倉), 우주창(紆州倉), 이성창(利城倉)이 있으며, 서원으로는 서산서원(西山書院), 인봉서원(麟峯書院), 학봉서원(鶴峯書院) 등이 보인다.

우선,  이 지도를 보면 전주엔 한벽정(寒碧亭)이 보인다. 한벽루도 아니고 한벽당도 아니었다. 또 견훤고성이 보인다. 이는 남고산성을 의미한다. 남고사의 한자는 南高寺로 지금과 다르다.

학봉서원은 천경대 옆에, 오목대가 보이는 곳에 인봉서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가산 희현당 옆엔 화산서원이 보인다.

서산서원은 완산과 곤지산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서산서원은 서문 밖  서남쪽, 용두치(용머리고개) 북쪽에 자리했다.

전주부 서쪽에 화산서원과 가까운 거리를 두고 위치한다. 동서 방향에 가까운 중심축을 바탕으로 전주부를 향해 건립됐다.

서쪽에는 사당이, 마당 중앙에는 강당이, 동쪽에는 가운데 지붕이 높고 양쪽이 낮은 출입문이, 그리고 서원을 애워싸는 담장이 있었다.

서원이 있는 언덕의 아래에는 전주천을 배경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완산지'에 의하면 서원은 전주부의 서쪽 4리에 있다고 했다. 

본디 인조 24년(1646년)에 전주부 동쪽에 봉양동(鳳陽洞)에 사우를 건립, 만육 최양, 존양 최덕지, 묵암 이계맹, 표옹 송영구를 제사했다.

현종 8년(1667년) 서산(西山)으로 옮겨 세우고 다음해에 서귀 이기발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때 운암 이흥발도 배향했다.

*연도가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음.